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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황종상 수상 축하! 지브리에 보내는 씨플 기자들의 연서

씨네플레이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사 스튜디오 지브리가 제77회 칸영화제에서 명예황금종려상을 받을 예정이다. 명예황금종려상은 영화계에 족적을 남긴 영화인들에게 수여하는 공로상인데, 올해는 스튜디오 지브리와 조지 루카스, 메릴 스트립이 수상한다. 스튜디오 지브리는 칸영화제 사상 최초 명예황금종려상을 받는 단체로 이름을 남기게 됐다. 1985년 설립 이후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은 지브리의 수상 소식을 축하하며, 씨네플레이 기자들의 최애 픽을 선정했다. 아래 목록은 국내 개봉명의 가나다순으로 정렬했다.

 


성찬얼 기자

모노노케 히메

1997|미야자키 하야오

 

 

이상한 말이지만 내가 <모모노케 히메>를 지브리의 최고작으로 뽑는 이유는 가장 '안 지브리스러운' 영화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브리 하면 공통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순수함, 순박함, 동심, 따뜻함 등등. <모노노케 히메>는 다르다. 인간은 서로를 해하다 못해 자연을 몰아내고 신의 목까지 겨눈다. 신성을 훼손하는 불경한 얘기인데, 거기에 고결함이 깃든 것이 <모노노케 히메>의 특징이다. 이야기를 이끄는 세 인물(아시타카, 산, 에보시)이 자신이 나아갈 길로 올곧게 걸어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신성의 이야기이며 동시에 인간성의 이야기가 된다. 신성은 귀하고 인간성은 천하다는 이분법적 사고 대신 언젠가 신성을 대체하게 될 인간성을 어떻게 획득할 것인가가 이 영화를 관통한다. 이 영화는 모험이라기보다 서사시이고, 동화라기보다 신화에 가깝다. 형이상학적 관념에 늘 흥미를 느끼는 필자에게 <모노노케 히메>의 장대함은 지브리 작품뿐만 아니라 어느 영화에서도 쉽게 접할 수 없는 고양감을 준다.

허풍선이 같은 말을 빼더라도, <모노노케 히메>는 카리스마 넘치는 극중 인물들을 보는 재미가 있다. 각자에게 알맞은 역할을 부여하고 삶의 원동력을 주는 에보시는 인간이 꿈꿀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지도자상이지만 결국 우를 범한다. 그것을 봉합하는 아시타카는 죽음을 마주하고도 스스로 옳다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가장 위대한 인간상을 제시하며 인간의 심지를 대변한다. 인간의 적처럼 그려지지만 실은 그 어떤 인간보다 자연과 신성, 생명의 본질에 가까운 산 또한 우리를 비춰볼 하나의 거울이다.

특히 <모노노케 히메>는 지금 이 시기에 가장 필요한 미덕을 전한다. "살아. 너는 아름다워." 증오와 혐오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요즘이다. 산다는 것이 비루해지고 한심한 것이라고 느끼기 참 쉬운 시대이다. 그래도 살아라. 사는 것만한 것이 없으니까. 내가, 우리가 곁에서 있겠다, 계속 말해주겠다. 살아라, 그대는 아름다우니까.

 


김지연 기자

반딧불이의 묘

1988|타카하타 이사오

 

어린 시절 가장 큰 두려웠던 건 다름 아닌 비행기 소리였다. 마침 북에서 틈만 나면 핵 실험을 한다고 경고하던 때, 그때는 그게 숱하게 반복되는 건 줄도 모르고, 비행기 소리가 나면 곧바로 내가 있는 곳에 핵폭탄이 투하될까 봐 벌벌 떨었다. 아마 그때 비행기 소리와 폭탄이 가장 두려웠던 이유에는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 본 <반딧불이의 묘>가 큰 지분을 차지했던 듯하다. 지금 다시 보건대, 당시 어린아이가 보기에는 꽤나 충격적인 영화였을 터였다. 여타 지브리 영화들에서 보던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세계와는 사뭇 다른 영화 속 세상이 낯선 것은 물론. 까맣게 타 버린 시체들이 널브러진 거리와 피 칠갑 되어 운반되는 시신들, 어린 남매의 눈앞에서 타들어가는 어머니의 시체까지.

타카하타 이사오의 <반딧불이의 묘>는 전쟁의 비극을 미시적 차원에서 조명한다. 다만, 당연하게도 일본 군국주의의 제1희생양인 우리나라에서는 논란이 클 수밖에 없는 영화였지만,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던 개인에게 전쟁이 미치는 영향은 시대를 떠나, 국가를 떠나 동일하기에 여전히 관람할 가치가 충분하다. <반딧불이의 묘> 속 비극은 조용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또 서정적이어서 더욱 파괴적으로 묘사되는데, 이를테면 반딧불이와 파리 떼가 꼬인 시신들, 그리고 그것들을 바라보는 순진한 아이의 모습을 병치하는 식이다. <반딧불이의 묘> 속 사탕 한 알로 어린 동생을 달래고자 하던 오빠의 모습이 기억에 깊게 남아 있는 이유다.

