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넷 커뮤니티를 두루두루 둘러보는 걸 즐기는 필자는 요즘 이 영화 언급이 급격히 많아진 것을 느꼈다. 1999년 한국영화 <쉬리>다. <쉬리>야 한국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정표와 같지만 나온지 25년이 넘은 지금, 갑자기 여기저기서 재소환되고 있는 모습은 꽤 진풍경이다. 영화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왜 갑자기 다들 <쉬리> 타령인지, 그리고 <쉬리>가 뭔지 도통 모르는 이들을 위해(이제는 이쪽이 더 많을지도!) <쉬리>를 간단하게 짚어본다.

국가정보원의 요원 유중원(한석규)은 무기밀매상 임봉주의 암살에 북한 특수요원 이방희가 다시 나타났다고 판단한다. 이방희의 흔적을 쫓을 새 없이 이번엔 북한 특수요원 교관 박무영(최민식)이 부하들과 남한에 침투해 CTX라는 무기를 탈취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점점 위험한 상황이 닥쳐오자 중원은 약혼자 이명현(김윤진)을 대피시키고 박무영과 북한 특수부대를 추적한다.
최민식의 YOUNG한 모습

<쉬리>가 갑작스럽게 재소환된 이유 중 가장 큰 건 <파묘>의 성공이다. 첩보 액션 스릴러 <쉬리>와 오컬트 공포 <파묘>가 무슨 상관인가 싶겠지만, 최민식이라는 연결고리가 있기 때문. 최민식은 <파묘>에서 풍수사 김상덕 역으로 출연해 (늘 그랬듯) 열연을 펼쳤다. 무엇보다 그는 <파묘> 관련한 활동에서 그전과는 다른 모습들을 보이며 대중, 특히 젊은 관객에게 '반전 매력'을 보여줬다.
최민식은 그동안 '명배우'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본인의 성취와는 별개로 다소 근엄하고 무거운 이미지에 가까웠다. 근래 연기한 캐릭터를 살펴봐도 이순신(<명량>), 장영실(<천문: 하늘에 묻는다>), 장경쳘(<악마를 보았다>) 등 특유의 묵직한 존재감이 돋보이는 것이 많다. 그나마 서민적이거나 친숙한 캐릭터를 찾아도 최익현(<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차무식(<카지노>)처럼 가까이하기엔 먼 인물들에 가깝다.

그런 최민식이 이번에 이미지 반전을 이룬 건 '인간 최민식'이 가진 매력 덕분이다. 예능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나온 최민식은 조세호의 결혼 소식에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야” 같은 농담으로 너스레를 떨며 스크린 너머의 최민식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파묘> 무대인사 행사를 돌 때에도 팬들이 주는 머리띠를 거침없이 착용하고 팬 서비스를 하는 모습은 '민식바오' '큐티민식' 등의 별명을 양산했다.

이처럼 대중과 한결 가까워진 최민식에게 특히 젊은 관객들의 관심이 집중됐는데 그중 일부 관객들이 그의 출연작을 다시 돌아보는 과정에서 <쉬리>가 언급되기 시작한 것. 25년 전 영화에서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최민식의 연기력에 감탄하며 자체영업에 나선 셈이다. 그중 박무영이 한국 군인으로 위장해 CTX를 탈취하는 장면은 영상플랫폼에서 1천만뷰를 넘어서기도.

바다 건너에서 온 샤라웃
반면 <쉬리> 재소환이 꼭 최민식 때문만은 아니다. 최근 개봉한 어떤 애니메이션 때문이기도 하다. 3월 20일 개봉한 <극장판 스파이 패밀리 코드: 화이트>는 만화 「스파이 패밀리」와 애니메이션 <스파이 패밀리>의 극장판이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에서 묘사되지 않은 오리지널 스토리를 선보인 이 애니메이션이 개봉하며 갑자기 <쉬리>가 언급되기 시작했다. 원작자 엔도 타츠야가 <쉬리>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적이 있기 때문.

