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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헤어질 결심〉보다 공감된다는 여성 관객 말이 최고의 평이었죠” 〈울산의 별〉 정기혁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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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별〉 포스터 (사진 제공=영화의온도)
〈울산의 별〉 포스터 (사진 제공=영화의온도)

남편의 사고사 이후 조선소에 일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윤화(김금순)는 어느 날 급작스러운 해고 통보를 받는다. 비트코인으로 전 재산을 날린 아들과 학업은 뒷전인 채 서울로의 탈출만 꿈꾸는 딸. 그리고 ‘남편 잡아먹은 여자’라 욕하며 땅을 빼앗으려는 친척들까지…. 각자가 직면한 자신들의 고통 때문에 서로를 배려할 수가 없는 가족. 이 가족은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들의 끝에는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울산의 별>은 단편 <작품 번호 3번. 중력>(2001) 등 다수의 작품을 통해 현실을 살아가는 약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며 유수 영화제에서 주목받아 온 정기혁 감독의 데뷔작이다. 가장, 어머니, 노동자 등 외부로부터 씌워진 프레임에 갇혀 모든 일을 하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못했던 한 여성, 윤화를 둘러싼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가히 윤화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는 인생 연기를 선보인 김금순 배우는 <울산의 별>로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배우상과 한국영화감독조합상-메가박스상을 거머쥐며 ‘별’의 시간을 맞이하기도 했다.

그의 첫 상업영화 <울산의 별>은 아버지의 고향 ‘울산’이 배경이다. 쇠락해가는 도시 울산을 아버지와 오가며 사촌형제들과 나눴던 이야기로 하루 만에 시나리오를 썼다. 약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노동자의 애환, 계급의 대물림, 세대와 계층 간의 갈등 등 현실의 문제점을 117분의 러닝타임 동안 조목조목 다루며 감정을 응집시킨다. 정기혁 감독을 용산에서 만나 <울산의 별>에 대해 들어봤다.


〈울산의 별〉 정기혁 감독  (사진 제공=영화의온도)
〈울산의 별〉 정기혁 감독 (사진 제공=영화의온도)

개봉이 많이 늦어졌죠. 1월 24일 드디어 관객들을 만납니다.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2022년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이고 좀 시간이 흘렀네요. 사실 독립영화는 개봉 지원을 받지 않으면 기다려야 하니 좀 그렇게 되었습니다. 장편 영화로 영화제가 아닌 극장에서 관객들을 만나는 것이 처음이기도 해서 설레기도 하네요.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으면 좋겠는데, 워낙 쟁쟁한 영화들이 많아서 관 잡기가 쉽지가 않아요. 그래도 관객들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고 설레고 그런 마음입니다.

우선 제목부터 질문드릴게요. <울산의 별>이라는 제목은 어떻게 지으신 건가요?

별은 스스로 빛나는 존재가 아니잖아요. 영화에서도 보이듯 노동자는 소모되고 숨겨져 있다는 의미도 담고 있어요. 또 노동이라는 행위를 통해 얻는 ‘트로피’라는 것이 노동자에게 많이 돌아가기보다는 기업이나 사용자에게 더 돌아간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사실 시나리오에 제목을 상징하는 장면이 있었어요. 조선소 부둣가로 떠밀려오는 대왕오징어의 시선에서 보이는 크레인들의 불빛들이었죠. 여건상 그 장면을 찍지는 못했지만요. 배급사를 비롯해 여러 사람들과 다른 제목을 고민해보기도 했는데, <울산의 별>보다 더 좋은 제목이 안 나오기도 했습니다(웃음).

영화의 출발점은 무엇이었나요?

