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카모토 준지 감독의 30번째 장편 영화 <오키쿠와 세계>가 2월 21일 개봉한다. <오키쿠와 세계>는 19세기 에도 시대, 몰락한 사무라이 가문의 외동딸 오키쿠와 인분을 사고파는 분뇨 수거 업자 야스케와 츄지 세 남녀의 사랑과 청춘을 경쾌하게 담은 시대극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영화 전문지 「키네마 준보」의 2023년 일본 영화 베스트 순위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을 제치고 1위에 뽑혀 화제에 올랐다. 뿐만 아니라 2위에 오른 빔 벤더스 감독의 <퍼펙트 데이즈>와 9위를 기록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등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당당히 1위를 거머쥐었다.
사카모토 준지 감독은 사무라이가 남아 있던 에도 시대를 그리며 하층민과 소시민들의 삶에 주목했다. 그가 사무라이가 아닌 하층민의 삶에 주목한 이유는 그들의 삶이 여전히 현대와 공명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팬데믹을 거치며 무척 힘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최하층의 사람들이 차별받으면서도 지지 않고 살아가는 그런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19세기 에도 시대, 기나긴 사무라이의 시대가 저물고 혼란스러운 시기. 야스케(이케마츠 소스케)는 도시에서 인분을 수거하여 시골의 농부들에게 비료로 팔며 돈을 번다. 폐지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츄지(칸이치로)는 야스케로부터 분뇨 수거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후 그와 함께 일하기로 한다. 몰락한 사무라이 가문의 외동딸 오키쿠(쿠로키 하루)는 절에 딸린 교습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해직된 사무라이 아버지 겐베이(사토 코이치)와 단둘이 산다. 어느 날, 아버지를 향한 복수의 결투에 따라나선 오키쿠는 아버지를 잃고, 간신히 목숨은 건지지만 그녀 또한 목에 상처를 입고 목소리를 잃는다.
순환형 사회 속 사랑과 희망을 이야기하다

영화는 흐르는 강물의 이미지를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낯선 것이 우리의 눈앞에 들어온다. 똥통에 가득 들어 찬 분뇨가. 분뇨 수거 업자 야스케는 가득 차 있는 인분을 퍼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사내는 갓 나온 음식을 야금야금 맛있게도 씹어먹는다. 동자승은 변소의 인분을 판 값으로 야스케에게서 오십 푼을 건네받는다. <오키쿠와 세계>의 첫 시퀀스는 인분마저 사고팔았던 에도 시대의 순환 경제 사회를 함축해서 보여준다. <오키쿠와 세계>는 야스케의 말대로 “돌고 돌아 똥이나 음식이나 똑같아 어차피 배에 들어가면 곤죽이” 된다는 불편한 진실을 애써 꺼내어 보여준다. 사카모토 준지 감독은 분뇨 수거 업자, 순환형 사회라는 낯선 소재를 스크린에 가져오면서 자연의 섭리를 일깨운다. 영화의 처음에 흐르는 강물의 이미지가 등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국 우리가 사는 생태계는 강물처럼 돌고 돈다는 것을.

<오키쿠와 세계>는 100년 후의 지구에 남기고 싶은 좋은 날들을 영화로 전하는 ‘좋은 날 프로젝트’에서 시작됐다. 프로듀서 하라다 미츠오가 사카모토 준지 감독에게 제안한 것으로 그에게는 세계의 지속 가능성, 순환 경제에 관한 영화를 부탁했다. 그러나 사회정치적인 올바름을 영화 주제의 전면에 내놓는 작법을 선호하지 않는 그는 관객들을 계몽시키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문제의식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 이야기를 더욱 정교하게 설계했다. <오키쿠와 세계>는 총 9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이 바뀔 때마다 계절도 바뀐다. 늦여름에서 가을로, 늦가을에서 겨울로 흘러간다. 이렇게 구성한 이유에 대해 감독은 “애초 장편 시대극을 기획했으나 투자 유치에 실패했다. 그래서 우선 프로듀서의 자비로 단편부터 만들었다. 또 투자를 받지 못해서 15분 분량의 단편 영화를 다시 찍었고, 그 후에야 투자를 받으면서 여러 단편을 묶는 지금의 형식을 취하게 됐다”고 밝혔다. 결국 거듭된 불행으로 이루어진 분절된 구성은 오히려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시대극에 경쾌한 리듬을 부여하고, 계절감을 살려내면서 자연의 순환이라는 영화의 주제를 더욱 공고히 한다.
모노노아와레를 담은 고전적인 이미지와
현대 청춘 로맨스 영화의 플롯

<오키쿠와 세계>에서 보이는 자연물 이미지와 소시민의 소박한 생활상은 애상적인 정조를 자아내며 마음을 동하게 한다. 밭길을 따라가며 밭에 조금씩 거름을 주고, 마루에 앉아 수확한 곡식에서 모난 것을 골라내는 농부의 모습은 절로 농촌의 흥취를 불러온다. 또 흐르는 강물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바닥에 고이는 빗물처럼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자연물의 이미지는 일본의 미학적 감수성 모노노아와레를 불러일으킨다. 오키쿠는 우물에서 갓 떠올린 물로 세수를 하다가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문득 계절이 바뀌었음을 깨닫고 애잔한 정서에 젖는다.

영화 속 계절의 변화는 오키쿠와 츄지의 로맨스 플롯과도 맞물려 있다. 1장에서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다 세찬 빗줄기로 바뀐 늦여름 비는 오키쿠와 츄지의 우연한 만남을 알린다. 겨울철 조금씩 내리다 이내 소복이 쌓인 눈은 오키쿠를 향한 츄지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을 담고 있다. <오키쿠와 세계>는 미적 감수성을 느끼게 하는 고전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현대 청춘 로맨스 영화의 플롯을 취하며 신선한 감각을 느끼게 한다. <오키쿠와 세계>는 그 시대의 전통적 가치를 설파하지 않는다. 서글프고 힘든 삶을 그럼에도 열심히 살아내는 청춘의 삶을 그려낸다.
자네, ‘세계’라는 말을 아나?

<오키쿠와 세계>에는 ‘세계’라는 말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오키쿠의 아버지 겐베이는 읽고 쓰지 못하는 츄지에게 세계를 알려준다. “자네 세계란 단어 아나? 이 하늘의 끝이 어디인지 아나? 끝 같은 건 없어. 그게 세계지. 요새 나라가 어수선한 건 이제 와서 그걸 알아서야.” 에도 시대는 대내적으로는 급격한 경제 발전으로 번영을 누린 시대였지만, 대외적으로는 외국과의 거래를 금지하는 쇄국 정책으로 인해 외부와 단절된 폐쇄된 사회였다. 겐베이의 대사는 사무라이의 시대가 저물면서 도래한 혼돈의 시기에 불의를 일삼는 당시 지배층에 대한 비판이다. 사카모토 준지 감독은 이런 사회 비판을 영화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세계의 의미를 다시금 되살리며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교습소에서 승려가 아이들에게 일러준 말처럼. “세계는 저쪽으로 가다 보면 이쪽으로 돌아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