 


주성철 편집장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2001|미야자키 하야오

 

 

어쩌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2)은 미야자키 하야오를 보다 세계적이고 대중적인 거장의 이미지로 각인시킨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2002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애니메이션으로는 최초로 황금곰상을 수상하고, 2003년 아카데미시상식에서는 일본 애니메이션 최초로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했다. 온갖 일들이 일어나는 작품 속 온천장이 지브리 스튜디오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으며, 유바바와 제니바라는 쌍둥이에 자신의 양면적인 마음을 담아냈다고 밝힌 것처럼, 콘도 요시후미가 세상을 떠나면서 직접 연출을 맡게 된 미야자키 하야오로서는 당시 환갑을 맞이한 자신의 많은 것들이 녹아든 작품이다. 단지 초유의 흥행작이라는 사실 이전에 지브리 스튜디오의 전과 후를 나눌 수 있는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된 작품이라고나 할까. 엄청난 악취를 풍기는 오물신과 얼굴이 없는 결핍의 캐릭터 가오나시, 그리고 탐욕에 의해 돼지로 변한 부모 등 변함없는 그의 탁월한 상상력도 엿볼 수 있다. 거기에다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 전형적인 것과 파격적인 것, 늘 해오던 것과 새로이 시도한 것 등이 공존하며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에게 20년 만에 다시 한번 아카데미시상식 장편애니메이션상을 안겨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2023)라는 질문을 일찌감치 던진 셈이다.

 

 

 


이진주 기자

천공의 성 라퓨타

1986|미야자키 하야오

 

 

명작은 시대를 타지 않는다고 했던가. 1986년 개봉한 <천공의 성 라퓨타>는 38년이 지난 지금도 촌스럽지 않다. 이는 작품의 메시지가 지닌 동시대적 특성 덕이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누적된 필연적 담론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천공의 성 라퓨타>는 단연코 ‘어른을 위한 동화’이다.

필자가 이 작품을 처음 접한 학창 시절만 해도 <천공의 성 라퓨타>는 그저 ‘소년과 소녀의 생존기’였다. 당시엔 자고로 애니메이션이란 <인크레더블>(2004)과 같이 가볍고 톡톡 튀는 재미를 주거나 <니모를 찾아서>(2003)와 같이 과장된 감동을 즐기는 장르라 생각했다. 그에 비해 정제된 작화에 철학적 이야기가 더해진 <천공의 성 라퓨타>는 그 맛을 느끼기 어려웠다.

그러나 세월을 쉬이 보내지만은 않은 어른이 된 지금 다시 본 <천공의 성 라퓨타>는 ‘인간과 자연’, ‘현실과 꿈’, ‘이기와 연대’ 등 이분법적 가치관을 뛰어넘은 질문을 던진다. 영화는 지독하게 반복될 이 문제를 라퓨타와 이를 향해 달려가는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전달한다. 스튜디오 지브리는 이 124분의 공식적인 첫 작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와 나아갈 방향을 모두 담아낸다.

 


추아영 기자

하울의 움직이는 성

2004|미야자키 하야오

 

 

미야자키 하야오는 영화 <붉은 돼지>, <마녀 배달부 키키>, <바람이 분다> 등과 같이 종종 유럽의 풍경을 묘사해 왔다. 그는 일본인으로서의 뿌리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으면서도 유럽의 문물을 동경해 왔다고 고백한 바 있다. 유럽을 배경으로 한 그의 영화 중에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단연코 가장 유럽적이고 환상적인 작화를 펼쳐 보인다. 특히 히사이시 조의 음악 ‘인생의 회전목마’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소피와 하울이 색색이 화려한 유럽식 가옥 위를 누비며 하늘을 함께 걷는 공중 산책 장면은 한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많은 영화들이 그렇듯 반전주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하울의 스승이기도 한 왕실 마법사 설리만은 권력의 실세이자 전쟁을 주도하는 인물이다. 전쟁을 원치 않는 하울은 그녀의 권력이 미치지 않는 황무지로 피해 방랑한다. 황야의 마녀가 건 저주에 의해 노파가 된 소녀 소피는 저주를 풀기 위해 하울을 찾아간다. 그들은 함께하며 서로의 마음을 치유하고 성장해 나간다. 소피와 하울은 왕궁의 마법사에 맞서고 끝내 전쟁을 종식시키는 지극히 하야오스러운 결말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