아버지 고향이 울산이에요. 사촌들도 울산에 살고 있고요. 몇 해 전 추석에 부모님을 모시고 울산에 갔어요. 간 김에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도 했고, 사촌형제들과 대화도 나눴어요. 그때가 생활인으로서 사촌형제들과 처음 대화를 나눴던 거 같아요. 가족 문제, 자녀 문제 같은. 그때 느꼈던 점들이 상경하는 차 안에서 정리가 되더라고요. 어렸을 때부터 울산을 다녔던 단상이 여기에 융합되면서 서울에 도착해서 하루 만에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울산의 별〉 (사진 제공=영화의온도)
〈울산의 별〉 (사진 제공=영화의온도)

 

완전 상상의 시나리오는 아닌 셈이네요. 자전적인 부분도 있을 텐데, 특히 영화감독 캐릭터도 있으니까요.(웃음)

아버지 고향이 울산이고 저는 서울이라 그나마 좀 객관화될 수 있었다고 봐요. 사촌들에 대해서도 공감하는 부분도 있지만, 떨어져서 볼 수 있었으니까요. 말씀하신 영화감독 캐릭터는 뭐, 자전적인 부분이 전혀 없지는 않고요.(웃음) 대사 중에 “나 결혼할 때 돼서 여기저기 전화 돌리는데, 아무도 안 받아. 또 영화찍는 줄 알았대”라는 대사가 있어요. 이런 거죠. 영화 연출하려고 버티는 감독 지망생 중에 ‘민폐 캐릭터’들이 좀 많아요. 풍족하지 않으니까요. 이들이 주변에 연락할 때도 영화찍는 거 도와달라는 이야기들을 많이 하거든요. 독립영화라고 해서 징징대기는 싫은데, 지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듭니다.

시나리오를 하루 만에 완성하셨다지만, 많이 고치셨을 것 같아요.

2018년에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2019년에 영화진흥위원회 공모전에 출품해서 제작 지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최초 시나리오는 남자가 주인공이었어요. 부부의 이야기가 중심이었죠. 그때 영화 소개글을 쓰는데 “가장이 사회적 거세를 당하는 순간을…”이라는 문장을 쓰고 보니 마음에 걸리는 겁니다. 남성적 표현이기도 했고요. 사실 사회에서 밀려나는 순간 느끼는 감정은 남자든 여자든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니까요. 누나가 셋인 집안에서 자라서 여성 문제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고 느꼈는데, 이 글을 쓰면서 내가 여성문제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스스로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주인공을 여성으로 바꾸면서 이런 문제에 대해 이해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자 주인공인 시나리오로 제작 지원을 받았지만, 그래서 중요한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여자 주인공으로 바꾼 거죠. 사실 윤화 역을 연기한 김금순 배우께 시나리오를 드릴 때도 남자 주인공 버전으로 드렸어요.

〈울산의 별〉 (사진 제공=영화의온도)
〈울산의 별〉 (사진 제공=영화의온도)

여자 주인공으로 변경하셨다고는 하지만, 영화에서 윤화는 그냥 남자로 봐도 무방할 정도예요.

그렇죠. 주인공을 여성으로 설정하고 시나리오 쓰다 보니까 제 시선이 저도 모르게 온정주의로 흘러가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여성문제를 전부 이해할 수는 없기에, 남자가 주인공인 상황으로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성만 바꿔도 똑같지 않을까, 어쨌든 사회에서 밀려나는 상황에 부딪힌다면, 남자나 여자나 모두 같을 것 같아서요. 그런데 저는 이 영화가 여성 영화로 읽히는 건 감독으로서 경계해요. 윤화가 여성일 뿐인 거죠. 저는 <울산의 별>이 노동자의 이야기로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 더 큽니다.

먼저 영화를 본 여성 관객의 반응이 궁금하네요.

음, 이런 이야기를 제가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부산국제영화제 때 <헤어질 결심>(감독 박찬욱)이 나왔었거든요. 한 여성 관객께서 GV에서 “<헤어질 결심>보다 공감이 된다”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사실 남자 감독으로 여성문제를 다룬 영화를 찍어서 조심한 부분이 있었는데, 어쨌든 공감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들은 것 자체가 굉장히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울산이면 경상도 대표 도시 중 하나인데, 뭔가 지역적 특성을 반영하신 걸까요?

그런 건 아니에요. 윤화라는 캐릭터가 처한 환경적 요소가 컸다고 봅니다. 아이가 둘인데, 남편이 석연치 않은 사고로 일찍 세상을 뜨잖아요. 두 아이를 키우려면 누구라도 방어적으로 그렇게 변할 수밖에 없었을 거 같아요. 실제 어머니로서 세월을 보낸다는 게 그렇잖아요. 자신의 본래 모습이라든가 여린 면들은 감춰지고, 생활하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거칠어질 수밖에 없는 거 같아요. 윤화 역을 맡은 김금순 배우에게 리딩 전에 드렸던 이야기도 그런 방향이었어요. 윤화는 영화에서 시종일관 화내고 소리 지르는 캐릭터였으면 좋겠다고요.

