
켄 로치 감독 3부작이 막을 내릴 예정이다. 켄 로치 감독의 이른바 ‘영국 북동부 3부작’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 <미안해요, 리키>(2019)와 신작 <나의 올드 오크>(2024)를 뜻한다. 영국 북동부를 배경으로 사회적 약자의 현실에 대해 조명한 켄 로치 감독은 <나의 올드 오크>를 끝으로 영화계에 작별 인사를 고했다. 이미 몇 차례 은퇴를 시사한 바가 있는 켄 로치 감독은 ‘임무가 끝나지 않은 느낌’이라며 <나의 올드 오크>를 제작한 이유를 밝혔다. 오는 17일 전국 극장에서 개봉하는 <나의 올드 오크>를 만나기 전 그의 전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미안해요, 리키>를 돌아보고자 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

2016년 개봉한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켄 로치 감독 3부작의 포문을 연 작품이다. 제69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제70회 영국아카데미시상식 작품상, 감독상 등을 수상하며 유수의 시상식을 뜨겁게 달구었다. 2014년 영화 <지미스 홀>을 세상에 내놓은 후 은퇴를 선언한 켄 로치 감독은 이 작품으로 2년 만에 복귀했다. 그는 ‘<지미스 홀>이 내 마지막 극 영화가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영국 내 보수정권이 집권하며 복지예산이 줄자 다시 한번 영화를 통해 메시지를 던졌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심장병 악화로 일을 지속할 수 없는 노인 다니엘 블레이크(이하 댄)와 홀로 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 케이티의 이야기를 담았다. 영화는 댄이 질병 수당 지급 확인을 위한 질문에 대답하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정부 관계자는 그에게 가장 낮은 수준의 신체 능력에 대해 묻는다. 혼자서 걸을 수 있는지, 양팔을 머리 위로 들 수 있는지, 전화 버튼을 누를 수 있는지 등의 질문을 기계처럼 뱉는 질문자에게 댄은 답답함을 숨기지 못한다. 한편, 홀로 두 아이를 키우며 국가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케이티 역시 사정이 다르지 않다. 출석 시간에 늦었다는 이유로 생계 보조금 수급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결국 댄과 케이티는 모두 관공서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댄과 케이티는 우연히 만나 도움을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의지한다. 함께 모여앉아 식사를 하고 웃으며 정을 쌓아가지만 그들이 헤쳐나가야 하는 벽은 높고 험하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시스템은 정작 댄과 케이티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질병 수당 지급 판결에 대한 항고를 준비하는 댄은 관료적 체계에 지쳐가고 케이티는 돈을 벌기 위해 성노동자가 되기로 한다.

영화는 댄과 케이티의 사연에 깊게 관여하거나 동요하지 않는다. 켄 로치 감독은 그저 담담한 태도로 그들의 상황이 특수한 경우가 아닌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일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켄 로치 감독은 스크린을 넘어 현실의 부조리에도 적극 목소리를 낸다. 지난 2020년 진행된 '한국판 <나, 다니엘 블레이크> 소송'에 켄 로치 감독이 힘을 더한 것이다. 2005년 심장 수술로 일하기가 어려워진 고 최인기 씨가 ‘근로 능력 있음’ 판정을 받으며 문제가 시작되었다. 수급 자격 유지를 위해 강제로 일자리에 참여한 그는 일을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부종과 쇼크로 입원하였고 2014년 8월 28일 사망했다. 이에 2017년 유족들은 수원시와 국민연금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을 지원하는 빈곤사회연대는 서명 운동을 시작했고 켄 로치와 각본가 폴 래버티, 제작자 레베카 오브라이언 등 제작진이 연대의 뜻을 밝혔다. 한국판 <나, 다니엘 블레이크> 소송은 1심 소 제기 2년 4개월 만에 승소 판결이 나왔다.
<미안해요, 리키>(2019)

