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1일 오전 8시(한국 기준), 별들의 전쟁이 시작된다. 2024년 96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기 때문이다. 2023년을 뜨겁게 달군 작품들과 영화인들이 영예로운 수상을 꿈꾸고 있을 터. 특히 작품마다의 고생담을 듣노라면 어떤 작품, 배우가 상을 타더라도 축하할 수밖에 없을 지경이다. 올해 아카데미 후보작 중 특히 고생이 많았던 것으로 유명한 영화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모았다.
<바비>

2023년 최고 흥행작 <바비>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많다. 영화 제작 과정이 길었거니와 프로덕션도 무척 특이했기 때문. 전 세계 핑크 페인트를 가져다 썼다는 건 약과다. 여기서는 배우 관련 비하인드만 살짝 설명하겠다. 그레타 거윅은 '바비'와 '켄'의 격차가 분명히 존재하는 바비랜드의 분위기를 형성하기 위해 바비끼리, 켄끼리 유대감을 가지도록 준비했다. 한 번은 바비 배우들 전원을 런던의 호텔에 초대해 파자마 파티와 단체 영화 관람을 진행했는데, 켄 배우는 참석은 할 수 있어도 숙박은 할 수 없었다. 또 켄 배우들에겐 매일 아침 같은 체육관에서 함께 트레이닝을 받도록 지시했다고. 물론 바비 배우들도 함께 트레이닝을 받았는데, 나중엔 마고 로비가 플랭크 대결에서 라이언 고슬링을 이겼다고 한다. 라이언 고슬링은 3분 2초에서 포기했는데, 마고 로비는 4분 10초를 버텼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의 연출과 주연을 겸한 브래들리 쿠퍼는 영화를 준비하며 몇 년의 시간을 보냈다. 레너드 번스타인처럼 보이기 위해 코 분장을 감수한 건 기본이고, 그의 지휘 장면까지 연기하기 위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 음악감독이자 지휘자 야니크 네제세갱(Yannick Nézet-Séguin)에게 사사했다. 브래들리 쿠퍼가 특히 고생한 장면은 1976년 엘리 대성당에서의 지휘 장면. 이 장면은 영화에서 6분 21초간 롱테이크로 담겼는데, 번스타인의 지휘를 재현하고자 브래들리 쿠퍼는 6년이나 공부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영화를 본 클래식 전문가들도 브래들리 쿠퍼가 번스타인 특유의 춤추는 듯한 지휘를 고스란히 재현한 것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펠리시아 번스타인을 연기한 캐리 멀리건은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의 재촬영을 위해 <핑거네일스>에서 하차해야 했다(이후 제시 버클리가 투입됐다).

<오펜하이머>

하마터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부름에 응답(?)하지 못할 뻔한 배우가 있다. <오펜하이머>에서 레슬리 그로브스를 연기한 맷 데이먼은 아내와 약속을 하나 했다. 잠시 연기와 거리를 두고 긴 휴가를 보내기로. 맷 데이먼은 그 약속에 조건을 딱 하나 내걸었는데 "크리스토퍼 놀란에게 연락 오면 바로 복귀한다"였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오펜하이머> 캐스팅건으로 크리스토퍼 놀란측에서 연락을 받았고, 맷 데이먼은 미리 조건을 걸었던 덕분에 <오펜하이머>에 합류할 수 있었다. 훌륭한 감독과 일하는 것도 무척 기쁘겠지만, 그래도 휴가 끊고 복귀한 맷 데이먼의 선택이 대단하다.
<바튼 아카데미>

<바튼 아카데미>의 폴(폴 지아마티가 연기한 폴 허넘)을 보면서 '폴 지아마티가 이런 인상이었나' 싶었을 수 있다. 극중 '왕눈깔'이란 별명을 가진 폴은 사시처럼 보이는데(한쪽 눈이 의안이다), 이는 렌즈를 껴서 구현한 것이다. 폴 지아마티는 왼쪽 눈에 렌즈를 꼈는데, 이게 말이 렌즈지 눈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 특수렌즈여서 지아마티는 분장팀에게 렌즈 탈부착을 부탁했다고. 폴 지아마티는 운전이나 주차 장면을 촬영할 때 렌즈 때문에 한쪽 눈이 안 보여 특히 힘들었다고 밝혔다.

이 작품으로 고생한 건 메리 램 역의 더바인 조이 랜돌프도 마찬가지다. 극중 메리는 흡연 장면이 정말 많은 애연가 캐릭터인데, 랜돌프는 비흡연자였던 것. 처음에는 연기만 나는 금연초를 피우는 것으로 대신할 예정이었으나 랜돌프 본인이 보기에도 금연초가 진짜 담배처럼 보이지 않았다. 결국 진짜 담배를 피우면서 촬영을 진행했고, 대신 조금이라도 담배를 쉽게 끊을 수 있도록 가장 취향에 안 맞는 담배 '아메리칸 스피릿'(American Spirit)를 피웠다고 한다. 아메리칸 스피릿 담배는 향을 첨가하지 않아 굉장히 냄새가 독하다고.