〈울산의 별〉 (사진 제공=영화의온도)
〈울산의 별〉 (사진 제공=영화의온도)

그랬군요. 김금순 배우와는 어떤 인연으로 데뷔작 주연으로 섭외하신 건가요?

영화를 찍으면서 때론 어떤 우연이 좋은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박사과정할 때 한 친구의 영화 현장에 하루 스태프로 간 적이 있어요. 그때 김금순 배우가 소소한 역할로 캐스팅되어서 뵈었죠. 보자마자 ‘어!’하는 느낌이 왔어요. 그때 이미 시나리오를 쓰던 중이었는데, 굉장히 잘 맞을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따로 연락은 안 드렸었고요. 그런데 촬영 마치고 뒷풀이에 친구가 오라는 거예요. 하루 한 걸로 무슨 뒷풀이까지 가나 했는데, 꼭 오라해서 갔더니 마침 김금순 배우도 오셨더라고요. 그날 밤을 새며 대화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밑도 끝도 없이 말씀드렸죠. 시나리오 보내드리겠다고요. 어떤 역할을 특정하지도 않은 채로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리면서요.

그때면 시나리오가 남자주인공 버전이었겠네요.

네. 아마 시나리오 보시고 아내 역할인 줄로 아셨을 거예요. 시나리오를 보내드리고도 한동안 연락을 못 드렸어요. 코로나 상황이 너무 심했으니까요. 본격 제작에 들어가면서야 연락을 드렸죠. 시나리오가 바뀔 것이고, 주인공 역할이라고요.

김금순 배우가 뭐라고 하던가요?

너무 좋아하셨어요. 같이 해보자고요. 만난 날 서로 재는 것도 없었어요. 저야 뭐 이미 많이 재봤지만, 김금순 배우랑 너무 하고 싶었거든요(웃음). 바로 하겠다고 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죠. 사실 김금순 배우는 이미 소속사도 있는 상황이었고, <울산의 별>이 독립영화다 보니 넉넉지 않은 상황이었는데도 제작사 쪽도 설득해주셔서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울산의 별〉 (사진 제공=영화의온도)
〈울산의 별〉 (사진 제공=영화의온도)

촬영은 몇회차로 하신 거예요?

2020년 11월에 크랭크인 해서 크리스마스 이브에 크랭크업했습니다. 20회차가 좀 넘었어요.

전부 울산을 배경으로 찍은 건가요?

그러고 싶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섭외가 너무 힘들었어요. 2019년에 찍으려고 했는데, (코로나가 터지고) 코로나 잠잠해지면 찍으려 기다리다가 점점 더 상황이 안 좋아져서 그냥 진행한 거죠. 어려운 여건에서 울산에는 섭외가 너무 안 되더라고요. 현대 미포조선소를 섭외하고 싶었는데, 연출부가 “말도 안 되죠. 거긴 안 될 텐데요”라고 하더라고요.(웃음) 부산에서 섭외를 많이 했어요.

소모되는 노동자를 다룬 영화다 보니 조선소 섭외가 더 어려웠을 거 같아요.

그런 점도 있었을 거예요. 부산에 섭외가 된 곳에서는 한 번 촬영 중에 이런 일도 있었어요. 회장님이 지나가시다가 인사를 나눴는데, 따님이 영화 관련 일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비교적 수월하고 호의적으로 섭외할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또 부산영상위원회에서도 도움을 주다 보니, 자연스럽게 부산 쪽 촬영 분량이 늘 수밖에 없었죠. 나중에는 부산에서 이렇게 많이 찍었는데 어떻게 <울산의 별>이냐, <부산의 별>로 하자는 말도 나왔고요.(웃음)

〈울산의 별〉 (사진 제공=영화의온도)
〈울산의 별〉 (사진 제공=영화의온도)

아찔합니다.(웃음) 제목 이야기가 나와서요. 아까 잠깐 말씀하셨는데, 대왕오징어 에피소드는 어떻게 만드신 건가요?