2016년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두 번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켄 로치 감독은 다시 한번 영화계 은퇴를 고민했다. (켄 로치 감독의 첫 번째 황금종려상 작품은 2006년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다.) 그럼에도 그가 다시 카메라를 잡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나아지지 않는 현실 때문일 것이다.
<미안해요, 리키>(2019)는 '긱 이코노미'의 부작용에 대해 말한다. 긱 이코노미(gig economy)란 필요에 따라 일을 맡기고 구하는 경제 형태를 말하며 계약직 노동자, 프리랜서 등의 업무 환경이 여기에 해당한다. 은행의 파산으로 직장을 잃은 가장 리키는 택배사에 ‘온 보딩(Onboarding)’한다. 기업이 개인을 채용하는 것이 아닌 사업자로서 협력한다는 의미이다. 리키는 내 집 마련의 꿈을 품고 사업을 시작하려 한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관리자의 말에 리키는 역시 의지를 다졌을 것이다.
매일 14시간씩 주 6일을 일하면 하루에 최소 1백 55파운드, 한 주에 1천 2백 파운드를 벌 것이라는 명확한 계산에 따라 리키는 호기롭게 일을 시작한다. 장거리 이동을 하며 돌봄 노동을 하는 아내의 차까지 팔아서 밴을 마련한 리키는 해고 위기에 놓인 동료의 노선까지 얻으며 꿈을 위한 발걸음을 뗀다.
자기 운명의 주인공이 된 리키는 회사의 규칙에 따라야 하지만 보호는 받지 못한다. 정해진 시간 내에 물건을 배송해야 하고, 고정 임금 없이 수수료를 받는 회사의 방식은 리키를 더욱 열심히 일하게 한다. 그러나 열정과 의지는 삶의 풍랑 속에 쉬이 무너진다. 리키의 아들 셉은 학교를 나가지 않고 방황하기 시작한다. 학교와 경찰서에서 부모를 소환하고 그때마다 일을 쉴 수 없는 리키와 그의 아내 애비는 당황한다. 쉬지 못하고 일하는 탓에 리키는 꾸벅꾸벅 졸며 운전을 하고 가정에서는 날카로운 말들이 오간다.

플랫폼 시장으로 대표되는 많은 산업에서 노동 시장의 유연성이라는 명목하에 임시 계약으로 노동자를 고용한다. ‘일한 만큼 번다’는 신자유주의적 모토는 개인의 자유와 역량을 지지해 주는 듯하다. <미안해요, 리키> 속 리키의 택배 회사 역시 ‘선택’을 강조한다. 택배 수송을 위한 밴을 마련하는 것도, 차량 등의 문제로 일을 하지 못해 대체자를 구하는 것도 개인의 몫이다. 동시에 어떠한 사정이든 일을 하지 못할 경우 200파운드의 벌금을 내야 하며, 고가의 택배 상품을 노리는 강도에게 화를 당했을 경우 손실된 택배에 대한 보상을 해야 한다. 이는 자유에 대한 책임이며 이 시장에 뛰어든 개인 선택의 결과이다. 일을 할수록 빚은 쌓여가지만 리키는 일을 놓을 수 없다. 영화는 강도 사건으로 인해 망가진 몸에도 택배 차량을 몰고 나가는 리키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 필사적으로 말리는 가족들을 외면하고 리키는 다시 노동의 현장으로 뛰어든다.
켄 로치 감독의 전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주인공 댄의 모습을 통해 부조리한 국가 체제의 저항하는 개인의 모습을 담는다. 물론 댄의 비극으로 영화는 막을 내렸지만 케이티가 그의 장례식에서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한다.’는 항고 글을 대신 읽어 내려가며 끝없는 저항의 의지를 암시했다. 이후 <미안해요, 리키>로 4년 만에 돌아온 켄 로치 감독은 서민들을 위태롭게 만드는 현실을 목도하고 더욱 분노에 찬 모양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촬영을 위한 취재 차 자선 푸드 뱅크를 방문했다는 켄 로치는 그곳에서 여럿의 파트타임 노동자들을 만났다. 이곳에서 만난 이들의 사연을 들으며 켄 로치는 은퇴 고민을 접었다고 전했다. 그는 “<미안해요, 리키>를 취재하며 들은 이야기 중에는 당뇨병 환자였는데 업무를 대체할 사람을 찾지 못해서 크리스마스 전날 엄청난 양의 택배를 나르고 결국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난 사람의 사연이 있었다. 긱 경제는 사람을 착취하는 시스템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