반면 앵거스 털리를 연기한 도미닉 세사의 일화는 고생담보다는 귀여운 해프닝이다. 이 작품으로 스크린에 데뷔한 도미닉 세사는 훌륭한 연기를 펼쳤는데, 제작진이 생각하지 못한 건 그의 나이였다. 앵거스가 집으로 전화를 거는 장면을 찍을 때, 1970년대 배경의 영화라서 전화기가 다이얼식 전화기였는데 이제 갓 20대가 된 꼬꼬마 도미닉 세사는 그런 전화기를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었던 것. 촬영 당일까지도 세사도, 제작진도 이걸 의식하지 못해서 촬영 전에 부랴부랴 가르쳐줬다고.

<나이애드의 다섯 번째 파도>

고령에도 장거리 수영에 성공한 다이애나 나이애드 역을 맡은 아네트 베닝은 극중 수영과 연기를 병행하는 장면들 을 소화하고자 훈련을 받았다. 수영 코치로 활동 중인 전 수영선수 라다 오웬(Rada Owen)과 1년 동안 트레이닝했다고. 그렇게 훈련한 덕분에 그는 실감 나는 연기를 펼치며 이번 여우주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촬영 기간 중 실제 모델인 나이애드와 코치 보니 스톨이 촬영장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아네트 베닝과 나이애드는 스태프들의 응원을 받으며 함께 수영을 했단다.

<가여운 것들>


이번 여우주연상의 가장 유력한 후보, 엠마 스톤은 벨라 벡스터 역으로 영화 내내 호연을 펼쳤다. 이렇게 어려운 연기에 생각 못 한 고생담이 있는데 바로 붙임머리. 벨라의 머리가 계속 자란다는 설정을 보여주고자 엠마 스톤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붙임머리를 써야 했는데, 영화 말미에는 4피트(약 1.2m)의 붙임머리를 달았단다.
윌렘 대포는 천재적인 지능을 가졌지만 평범하지 않은 모습의 갓윈 벡스터를 연기하느라 분장을 받아야만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분장 받는 데 4시간, 분장을 지우는 데 2시간이 걸려서 새벽 3시에 와서 대기하는 날도 있었단다. 맥스 역의 라미 요제프는 나름대로 고충이 있었는데, 의학생인 맥스가 해부를 하는 장면이 있었기 때문. 그래서 요제프는 장의사에게 수업을 듣고, 19세기 의학도구를 활용하는 수업들을 들으며 맥스 역을 준비했다. 영화에서 맥스가 해부를 하는 장면은 딱 하나뿐이지만, 요제프는 그것에 익숙해지기 위해 여러 차례 그런 것들을 봤다고 밝혔다.

<추락의 해부>

남편의 사망에 살인사건 용의자로 지목되는 산드라 역은 산드라 휠러가 맡았다. 산드라를 연기하기 위해 산드라 휠러는 프랑스어를 배웠다. 독일 배우 산드라 휠러는 훌륭한 배우지만 단기간에 배운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할 수 없었는데, 극중 산드라도 '독일 출신인데 프랑스에 살게 된' 설정이어서 산드라 휠러의 프랑스어 실력으로도 연기가 가능했다. 캐릭터와 배우가 이렇게 찰떡처럼 겹친 이유는 쥐스틴 트리에 감독이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산드라 휠러를 산드라로 점찍어두고 써 내려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문단을 읽은 분들에게 게슈탈트 붕괴 현상이 왔으리라 생각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국내에서 아직 공개한 바 없다. 아우슈비츠 사령관 부부의 '평화로운 일상'을 그린 이 영화에선 무엇보다 현실적인 연기가 중요했는데, 이를 위해 독특한 촬영법을 선택했다. 일반적으로 카메라 1~2대를 사용하는 현장과 달리 5대~10대의 카메라를 사용했다. 스태프들은 카메라를 비롯해 촬영 세팅을 마친 후 철수했다. 그렇게 텅 빈 공간을 배우들은 자유롭게 활용하면서 일상 연기를 펼쳤다. 이러다보니 모든 촬영이 끝났을 때 전체 촬영 분량은 800시간 정도 됐다고. 음향기사가 밝힌 것에 따르면 마이크도 30대가량 사용했다고 한다.
<플라워 킬링 문>

후보에 올라서 세워진 기록이긴 하나, 마틴 스코세이지는 <플라워 킬링 문>으로 감독상 후보가 되면서 '역대 최고령 감독상 후보자'로 이름을 새겼다. 그동안 아카데미가 마틴 스코세이지를 홀대해서 큰 기대를 걸긴 어렵지만… 최고령 후보자 말고 최고령 수상자 타이틀을 줘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