사촌 형한테 들은 이야기에요. 실제로 조선소에 다 늙은 오징어가 떠밀려온대요. 사람들이 건져 먹기도 한다고요. 시나리오를 쓰다 생각이 난 거죠. 영화가 하는 이야기랑 대왕오징어가 묘하게 접점이 있거든요. 깊은 물속에 사는 대왕오징어가 다 늙어서 죽어갈 때쯤 힘없이 떠밀려오는 모습들이요. 수중촬영을 해서라도 찍고 싶을 정도로 시나리오상 중요했던 장면인데 독립영화라는 한계로 타협해야 했던 상황이라 못내 아쉽습니다.

제가 본 <울산의 별>이라는 영화는 세 세대의 갈등을 다루는 것 같습니다. 윤화의 세대, 그 윗세대 그리고 윤화의 아들 세대죠. 윤화는 대한민국을 먹여 살린 조선업을 자랑과 긍지로 여기며 노동, 땀의 가치를 중시합니다.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라면 직장에서 모멸감을 받고 버티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요. 윤화의 윗세대는 또 달라요. 얼핏 보기엔 옳은 말만 하는 것 같지만, 한꺼풀 벗겨보면 결국 자식을 위해 선산을 팔자고 하고요. 윤화를 보고 자란 자녀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일(미용)을 바라는 딸이나, 세상이 바뀌었다고 한탕을 노리는(코인) 아들이나요. 한 세대가 아니라 세 세대 이야기로 구성한 이유가 있을까요?

노동자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처음이었어요. 좀 더 자세하기 이야기하면 ‘소모’되는 노동자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시스템 안에서 노동자들이 어떻게 소모되고 밀려나는지를요. 그리고 노동자가 이야기의 중심이라면 자연스럽게 가족이 따라올 것이고. 그 안에서 가족의 갈등이 드러나요. 변화에 밀려나는 가족도 있고, 순응하는 가족도 있을 테며, 저항하는 모습도 있을 거란 생각이 시나리오를 수정하면서 들었습니다. 시나리오 단계에서 오히려 윤화의 이야기에 집중하자는 의견도 있었어요. 저는 그것보다는 누군가 자기의 이야기를 대변하는 캐릭터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야기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죠. 결과적으로 큰 욕심인지는 모르겠으나, 없는 것보다는 모든 사회를 구성하는 대표 세대를 통해 전체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서 이렇게 구성한 거 같아요.

영화 찍으면서 가장 공들였던 부분이 있다면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 아직 모르겠지만, 외적으로는 울산이라는 도시가 가진 이미지를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울산의 별>을 만들 즈음에 러시아 감독인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영화를 자주 봤거든요. <리턴>(2006)이나 <추방>(2007) 같은 영화들요. 러시아의 도시들이 가진 역사들을 지역이 가진 고유의 이미지와 색감으로 잘 표현되었거든요. 그걸 <울산의 별>에서 구현해보고 싶었어요. 제게 울산이라는 도시를 한마디로 표현해보라고 하면 ‘노쇠한 말의 뒷근육’ 같은 느낌이었거든요. 대한민국도 점점 변화하고 있습니다. 노동집약적이거나 남성중심적인 산업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죠. 시나리오 쓸 무렵은 언론에서 ‘조선업’의 위기라고 부를 정도였어요. 거기에 코로나까지 덮쳤으니…. 노동의 도시 울산에서 여성문제 등으로 변화하는 것들을 표현해보고 싶었습니다.

〈울산의 별〉 (사진 제공=영화의온도)
〈울산의 별〉 (사진 제공=영화의온도)

내적으로는요?

내적으로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 있어요. 시나리오를 읽고 ‘빌런이 없다’라는 피드백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영화에 빌런이 없으면 심심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하는 과정에서 저는 끝까지 밀어붙였습니다. 에피소드로 설명하자면, 윤화에게 해고를 통지하는 직원(김호진)이 처음에는 악역처럼 연기했어요. 제가 이 영화에서 악한 사람은 없으면 좋겠다는 디렉션을 주니 깜짝 놀라더라고요. 완전 악역인 줄 알았다고요. 물론 코인 관련한 작은 악역은 있지만, 같은 노동자일 뿐인데, 서로 밥그릇 뺐는 싸움을 하면서 오해가 생길 수는 있지만, 대치하고 악하게 대하지는 말자는 거였죠.

