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기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TV 속에 나온 유명인과 결혼하는 상상을 할 테다. 그게 유명 아이돌일 수도 있고, 좋아하는 작가일 수도 있고, 재벌일 수도 있다. 아름답게 빛나는 그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는 상상. 오롯이 그를 소유할 수 있다는 희열.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자면, 영원히 ‘만인의 연인'인 채, ‘나만의’ 것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혹은 강렬하게 빛나는 유명인 옆에서 나의 존재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누구누구의 아내, 남편, 연인으로 살아간 이들. 오늘은 이름을 잃어버린 그들을 집중 조명한 영화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차이콥스키의 아내> - 차이콥스키의 아내

러시아의 위대한 거장, 차이콥스키가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은 유명한 사실이다. 법률학교에 다니던 학창 시절부터 그는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자각하고 있었으나 그가 살던 19세기 제정 러시아는 동성애자를 죄인으로 간주했다. 동성애가 적발되면 시베리아로 보낼 만큼 취급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정체성을 평생토록 숨기면서 괴로워했다. 그런 그에겐 아내가 한 명 있었는데, 모스크바 음악원 시절의 제자 안토니나 밀류코바다. 차이콥스키의 연인은 다른 ‘여성'과 결혼하며 그와 헤어지게 되었고, 차이콥스키는 자신에게 결혼을 애원하는 제자 밀류코바와 결혼하게 된다.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밀류코바의 광적인 사랑과 파괴적 관계에 집중한다.

영화는 차이콥스키의 장례식으로 시작한다. 죽어있던 차이콥스키가 벌떡 일어나며 어떤 여자에게 “저 여자 왜 왔어? 누가 부른 거야! 당신이 지긋지긋해! 끔찍해! 날 사랑하지 않았잖아!”라며 비명을 지른다. 그 이야기를 듣는 여자는 바로 아내, 밀류코바. 밀류코바는 차이콥스키가 죽을 때까지 법적인 아내였으나 차이콥스키는 그의 집착에 결국 집을 떠나버린다. 밀류코바의 사랑은 정상의 범주를 넘었다. 그와 처음 대화를 나눈 날 밀류코바는 “선생님을 안고 키스하고, 한평생 같이 살고 싶어요. 당신은 다른 남자들과 달라요. 당신을 지켜주고 싶어요. 첫 키스도 당신하고 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며 애정을 갈구한다. 그가 거절하자 자살하겠다고 협박까지 해, 결국 그와 “형제간의 우애 같은 담담한 사랑에 만족할 수 있다”는 조건 아래 결혼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당연히,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차이콥스키의 침대에 ‘쳐들어’ 간다. “당신은 내 거예요”, “내 운명은 차이콥스키의 아내”라고 말하는 밀류코바의 모습에서 사랑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의 집착에 시달리는 차이콥스키는 우울증에 음악 생활도 어려워지지만, 아내는 개의치 않고 그를 마음껏 누린다.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밀류코바의 사랑에 집중하지만, 영화의 시작부, “날 사랑하지 않았잖아!”라는 말 역시 사실이다. 그는 한 번도 인간 차이콥스키를 사랑한 적이 없다. 사랑과 욕망을 구분하지 못했던 이의 이야기를 영화는 섬세한 미장센으로 마치 연극처럼 그려낸다.
<재키> - 존 F. 케네디의 아내

우아한 기품과 재치, 아이코닉한 패션으로 남편인 존 F. 케네디만큼 혹은 그보다 더 큰 사랑을 받았던 퍼스트레이디,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미국인은 애정을 담아 그를 ‘재키'라 불렀다. 암살이 벌어진 날은 재선 출마를 1년 앞두고 텍사스 주 댈러스로 유세를 떠나는 길이었다. 댈러스 시내로 향했을 때, 3번의 총성이 울렸고 총알은 그의 목과 머리를 관통했다. 아내 재클린 케네디는 눈앞에서 남편을 잃었고, 영원할 것 같던 퍼스트레이디 자리에서 내려온다. 그는 한순간에 ‘모든 것을 다 가진 여자’에서 ‘모든 것을 잃은 여자’가 되었다. <재키>(2017)는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1963년 11월 22일 낮 12시 30분부터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힌 25일까지, 단 4일 동안을 재클린의 시선으로 그린 작품이다.

