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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괜찮은데 자꾸 괜찮다는 〈하이재킹〉

이진주기자

 

전 세계적으로 비행기 납치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던 혼란의 1970년대,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1971년 1월, 속초에서 김포로 향하는 비행기가 납북될 위기에 처했다. 승객 55명과 승무원 5명을 태운 KAL F27기에서 폭탄을 든 테러범이 북으로 기수를 돌리라는 요구를 한 것이다.

 

1969년 11월 평창 상공에서 벌어진 하이재킹 사건 이후 2년 만의 일이었다. 당시 승객 47명과 승무원 4명이 탄 KAL YS-11기는 함경남도에 강제 착륙하였다. 납북 66일 만에 전체 51명 중 승객 39명은 귀환되었으나 승무원을 포함한 11명은 북에 억류되었다. (이들은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이 국가적 아픔을 여전히 간직한 채 또 한 번의 하이재킹을 맞은 기장과 부기장, 보안요원 등 5명의 승무원은 기지를 발휘하여 테러범을 사살했고 이륙한지 약 한 시간여 만에 고성군 초도리 바닷가에 불시착하였다. 53년이 지난 지금, 이 사건은 영화 <하이재킹>으로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다. 6월 21일 개봉해 개봉 2일에 30만 관객을 동원한 <하이재킹>을 짚어본다.

 


*이하 <하이재킹>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극 중 태인은 끊임없이 갈등하다 갑작스레 대책을 제시한다. 내적 고뇌의 과정이 생략되며 태인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하이재킹>은 공군 조종사였던 태인(하정우)이 전역 후 민간 항공기 조종사가 되는 과정을 그리면서 시작한다. 촉망받는 공군 태인은 항공 훈련 중 북으로 향하는 여객기를 격추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태인은 해당 여객기에 수많은 민간인이 탑승해 있는 데다 절친한 선배가 조종대를 잡고 있는 것을 확인한 후 딜레마에 빠진다. 결국 태인은 격추 명령을 따르지 않고 비행기는 그대로 휴전선을 넘어가게 된다.

 

영화는 초반부 태인(하정우)의 휴머니즘을 보여주기 위한 일련의 과정을 차곡히 밟는다. 강제 전역을 감당하면서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태인은 비행단장(김종수)의 “알량한 휴머니즘”이라는 비난에도 꼿꼿하다. 민간 항공기 부기장이 된 태인에게 기장 규식(성동일)은 ‘여객기 기장은 승객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며 웃어 보인다.

 

이 같은 태인의 태도는 작품 전체를 관철하는 영화의 시선과 공명한다. 영화 <하이재킹>은 이와 같은 사건에 필연적으로 따라올 정치사회적 논쟁을 철저히 배제한 채 상공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심지어 테러범 용대의 사연을 적절히 담아내며 그를 ‘빌런’이라는 전형적인 캐릭터가 아닌 입체적인 한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한다. 동시에 인물과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과잉 감정을 유발할 여지를 차단한다. <하이재킹>의 연출을 맡은 김성한 감독은 언론시사회에서 “개인적으로 신파를 좋아하지만 담백하게 담아내려고 노력했다”고 전했다. 이로 인해 ‘감동 실화’와 같은 구태의연한 문구로 점철된 한국식 신파에 지친 관객들은 오히려 스스로 1971년으로 기꺼이 발을 들인다.

 

〈하이재킹〉 용대 역의 여진구
〈하이재킹〉 용대 역의 여진구

용대가 기내에서 첫 번째 폭발을 일으키며 영화는 본격적인 힘겨루기에 들어간다. 북으로 가 영웅이 되겠다는 20대 청년의 광기 앞에 부기장 태인과 승무원들은 속수무책이다.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이들이 위기를 헤쳐나가는 방식을 어떻게 담아내는지가 관객이 가장 기대하는 관람포인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하이재킹>은 단조로운 구성을 반복하며 극의 긴장감을 떨어뜨린다. 끊임없이 승무원의 저의를 의심하는 용대는 협박을 멈추지 않고 태인은 그를 설득하며 승객을 안심시킨다. 이는 설득력이 부족한 태인의 캐릭터성에서 기인한다.

 

‘사람 좋은’ 태인은 부기장이라는 특수한 위치를 점하고 있음에도 이를 고려하지 않은 언행으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특히 기장 규식이 폭발의 여파로 눈에 부상을 입어 시야가 확보가 되지 않음에도 계속해서 조종석에서 자리를 뜨며 용대와 직접 상대하고자 한다. 자처해서 용대의 직접적인 위해 대상자가 되어 ‘기체 추락’이라는 가장 큰 불안요소를 키우는 것이다. 테러범 용대만큼이나 관객을 심란하게 하는 태인이 그 와중에 계속해서 ‘괜찮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실소를 자아낸다.

 

<하이재킹>의 태인은 실제 사건의 부기장이었던 박완규와 수습조종사 故전명세를 합친 캐릭터이다. 수습조종사 故전명세가 온몸으로 폭탄을 감싸 승객들을 보호했을 때 조종석에는 기장과 부기장이 자신의 임무를 하고 있었다. 영화는 기장 규식, 승무원 옥순(채수빈), 보안요원 창배(문유강) 등 자신의 위치에서 태인과 함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인물들에 핸디캡을 두어 태인에게 사건을 해결할 유일한 키를 쥐어준다. 이는 기능적으로 인물의 위기의식을 높이지만 태인 혼자서는 이 무게를 짊어질 도리가 없다.

 

빈약한 서사의 아쉬움을 채워주는 것은 항공 액션과 배우들의 안정적인 연기이다. 아슬아슬하게 주행하는 여객기의 모습은 스릴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뒤집어진 기체에서 거꾸로 매달린 승객들 사이로 전진하는 용대의 모습은 극 중 가장 인상적인 씬이다. 실화의 힘을 적극 활용하고자 했던 <하이재킹>의 재미를 극대화한 요소가 다소 비현실적인 항공 액션이라는 것은 아이러니한 지점이다.

 

〈하이재킹〉 기장 규식 역의 성동일(왼), 부기장 태인 역의 하정우
〈하이재킹〉 기장 규식 역의 성동일(왼), 부기장 태인 역의 하정우

 

기장 규식 역의 성동일과 부기장 태인 역의 하정우는 그간 보인 유쾌하고 능청스러운 감각을 싹 뺀 진중한 연기로 극의 중심을 잡는다. 하정우와 성동일은 2009년 영화 <국가대표>로 한차례 호흡을 맞춘 바 있다. 하정우는 한 인터뷰에서 성동일과의 13년 만의 재회에 “내가 지금 그 당시(<국가대표>) (성)동일이 형 나이가 됐다. 촬영 외에 가슴 뜨거운 시간을 많이 보냈다”며 남다른 감회를 전했다. 성동일 역시 하정우에 대해 “그때에 비해 대사 톤과 눈빛이 농익었다”며 아낌없는 후배 사랑을 전했다. <하이재킹>을 통해 20여 년의 연기 인생의 첫 악역을 맡은 배우 여진구는 세상에 대한 증오로 폭주하는 테러범 용대 역을 맡았다. 여진구는 살기 어린 눈빛과 묵직한 저음으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선보인다. 여진구는 한 인터뷰에서 “'우리 용대’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라며 실존했던 범죄자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고 전했다.

 

씨네플레이 이진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