추운 겨울에 바닷가에서 찍어서 촬영 현장이 힘들었을 것 같은데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조선소 촬영은 당연히 힘들 수밖에 없었죠. 실제 일하시는 공간이라 방해를 해서도 안 되지만, 배우들이 촬영하면서 안전상의 문제도 있었으니까요. 그런 공간적 제약 때문에 원하는 이미지를 얻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바닷가에 추운 날씨여서 배우들이 너무 힘들었죠. 특히 낚시하는 장면은 감정 씬이어서 너무 추워서 힘들어하셨어요.

〈울산의 별〉 (사진 제공=영화의온도)
〈울산의 별〉 (사진 제공=영화의온도)

선산에서 제사를 지내고 가족들이 모두 모여 음복하는 장면을 보면서 <초록물고기>(감독 이창동, 1997)가 생각나더라고요. 거기서는 냇가에서 고기를 구워 먹었던가요. 여하튼 가족끼리 싸우는 건 똑같았고요.(웃음) 혹시 의식한 부분일까요?

기시감이 있죠.(웃음) 그 영화 뿐만 아니라 <좋지 아니한가>(감독 정윤철, 2007) 같은 영화도 있고, 말씀하신 그런 장면들은 많은 영화에 있을 거예요. 다만, 저 역시 한국 영화에 이런 장면이 많기에 의식을 안 한 건 아닌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의식한다고 해서 하지 말하야겠다는 생각은 안 들더라고요. 편집하면서 빠진 대사가 있어요. 전라도 사투리인데요.

맞아요. 저도 그 부분이 딱 들어오더라고요.

윤화의 작은 어머니가 전라도 사투리를 쓰시죠. 사실 시나리오상 디테일이 있었습니다. 작은 어머니 대사 이후에 윤화가 처음으로 물어요. “전라도셨는교?”라고요. 저희 윗세대는 여성들에게서 고향까지 지워지는 느낌이 있었거든요. 그런 디테일을 넣었다가,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편집에서 드러냈죠. 그냥 사투리 정도를 넣고, 눈치챌 관객들만 눈치채면 좋겠다는 생각으로요.

이상적인 가족이라고 하면 그렇긴 한데, 감독님께 가족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저는 제 가족을 생각할 때 이런 생각이 들어요. 만나면 맨날 지지고 볶고 싸워요. 그런데 결정적 순간에 내 편이 되는 사람이 가족 아닐까 하는. 평소에는 마음에 안 드는 것도 많고 하겠지만 결국 그게 확장되면 나라가 된다는 생각도 들거든요. 예전 어떤 영화에서 우주인이 침공하면 전 지구인이 한 편이 되듯이요.(웃음) 지금 전 세계가 아웅다웅하지만 결정적 순간이 오면 서로의 편이 되줄 수밖에 없는 것이 가족 아닐까요? 맛있는 거 먹을 때 그래도 가끔 생각나는.

〈울산의 별〉 (사진 제공=영화의온도)
〈울산의 별〉 (사진 제공=영화의온도)

영화에서 서로 자기 할 말만 하고 막장으로 치닫던 세 세대의 이야기는 뜻하지 않게 아들의 취업 소식으로 전환 국면을 맞습니다. 그런데 이게 엄밀하게 따져보면 엄마가 잃은 일자리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또 한 명의 대를 이은 노동자의 탄생이 희망을 주는 셈인데요. 뭔가 궁극적인 해결책은 아닌 거 같아서 다소 의아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길보다 이렇게 설정한 이유가 있을까요?

