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과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제치고 일본 제97회 「키네마준보」 '일본 영화 베스트 10' 1위에 오른 영화 <오키쿠와 세계>가 개봉했다. (*키네마 준보는 1919년 창간된 일본 영화 전문 잡지로 이곳에서 매년 발표하는 '일본 영화 베스트 10'은 일본 아카데미상, 블루리본상,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와 함께 일본 영화계의 권위 있는 상 중 하나로 꼽힌다.)
160년 전 에도(오늘날의 도쿄)를 배경으로 사회 최하층 사람들이 지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담은 <오키쿠와 세계>. 똥, 가난, 차별, 곤궁과 같은 단어들이 영화 이곳저곳을 부유하지만, 감독 사카모토 준지는 유머와 휴머니즘을 놓치는 법이 없다. 팬데믹을 거치며 버석해진 마음을 끌어안고 사는 우리에게 영화는 몽글몽글한 잔상을 남긴다.

영화의 배경은 에도 시대 말기. 17세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에 막부 체제를 확립한 뒤 200년 이상 이어온 권력 시스템이 무너질 참이다. 쇄국을 고수하던 일본이 서양의 압박으로 문호를 개방하며 사회는 대변혁기를 맞이한다. 사무라이 계급도 변혁의 직격탄을 맞는다. 시대의 추세에 밀려 설자리를 잃은 무사들은 각자 제 살길을 찾아야만 한다. 불의를 호소하는 바람에 무가의 저택에서 쫓겨난 오키쿠(쿠로키 하루)의 아버지, 마츠무라 겐베이(사토 코이치)도 그중 한 사람이다.

오키쿠와 그의 아버지는 방음이 안되는 공동주택에 산다. 홍수가 나면 동네마다 변소가 넘치는 열악한 이곳에서도 오키쿠는 품위를 잃지 않는다. 여기서 품위란 사무라이 가문 출신이라는 배경에서 오는 것도,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우월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오키쿠는 사람을 귀하게 여길 줄 안다. 비가 오는 날 우산 없이 공용 변소의 똥을 푸는 이들에게 다가가서 말을 건네는 건 오키쿠 정도다.

한편, 넘쳐흐르는 똥으로 먹고사는 사람들도 있다. 일렁이는 변혁의 물결과 무관하게 에도에 발 딛고 사는 민초의 삶은 그저 고달프다. 모두가 힘들고 대부분 가난하다지만 분뇨를 사고파는 청년 야스케(이케마츠 소스케)와 츄지(칸이치로)의 삶은 비루하기 짝이 없다. 인분을 매우 자주, 그리고 자세히 보여주는 이 영화가 흑백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종일 허리를 굽혀 똥을 푸고, 똥으로 가득 찬 등짐을 둘러메고 농촌으로 향하는 이들의 발걸음은 자주 무시당하고, 모욕당한다. 도시에서 인분을 구매해 농촌으로 판매하는 이 비즈니스. 지금으로 치면 친환경 사업으로 인정받겠지만, 위선적인 당시의 세상에는 그저 천한 일일 따름이었다.

영화는 이 비루한 세 청춘이 처음 만난 1858년부터 1861년까지 3년간 이들을 지켜본다. 장대비가 쏟아지던 여름, 에도의 한 처마 밑에서의 우연한 만남 후 오키쿠는 두 청년을 지켜보고, 츄지는 오키쿠를 훔쳐본다. 그 사이 몰락한 사무라이인 오키쿠의 아버지가 칼에 쓰러지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목을 다친 오키쿠가 목소리를 잃기도 한다. 상실감으로 오키쿠가 그저 방으로 숨어들자 이웃들은 음식을 나눈다. 한 노인은 글을 모르는 츄지에게 고백의 언어를 가르쳐 주고, 츄지는 글보다는 결국 그다운 방식으로 사랑을 내지른다. 야스케는 구타를 당하면서도 "우리가 없으면 에도는 똥천지가 될걸"이라 외치며 마지막 존엄을 쥐어짜본다.

아직 ‘세계’라는 단어조차 없었던 시절, 목소리도 사라지고 똥내와 흑백의 세상만 남은 그곳에서 <오키쿠와 세계>는 절망보다 희망을 택한다. 가진 것 없는 청년들이 사랑을 하고, 역경 속에 희망의 가능성을 찾는다. 서서히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19세기 후반 일본 사회를 청춘들은 계급과 직업의 귀천을 뛰어넘어 뚜벅뚜벅 걸어들어간다.

휴머니즘과 더불어 '순환'은 영화를 관통하는 또 다른 키워드다. 사카모토 준지 감독은 이차원적 비유나 지루한 설교 없이 자연스럽게 환경문제로 관객의 시선을 이끈다. "돌고 돌아 똥이나 음식이나 똑같"다는 영화 속 대사처럼, 밥을 먹으면 똥을 싸게 되는 법이고 쌓인 똥은 다시 밭으로 돌아가 거름이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거름 장수들은 음식과 분뇨의 순환 과정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다. 인분을 치워야 하는 도시인이나, 인분을 거름으로 사용해야 하는 농민 입장에서나 필수불가결한 이 일은 사실 더없이 귀한 직업이다. 부자이건 가난뱅이건, 귀족이건 농민이건, 뭔가를 먹고 난 뒤 똥을 뱉어내는 것은 결국 매한가지라는 풍자의 메시지도 저변에 깔린다.

작품 제작 과정에서도 감독은 순환에 진심이었다. <오키쿠와 세계>는 자연과 환경에 대한 고민을 영화에 담아내는 걸 목적으로 일본 영화계와 자연과학 연구진이 참여하는 '좋은 날 프로젝트(요이히 프로젝트)'의 첫 작품이다. 미술 세트, 소품, 의상에 이르기까지 극 중에 나오는 것 모두 새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촬영이 진행됐다. 주인공 오키쿠가 살고 있는 공동 주택 세트장은 토에이 교토 스튜디오의 오픈 세트를 재사용하여 만들었고, 포스터에도 등장하는 주인공 세 명이 처음 만나 비를 피하는 건물은 오래된 목재를 사용해 제작했다. 야스케와 츄지가 똥을 운반할 때 사용한 '더러운 배'는 실제 강 유람선으로 사용되던 배의 재료를 재사용해 만들었다. 촬영이 끝난 후 이 배는 쇼와 초기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에서 다시 활용되기도 했다.

서장과 종장 포함 총 9장으로 이뤄진 영화는 각 장의 마지막마다 짧은 컬러 화면을 등장시킨다. 과거 사회의 모습이 지금 우리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단 뉘앙스를 표출하고 싶었던 감독의 의도된 연출이다. 돌고 돌아 인간에게 에너지를 주는 인분처럼 에도 시대의 똥 이야기는 지금 우리에게 돌아와 희망의 거름으로 작동한다.

인분의 순환은 자연스레 자연의 순환과 겹쳐진다. 사랑, 우정, 호혜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영화는 계급, 빈곤, 차별과 같은 부조리를 끄집어내 그것을 딛고 선다. 부조리를 딛고 선 곳 위로 ‘환경’이라는 표지가 펄럭인다. 감독은 자신이 속한 세계에 애착하고, 세상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지금 우리 환경은 급변하고 있다. 사카모토 감독은 순환이 예술과 영화의 전제 조건임을 전력을 다해 말한다. 우리에게 ‘환경’이 없으면 사랑의 감정으로 충만한 오키쿠도, 영화를 보는 관객이라는 존재도 도리 없이 사라질 것이라는 당연한 진리가 다시금 발견되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