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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씬드로잉] 원숭이는 인간을 보고 피 터지게 웃지! 〈몽키맨〉

성찬얼기자
〈몽키맨〉
〈몽키맨〉

<몽키맨>(2024)은 우연히 보게 된 영화다. 아무 정보도 없었다. 각본과 감독, 주연까지 맡은 데브 파텔이란 배우도 처음 알았다. 우선, 가장 인상적인 장면부터 말하겠다. 주인공 키드(‘바비’라고도 불리는데, 본명은 안 드러난다. 내가 놓친 건가?)가 경찰에게 쫓기다가 한 트렌스젠더 집단에 의해 구출된다.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으로 보이지만, 알고 보니 그렇지만도 않다. 여자도 남자도 아니고, 남자 아닌 여자도, 여자 아닌 남자도 아닌, 그저 ‘다른 성(性)’을 지향하는 수도자들 같다.


왜 원숭이는 얻어터지기만 하지?

 

총에 맞고 칼에 찔려 물속에 빠져 반주검 상태가 된 키드를 그들이 구해낸다. 영화 중반부가 그렇게 전환된다. 수도자들의 모습은 인도 특유의 밀교 집단을 연상케 하는데, 구체적인 건 잘 알 수 없다. 키드의 어머니는 어린 시절 경찰에 의해 무자비하게 살해됐다. 성년이 된 이후, 키드는 복수의 일념에 사로잡혀 있다. 그가 경찰에 쫓기게 된 것도 어머니를 살해했던 경찰 서장을 죽이려다 실패했기 때문이다. 키드는 몸도 마음도 완전히 누더기가 된 상태.

 

〈몽키맨〉
〈몽키맨〉

 

건강을 차츰 회복한 키드는 다시 복수를 꿈꾸며 무술을 연마한다. 샌드백을 치는데 곁에서 수도자가 북을 친다. 오른쪽은 여성, 왼쪽은 남성을 상징하는 더블북이다. 분노에 사로잡혀 샌드백을 패대기치다시피 하던 키드가 문득 정신을 차린다. 북소리 장단에 맞춰 리듬을 타기 시작한다. 리듬이 고조될수록 키드의 영혼도 정리되고, 몸놀림도 탄력이 생긴다. 마음속 불길이 고요히 가라앉으며 고요한 물속처럼 아늑해진다. 분노도, 참혹한 기억도 보다 선명해지며 더 분명한 자신을 깨닫게 된다. 이 영화의 주제가 일부분 녹아 있는 장면이다.

 

전형적인 할리우드 액션물 같으면서도 이소룡 등을 오마주한 중국 무협풍의 복수극, 그리고 인도 전통 신화와 설화가 마구 뒤섞인 영화다. 키드는 원숭이 가면을 쓴 채 ‘몽키맨’이란 별명으로 도박 격투기장에서 상대에게 두들겨 맞는 대가로 푼돈을 벌며 살던 처지였다. 미국식 프로레슬링과 비슷한 설정인데, 아무 호구도 없이 맨주먹으로 치고받는 모습은 그저 막싸움에 가깝다. 매니저 행세를 하는 이는 뒷골목 건달이나 다름없다. ‘몽키맨’의 파이트머니를 떼어먹기 일쑤다.


태양을 따 먹은 신, 지옥을 겪다

〈몽키맨〉
〈몽키맨〉

 

인트로는 한 여인이 아이에게 인도의 전통 설화를 들려주는 장면이다. 하누만(Hanuman)이라는 힌두교의 신 이야기다. 하누만은 원숭이 형상을 한 신이다. 숲속에서 사는 하누만의 눈에 어느 날, 커다란 망고가 보인다. 큰 나무의 꼭대기 보다 훨씬 높은 곳에 매달려 있는 망고다. 하누만이 날아올라 망고를 따 먹는다. 알고 봤더니 그 망고는 태양이었다. 분노한 다른 신들이 하누만을 처벌한다. 하누만은 자신의 능력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설화.

 

평화롭고 신비스러운 풍경이 순식간에 지저분하고 혼란스러운 격투기 링으로 전환되며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몽키맨’은 낡고 후줄근한 원숭이탈을 뒤집어쓴 채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는다. ‘몽키맨’은 이를테면 도박장의 호구다. 강한 상대에게 얻어맞는 역할로 호구지책할 뿐이다. 그런 ‘몽키맨’에겐 자기만의 목적이 있다. 아주 개인적인 원한에서 시작하지만, 결국엔 보다 크고 원대한 세계의 이상과 결부되는 꿈이다. 영화는 그 과정을 ‘몽키맨’의 수난과 고행이라는 과정을 통해 드러낸다. 짐짓, 식상한가. 내가 보기엔, 딱히 그렇지만은 않다.

 

스토리 얼개나 플롯 등은 매우 익숙하고, 전개 또한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요컨대 기존 액션 영화 클리셰가 고지식할 정도로 그대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영화라는 건 보이고 들리는 것들의 조합으로 어떤 특수한 에너지를 발현해 내는가가 관건이다. 그런 점에서 <몽키맨>은 새삼 낯설고 각별하다. 인도를 배경으로 인도 사람들이 대거 등장한다는 점은 작은 각론에 불과하다. 인도어와 영어가 뒤섞여 나오는 배경에 어떤 작의가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전체적으로 뭔가 혼종적이고도 어딘가 무차별적인 이 영화의 특징과 맞춤하다 싶은 정도다.