절망 뒤에 희망이 등을 맞대고 온다고 하죠. 어떤 관객은 영화의 결말을 희망으로 읽기도 하시더라고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았어요. 방금 기자님 말씀대로 사실 아들의 취직 소식은 또 다시 소모되는 노동자의 탄생일 뿐입니다. 시간이 흘러 아들이 엄마 나이가 되면 다른 결말을 맞이할까요? 그렇지 않다고 보거든요. 그 생활에서 노동을 제공해 얻는 트로피라는 건 생활인으로서 월급이 전부에요. 그래서 윤화가 더 거기에 집착하는 것일 테고요. 자아를 투영할 수 있는 허울이 그것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자아실현이라는 것이 뭐 대단한 게 아니라 가장으로서 생활 영위하는 정도가 전부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요. 나름 제 디테일 안에서는 아들 세진의 “고목탑도 무너졌으면 좋겠다”라는 대사로 표현하기도 했고요. 또 소모될 노동자의 탄생으로 생각한 거죠.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의 결말을 희망으로 보는 관객의 해석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 그런가요?

이걸 희망으로 보신다면 희망으로 봐도 된다고 봐요. 노동할 수 있는 것 자체를 삶의 행복으로 느끼는 분들도 분명 있으니까요. 저는 노동을 폄훼하는 게 아닙니다. 노동의 댓가를 노동자가 얼마나 가져가는가를 질문한 거죠. 사용자에 비해 상당히 빈약하지 않은가, 그렇게 대물림되는 계급의 이야기로 표현한 것이죠. 코인이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받지는 않지만, 세진이는 어쨌든 코인이라는 도구로 자본주의를 벗어나려고 했잖아요. 그런데 다시 무릎을 꿇고 대물림하는 걸 구조적인 서사로 만든 겁니다. 개인 서사로 보면 가장 성공한 캐릭터는 딸 경희입니다. 도망이 되었든 어찌 되었든 남성중심적인 도시에서 벗어났으니까요.

<울산의 별>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무엇이었나요?

사실 가족의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약자들의 연대를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들이 아웅다웅하면서 살지만, 방금 가족을 표현할 때 결국 내 편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런데 약자를 적대시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계급 간, 젠더 간에서도 그렇고 지금 정치도 너무 그렇게 만들어가는 거 같아요. 돈을 좀 더 번다고 강자가 아닌데, 연대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이야기를 <울산의 별>에서 해보고 싶었습니다.

〈울산의 별〉 포스터 (사진 제공=영화의온도)
〈울산의 별〉 포스터 (사진 제공=영화의온도)

‘시스템’ 이야기도 많이 나와서요.

일부러 그렇게 넣었죠. 제가 영화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약자의 연대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서로 보살피고 돌보면 좋겠다고요. 그렇게 보면 이 영화에서 안타고니스트(반동인물)는 시스템이라고 봤어요. 시스템을 누가 만든 건지는 모르지만 결국 시스템 안에서 소모되고 쓰임이 다하면 버려지는 거 같아서요. 이렇게 말하면 너무 비관적인 거 같긴 한데, 오히려 이 영화의 안타고니스트는 시스템이 아닌가 싶습니다.

완전 <매트릭스>네요.

그렇습니다!(웃음)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부모님은 혹시 영화를 보셨는지, 또 어떤 반응이셨는지요.

아버지는 제조업과 밀접한 일을 하셨는데, 그때는 대한민국이 고성장기여서 황금기를 누렸던 시기죠. 영화를 보시고는 “네 영화에는 왜 이렇게 사람들이 담배 피고 욕을 하냐”시더라고요.(웃음) 어머니가 오히려 많이 공감해주셨어요.

이제 감독님 이야기를 조금 여쭤보려고요. 영화감독 꿈은 언제부터 꾸신 건가요?

제가 원래 전자공학 전공입니다. 희망차게 첫 수업을 들어갔는데 이걸로 평생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니 심각해지더라고요. 날도 따뜻하겠다, 수업도 안 들어가고 학교 운동장에 누워서 한 열흘을 잤어요. 처음으로 제 인생에 대해 걱정이 들었으니까요. 뭘 할까, 고민하다가 좋아하는 거 하자는 생각을 했어요. 전형적인 X-세대의 발상이었죠.(웃음) 어렸을 때부터 영화 보고 책 읽는 거 좋아했으니까요. 그러다가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이라는 단순한 생각에서 시작한 것 같아요.

