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쇼펜하우어와 니체, 불안과 성장, 타협과 고집… 약 삼십여분가량 이주승과 나눈 짧은 대화에서 나온 키워드이다. 그는 삶과 인간, 영화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그만의 복합적인 관점을 담은 생각을 전했다. <달콤한 인생>(2005), <올드보이>(2003), <굿 윌 헌팅>(1997) 등을 보며 영화의 꿈을 키웠다는 이주승이 16년에 걸쳐 쌓은 내공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오는 6월 12일 개봉하는 영화 <다우렌의 결혼>으로 스크린에 돌아온 배우 이주승을 씨네플레이가 단독으로 만나보았다.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인가? (이주승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무조건은 아닌데 웬만하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는 금방 식어서 맛이 애매해진다. 때문에 많이 마시지 못하게 된다. 스타벅스에 가면 톨 사이즈도 다 못 마실 때가 많다.
MBC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로 큰 인기를 몰고 있다. 특히 천우희, 장동윤 등 절친한 이들과 교류하는 모습을 많은 시청자들이 좋아했다.
‘나 혼자 산다’에 나온 모습은 이사 초반이다. 이사를 하고 한 1년 정도는 친구들이 자주 들락날락했다. 거의 내 집이 아닌 수준이었다. (웃음) 그런데 이제는 외곽에 살아 친구들이 찾아오기 힘든 환경이기도 하고 원래 싸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지만 누군가를 잘 안만나려 한다. 어릴 때는 혼자 있는 것을 잘 못 견뎠다. 외나무다리를 타는 듯 아슬아슬했다. 내면의 단단함이 부족했다. 그런데 혼자 있는 시간을 잘 버텨야 타인을 대할 때도 흔들림 없이 대할 수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을 잘 보내려고 한다.
그는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와 프리드리히 니체의 책을 읽으며 더욱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최근 읽고 있는 책은 사이토 다카시의 「혼자 있는 시간의 힘」이라고.
그럼 혼자 있을 때는 주로 뭘 하나.
책을 읽고 영어 공부를 하고 운동하는 것이 기본적인 루틴이다. 아침 일찍 이걸 해 놓으면 일단 오늘 하루에 성장이 있었다는 생각에 뿌듯하다. 그 이후에 편하게 놀기도 하고 친구를 만나기도 한다. 요즘에는 찬물 샤워까지 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역할과의 관계도 만남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계속 성장해야 여기에 걸맞은 만남을 할 수 있다. 생각이 넓어지고 몸이 건강해져야 또 다른 역할을 맡았을 때 그전과 다르게 접근할 수 있고 관객들이 이전과는 다른 캐릭터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쉬는 시간이 길어지면 성장할 기회를 얻는다고 생각한다. 이게 배우가 되는 과정이라고 본다. 물론 불안하겠지만 그 불안함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나만의 재산이 될 것이라 믿는다.

<다우렌의 결혼>의 임찬익 감독이 ‘나 혼자 산다’에서 구성환과의 케미스트리를 보고 캐스팅했다는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구성환 배우와 합을 맞춘 것은 처음이지 않나.
그렇다. 처음에는 걱정했다. 서로 너무 친하기 때문에 집중력이 떨어지거나 웃음이 터질까 봐. 그런데 평소 우리의 관계성과 작품 속의 인물 간의 관계성이 유사해서 생각보다 편했다.
임찬익 감독이 선견지명이 있나보다. 캐스팅 이후에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두 배우가 더 잘돼서 감독님이 기뻐했을 것 같다.
이제 영화가 잘 됐으면 좋겠다. (웃음)