「스파이 패밀리」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적대국가를 배경으로 위장 가족생활을 하는 스파이와 암살자, 그리고 초능력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렇게 보면 삭막한 첩보스릴러 같지만, 전체적으로 가볍고 유쾌한 톤으로 다양한 연령층의 사랑을 받고 있는 「스파이 패밀리」는 다양한 요소를 연상시킨다. 위험인물이 서로의 신분을 모른 채 생활하는 설정은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를, 서로를 '동쪽나라' '서쪽나라'라고 부르며 적대하는 관계는 냉전 시절 독일을, 작중 최고의 스파이 '황혼' 로이드 포저의 활약은 「괴도 루팡」이나 <미션 임파서블> 같은 신출귀몰한 인물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정작 원작자 엔도 타츠야는 최근 인터뷰에서 첩보물을 많이 보지 않았으며 심지어 <007> 시리즈도 두 편 정도만 봤다고 밝혔다. 첩보 관련 정보는 다큐멘터리나 서적을 참고했다고 말하며, '옛날 영화' <쉬리>를 좋아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북한 특수공작부대와 한국 정보기관의 싸움'이라고 <쉬리>의 내용을 간단명료하게 요약했다. 그냥 립서비스 아니겠냐는 반응도 있지만 일본 매체의 인터뷰에서 언급했고, <쉬리>가 일본에서 관객수 100만 명을 돌파한 흥행작이기도 해서 아부성 멘트라고만 보긴 어렵다.

작가가 언급한 것도 다소 의아하긴 하다. 작품 전체 분위기부터 코미디와 스릴러로 확 갈리는데다 설정이나 전개도 확연히 차이가 있어 「스파이 패밀리」와 <쉬리>는 거리가 있는 편이기 때문. 추측하자면, 엔도 타츠야는 <쉬리>의 '환경 때문에 끝내 이뤄지지 못한 사랑'을 안타깝게 여겼던 건 아닐까. 그래서 그런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나름대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스파이 패밀리」에서 그려보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트로이카, 블록버스터의 탄생
어느새 <쉬리>가 25주년을 맞이한다니, 믿기지 않는다. <쉬리>의 등장은 한국영화계의 새로운 국면이었다. <쉬리>의 등장은 상업영화 부흥의 물꼬를 텄다. 제작 단계에서부터 적극적인 PPL를 반영하고, 관련 산업과 연계해 부가 효과 창출도 신경 썼다. 결과적으로 전국 650만 명 동원(당시 집계 시스템이 정확하지 않아 이 이상일 수 있다)하며 흥행에 성공, 코미디나 에로, 로맨스, 애국주의적 영화, 예술영화 등 한국영화계의 전형적인 영화 제작을 탈피하는 단초를 마련했다. 요컨대 블록버스터란 단어가 <죠스>의 흥행에서 비롯됐듯, <쉬리>가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효시인 것이다.



배우들의 궤적에서도 <쉬리>는 빠질 수 없다. <은행나무 침대>, <초록물고기>, <넘버 3>, <8월의 크리스마스> 등 90년대 충무로의 버팀목 한석규는 <쉬리>에서 90년대 최고 스타임을 입증했다. 동시에 설경구와 함께 2000년대 충무로 남배우 트로이카로 명명되는 최민식과 송강호는 이 영화에서의 존재감이 그 발판이 됐다. 세 배우에 비하면 신인에 가까웠으나 캐릭터의 다양한 모습을 완벽하게 소화한 김윤진은 첫 주연 영화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충분했다.

현재 가장 안타까운 점은 이 기념비적인 영화를 비디오나 DVD를 직접 구매하는 것 외에 볼 수 있는 방법이 드물다는 것. <쉬리>의 판권은 한동안 그 행방이 묘연했다. 그래도 2023년 말에 강제규 감독이 직접 판권 문제가 해결됐다고 밝힌 바, 25주년을 맞이한 올해 재개봉을 기다려봐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