처음 극장에서 본 영화는 기억나세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E.T.>였죠! 그것도 더빙영화로요. 글도 잘 못 읽던 어린 나이에 큰누나랑 보러 갔어요. 제가 자막을 못 읽으니 누나가 귀에다가 소곤소곤 말해줬던 기억이 있어요.

전자공학도가 영화를 하겠다고 하니 부모님은 뭐라 하시던가요?

얼마나 뜬구름 잡는 이야기였겠어요?(웃음) 아버지께서 조건을 다시더라고요. 군대를 갔다와서도 그 마음이 안 변하면 하라고요. 말씀을 거스를 수는 없으니 군대를 갔고요. 제대했는데도 하고 싶더라고요. 또 조건을 거시더라고요. 영화학교 가서 제대로 배우라고요. 그래서 다시 용인대 영화학과에 신입생으로 들어갔습니다.

〈울산의 별〉 정기혁 감독 (사진 제공=영화의온도)
〈울산의 별〉 정기혁 감독 (사진 제공=영화의온도)

영화판에서 실제로 일한 건 언제부터인가요?

그 전에 학교도 다녔고, 군대까지 다녀온 신입생이니 나이가 많잖아요. 스물다섯이니 동기들이 스태프로 잘 안 불러주더라고요. 부담이 되어서 그랬는지. ‘쭈구리’처럼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뮤직비디오 작업을 하던 한 형이 조감독 제안을 했어요. 그때 열심히 뮤직비디오를 찍으면서 MTV PD 제안도 받았죠. 그런데 제가 하고 싶은 건 영화여서 안 했어요. 다시 영화판으로 와서 단편부터 시작한 거죠. 노경태 감독의 <검은 갈매기> 조감독이 영화판에서 ‘페이’를 받고 일한 유일한 작업입니다. 이후에 제 스스로 부족함도 느껴서 대학원에 진학했고요.

영향 받은 감독은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환상의 빛>(2016) 같은 영화 만들고 싶었어요. 되게 느리고 불친절한. 그런데 그런 시나리오 썼다가는 제작 지원은 절대 안 될 거 같더라고요(웃음). 그래도 처음에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이후에는 아까 말씀드렸던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감독 영화를 좋아했고요. 다르덴 형제 감독의 영화도 많이 봤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본 모든 영화의 감독이 스승이었다고 생각해요.

차기작으로는 어떤 영화를 준비하시나요?

 

이미 차기작 촬영이 끝났습니다. 부산영상위원회에서 제작지원을 받았어요. <97 해자, 표류기>(가제)라는 영화인데, 97년생 해자가 주인공인 영화입니다.(웃음) 부산이 고향인 해자가 서울 올라와서 살다가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부산에 다시 내려갔다가 벌어지는 일이에요. 어머니가 빌려준 돈을 받으러 돌아다니다 겪게 되는 일이죠. 1997년이면 IMF 사태도 있었고, 90년대 후반에 태어난 이들에 대한, 그즈음에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에 대해 느껴지는 것들이 좀 있어서, 이야기해보고 싶었거든요. 그걸 시나리오로 썼습니다.

재밌을 거 같은데요?

후우(한숨). 감독들이 다 그렇잖아요. 시나리오 때는 정말 재밌을 거 같은데, 촬영하고 나면 온갖 걱정거리가 생깁니다.(웃음)

〈울산의 별〉 정기혁 감독과 배우들 (사진 제공=영화의온도)
〈울산의 별〉 정기혁 감독과 배우들 (사진 제공=영화의온도)

마지막으로 영화를 볼 관객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최근에 이선균 배우가 세상을 떠나는 너무나도 가슴 아픈 일이 있었죠. 지금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서로 너무 적대시하고 공감하지 않는 것 같아요. <울산의 별>이라는 영화가 이에 대한 핵심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지만, 남녀, 세대 간에 좀 이해를 하면, 크게 봐서 이런 비극적인 일들이 안 일어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는 영화라고 봐요. 자식은 자식대로 자기 욕심으로 사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잘해 보려고 발버둥을 치는 거고, 부모세대는 그 세대대로 지키고 싶은 것들이 있는 거겠죠. 갈라치기보다는 서로 이해하자는 마음으로 영화를 봐주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