한 달간 카자흐스탄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알마티에서 촬영했다.
카자흐스탄은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건조한 기후 때문에 땀이 나질 않았다. 아침에 수건을 빨아 널어놓으면 오후에 다 말라 있을 정도였다.
음식도 입에 잘 맞았다. 임찬익 감독님이 고려인 음식에 대한 소개를 많이 하고 싶어 하셨다. <다우렌의 결혼>이 힐링 로드무비인 만큼 음식은 중요한 요소이다. 고려인의 음식이 대체로 한국스럽다. 국시(Кукси)는 프레시한 버전의 한국 냉면의 맛이다. 육수가 아니라 물에다 식초와 설탕 등을 넣고 야채를 썰어 넣어 깔끔하게 맛있다.
*이하 <다우렌의 결혼>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우렌의 결혼>에서 다큐멘터리 조연출 승주 역을 맡았다. 이 배역의 이름은 본인에게서 따온 건가.
맞다. 처음 캐스팅이 되고 대본을 받았을 때는 지금의 스토리가 아니었다. 당시 대본에는 내가 맡은 역할이 고려인이고 카자흐스탄에서 옛 친구들과 영화를 찍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감독님이 카자흐스탄을 다녀오시더니 이야기를 아예 바꾸었다. 내 이름 주승을 뒤집은 승주라는 캐릭터를 놓고 처음부터 다시 쓴 것이다.
<다우렌의 결혼>의 승주는 엉겁결에 고려인의 결혼 장면을 촬영해야 하는 임무를 안고 카자흐스탄으로 향한다. 입봉(특정 분야에서 첫 작품을 대중에게 선보인다는 의미의 방송용 은어)이 간절한 승주는 갈치가 치어에서 성장해 인간에게 닿을 때까지의 일대기를 담은 ‘갈치의 꿈’이라는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꿈이 있다. 하지만 그의 기획은 비웃음을 살 뿐이다. 결국 승주는 자신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퇴사를 감행한다.
승주에게 ‘입봉’은 어떤 의미인가. 일종의 데뷔를 뜻하는 말이다.
‘입봉’은 배우보다는 감독에게 더 큰 의미를 가진다. 다양한 분야의 스태프를 모두 해보고 겨우 한번 얻는 기회이기에 정말 어렵다. 거기에 운과 시기가 맞아야 하는 일이라 일반적으로 남자 감독님들은 입봉을 하려고 하면 순식간에 30대 후반이 되어 있다. 임찬익 감독님도 39세에 데뷔했다고 알고 있다.

본인도 입봉 감독이지 않나. (이주승은 <혈안>(2020), <돛대>(2021)의 연출로 활동했다)
단편 영화를 만들었다. <혈안>은 600만원 정도의 사비를 들이고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완성한 작품이다. 한 작품 이상 연출한 이력이 있어야 영진위(영상진흥위원회) 공모전에 지원을 할 수가 있다. <혈안> 덕분에 두번째 작품 <돛대>를 만들 수 있었다.
<돛대>를 만들기 위해 2차에 걸쳐 면접을 봤다. 당시 코로나 시국이라 화상 회의로 약 스무 명 정도의 심사위원을 만났다. 집에 계신 엄마에게 ‘잠시만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하고 면접에 참여했는데 중간에 줌이 끊기기도 했다. 놀라서 전화했더니 ‘진정하세요’라고 나를 안심시켜 주셨다. 그렇게 합격해서 <돛대>를 만들었다.
당시에도 잘 알려진 배우였다. 오랜시간 활동한 배우가 신인 연출로서 공모전에 지원하고 면접을 보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배우로서의 이미지도 중요하지만 밑천이 드러나봐야 다시 보완하고 성장할 수 있다. 그렇게 계속 쓰러졌다 일어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할 수 있을 때 그냥 하는 것이 좋다. 인생은 성공 아니면 포기밖에 없다고 본다. 포기하는 순간 실패이기에 계속 나아갈 뿐이다.

영화에는 퇴사 이후 승주의 다큐멘터리가 완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승주는 결국 ‘갈치의 꿈’을 찍었을까?
찍긴 찍었을 것이다. ‘더 어려운 길이더라도 신념을 지키며 가겠다’는 마음으로 사표를 던지고 새로운 길로 나섰기에 그렇게 살았을 것 같다. 다만 찍다가 내용을 수정했을 수도 있겠다. 갈치의 성장기를 찍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여건에 맞게 바꾸었을 것 같다.
모든 것은 선택의 문제다. 나 역시 신비로운 역할을 많이 맡으면서 나 자신을 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폭 넓은 연기를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타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할 수 있었다. 만약 계속 고집을 부렸으면 <다우렌의 결혼>도 못 찍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다우렌의 결혼>을 추천하고 싶은가.
인생의 갈림길에 선 사람들이 <다우렌의 결혼>을 보면 좋을 것 같다. 승주는 현실과 꿈 사이에서 많이 고민한다. 때로는 타협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버티기도 한다. 꿈을 향해 달려갈 때 자신의 야망이 어느 정도인지 인지하고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간 영화와 드라마, 연극 무대를 누비며 연기를 했고 감독으로서 두 편의 단편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그중 2021년의 <돛대>는 부산국제단편영화제의 관객상을 받는 기록을 세웠다.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기대되는데 활동 계획은 어떠한가.
3년째 쓰고 있는 시나리오가 있다. 공모전에 떨어지기도 했는데 이 대본에 관심을 가지는 분들이 있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조금씩 진행 중이다. 연극은 일 년에 한 작품씩은 하려고 한다. 이번 연말에 무대에서 관객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공연이나 영화, 드라마 모두 연기의 근본은 같지만 쓰는 근육이 많이 다르다. 각 매체를 다 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그런데 유일하게 포기한 것이 뮤지컬이다. 노래가 안 된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