하늘과 땅 사이, 같으나 다른 사람들

〈몽키맨〉
〈몽키맨〉

 

영화는 호화찬란한 마천루 지대와 땅에 납작 엎드려 있는 듯한 빈민 구역을 수시로 대비한다. 두 공간이 거의 맞붙어있는데, 도시의 지명이 딱히 언급되진 않는다. 뉴델리일 수도, 뭄바이일 수도 있으나, 어째 <배트맨> 시리즈의 고담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몽키맨’이 탈각하여 정의의 수호자처럼 부각되는 전개는 ‘배트맨’의 하위 버전 같은 느낌도 있다. 특정 국가나 도시를 초월해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있을 법한 정치적 부패와 타락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선 그곳이 인도 어디가 아니라 서울이라 해도 크게 틀리진 않을 것 같다.

 

마약과 매춘, 사이비 종교와 선거 비리, 권력자의 횡포와 그 아래 기생하는 자본가들의 악행은 예나 지금이나 만연하다. 수없이 많은 영화들이 그런 ‘거악’을 고발하고 추적했다. 그럼에도 ‘거악’은 세계 어디에서나 진행 중이다. ‘거악’과 싸우다가 자신마저 악의 톱니바퀴로 전락하는 일 따위는 세계가 설계해 놓은 비밀 장치처럼 여겨질 정도다. 현실도, 영화도 그러한 ‘악’을 무시로 반복 재생한다. 참 식상한 일이지만, 손을 놓거나 관심을 떼어놓을 수도 없을 일. <몽키맨>은 그 진부하고도 첨예한 테마를 신화와 설화라는 지렛대로 반등시킨다. 그리고 그게 이 영화의 독특한 힘이자 매력으로 작용한다.

 

인도는 인류 문명의 시원 중 하나인 나라다. 죽음과 삶이라는 인간의 기본적 한계와 조건에 관해 인도만큼 많은 전설과 신화를 가진 나라도 드물다. 서양의 많은 예술가들이 인도에 빠져 인도인의 의식 세계를 탐구하곤 했다. 지금도 어떤 이들은 삶의 극한 지대를 체험 혹은 체현하려 인도를 찾는다. 그게 또 인도의 관광상품처럼 되어버린 지도 오래다. 인도는 인도에 살거나, 인도를 찾는 사람만이 겪을 수 있는 나라가 아닌지도 모른다. 인도의 요기들은 자신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자신의 근원, 나아가 생명과 죽음의 기원까지 들여다보려는 존재들이다. <몽키맨>에서 생명과 우주의 뿌리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온다. ‘몽키맨’이 각성하고, 그리하여 더 큰 힘과 지혜를 얻는 것도 바로 그 뿌리와의 만남을 통해서다.


인도여도, 인도가 아니어도 다 같다

 

〈몽키맨〉 ‘몽키맨’에겐 자기만의 목적이 있다. 아주 개인적인 원한에서 시작하지만, 결국엔 보다 크고 원대한 세계의 이상과 결부되는 꿈이다. 영화는 그 과정을 ‘몽키맨’의 수난과 고행이라는 과정을 통해 드러낸다.
〈몽키맨〉 ‘몽키맨’에겐 자기만의 목적이 있다. 아주 개인적인 원한에서 시작하지만, 결국엔 보다 크고 원대한 세계의 이상과 결부되는 꿈이다. 영화는 그 과정을 ‘몽키맨’의 수난과 고행이라는 과정을 통해 드러낸다.

 

​‘몽키맨’에겐 자기만의 목적이 있다. 아주 개인적인 원한에서 시작하지만, 결국엔 보다 크고 원대한 세계의 이상과 결부되는 꿈이다. 영화는 그 과정을 ‘몽키맨’의 수난과 고행이라는 과정을 통해 드러낸다.

 

요가는 기본적으로 숨쉬기에 대한 성찰이다. 난해하고 복잡한 동작의 근원엔 개인의 호흡이 우주 만물의 기원과 어떻게 연결되어있는지에 대한 성찰이 있다. 그 성찰은 곧 누구나 가지고 있는 내면적, 외면적 깨달음이다. 아픈 곳을 아픔 그대로 바라보고, 스스로가 스스로의 관찰자가 되는 일. 그때, 북소리가 들린다. 개인적 원한에만 사로잡혀 있던 ‘몽키맨’을 더 큰 힘과 인내와 타인 및 세계에 대해 각성하게 만든 그 북소리는 굳이 누가 옆에서 쳐주어야만 들리는 게 아니다. 북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심장 속에 고요히 잠들어 있다. 그걸 발견하고 스스로 리듬을 타는 게 곧 수행이다. <몽키맨>은 그러한 사실을 기존 영화의 오락적 요소와 설정들을 제대로 반죽해 전해준다. 대오각성한 ‘존 윅’이랄까. 최후의 결전에서 검은 정장 차림으로 일대 활극을 펼치는 ‘몽키맨’의 모습은 누구 봐도 존 윅 같을 거다. 이건 풍자인가, 관객을 위한 섬려한 해찰인가.

 

원숭이는 인류의 조상이라 여겨진다. 사람이 원숭이가 된다는 건 퇴화일 수도 있다. 원숭이는 인간에게 주로 놀림의 대상이다. 그러나 그건 인간의 관점이다.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다시 나무로 올라갈 줄 안다. 그것도 나무 아주 높은 곳에 매달린 망고가 손에 닿을 정도까지. 평범한 인간이 나무에서 떨어지면 어찌 되는가. 웃음거리 정도를 넘어 평생 불구가 될 수도 있다. 인간이 원숭이를 조롱할 때, 원숭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저 병신들 왜 저래? 왜 입이 귀까지 찢어지고 그래? 망고 하나 못 따먹는 것들이.’ 뭐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몽키맨’은 인간의 탐욕과 패악에 대못을 박고 사라진다. 인간이 건설한 가장 높은 마천루 꼭대기에서 피차 피투성이가 된 채. 이 문장은 분명 스포일러일지 모르나, 알고 봐도 큰 상관없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