실제로 남편의 잦은 외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좋지 않았으나, 인간적으로 그를 존중하기 위해 재키는 최대한 성대하게 장례식을 열고자 한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실제로 어땠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기록되었느냐에 달렸죠”라는 그의 말과 함께 그는 ‘존 F. 케네디를 위대한 대통령으로 기록하기 위해’ 링컨 대통령 장례식 버금가는 장례식을 추진한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그는 또 한 번 암살 위험을 무릅쓰고 운구 행렬 행사를 추진한다. 남편이자 아이들의 아빠를 잃은 슬픔을 뒤로한 채, 그는 여전히 기품을 잃지 않은 모습으로 대중을 압도한다. 그와 동시에 영화는 재클린의 인간적인 고통도 함께 드러낸다. 국민의 어머니로서 소중한 이를 잃고 입지가 위태로워져도 그는 대중 앞에서 우아한 미소를 띠어야 한다. 어디에도 슬픔을 털어놓을 수 없는 그는 신부를 찾아가 회한의 이야기를 내비치는 게 고작이었다. 재클린의 감정선에 집중했기 때문에 다소 루즈해질 수 있었으나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가 영화를 몰입감 있게 이끈다. 남편의 피로 범벅이 된 분홍색 치마를 입고 부통령의 대통령 취임선서에 참석한 순간, 그의 연약한 모습과 그럼에도 기품을 잃지 않으려 했던 필사적인 노력을 나탈리 포트만이 그대로 표현하며 역사적 인물을 ‘서사가 있는 사람’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프리실라> - 엘비스 프레슬리의 아내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곳에는 늘 주인공이 자리한다. 대중의 시선이 단번에 모이며, 우리는 자연스레 빛이 쏟아지는 곳에 주목하게 된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빛이라면, 그의 아내 프리실라는 강한 조명 옆에 묻힌 어둠이다. 여성의 새로운 시점을 보여주는 소피아 코폴라 감독이 이번엔 엘비스 프레슬리의 아내, 프리실라(캐일리 스패니)에게 포커스를 맞췄다.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 <프리실라>는 평범한 소녀였던 프리실라가 독일 미군 기지 파티에서 당대 최고의 슈퍼스타, 엘비스(제이콥 엘로디)를 만나 사랑에 빠진 이후의 일들을 색다르게 풀어나간다. 무대 위의 화려한 엘비스 프레슬리와 그의 어리고 귀여운 연인, 프리실라에 대한 이야기라 예상했으나 코폴라 감독은 무대 위의 엘비스나 뜨거운 열정 따위를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프리실라가 자신을 통제하려던 엘비스로부터 독립하고, 주체성을 찾아나서는 여성영화의 서사를 갖고 있다.

고작 14살의 평범한 소녀였던 프리실라가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의 연인이 되면서 그의 세계는 점차 엘비스로 거대하게 채워져간다. 그렇게 뜨거운 열애를 하던 중, 엘비스는 프리실라를 자신의 저택인 그레이스랜드(Graceland)로 초대하고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한다. 깊어진 관계만큼, 프리실라는 점차 ‘엘비스의 여자’가 되어갔다. 까만 머리에 짙은 화장이 좋다는 그의 말에 자신의 스타일을 바꾸고, 그의 말에 순종했다. 영화는 친구도, 가족도, 나도 잃은 채 엘비스의 저택에 인형처럼 존재하던 프리실라가 다시 자신의 인생에 핸들을 쥐는 과정을 스타일리시하게 담아낸다. ‘누군가의 연인’이 아닌, ‘나’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프리실라의 모습에서 관객은 역동하는 여성의 인생을 만날 수 있다.
<인비저블 우먼> - 찰스 디킨스의 연인

저서 「올리버 트위스트」, (구두쇠 스크루지 영감으로 익숙한) 「크리스마스 캐롤」 등으로 유명한 찰스 디킨스는 아마 대문호 사이에서 가장 대중적인 작가가 아닐까 싶다. 19세기 영국 산업혁명 시절을 생생하게 묘사한 그는 생동하는 캐릭터로 마치 살아있는 듯한 이야기를 힘 있게 전달했는데, 직관적인 주제와 문체 덕에 국내에서도 ‘청소년 필독서 100’에 꼭 이름을 올리고 있다. 영화 <인비저블 우먼>은 1857년, 40대 중년인 찰스 디킨스(랄프 파인즈)가 무명의 연극배우 넬리 테르난(펠리시티 존스)에게 빠져드는 순간부터 그의 죽음까지를 담고 있다. 젊은 나이에 이미 작가로서의 명성을 떨친 디킨스는 어느 날 아름다운 무명의 연극배우, 넬리를 만나게 된다. 당시 그의 나이는 18살로, 디킨스와 무려 27살 차이가 났지만 자신의 창작 활동에 영감을 주지 못하는 아내에게 흥미를 잃었던 그는 넬리를 자신의 뮤즈로 삼으며 속절없이 빠졌다. 그의 팬이었지만 기혼자였기에 그를 거부하는 넬리를 확실하게 잡기 위해, 그는 넬리에게 보낼 선물을 아내에게 ‘잘못’ 보내어 넬리의 존재를 눈치채게 하고, 그와 상의 없이 ‘가정의 문제로 아내와 별거하게 되었다’라고 신문에 공표했다. 넬리를 결혼하지 않고 남자와 동거하는 여성으로 소개하기도 했는데, 당시 시대상을 반영했을 때 이는 여성에게 모욕적인 행위였다.

<인비저블 우먼>은 디킨스의 인생 후반기를 다루고 있는데, 「크리스마스 캐롤」과 같이 유머러스한 톤으로 쓰던 초창기와 달리 후기작은 다소 어두운 편이다. 영화의 주요 전환점인 「위대한 유산」은 그의 후기작으로, 그의 자전적 소설 「위대한 유산」 원고를 넬리에게 보여주었고, 이미 디킨스의 열렬한 팬이었던 그는 결국 그의 천재성에 감동하며 그의 ‘비밀’ 연인이 된다. 이후 영화는 넬리의 시점에서 디킨스의 영광이 그의 인생을 어떻게 지배했는가를 보여준다. 영화의 제목처럼, 그는 유명인의 비밀 연인으로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여인’이 되어 버린다. 디킨스의 행동을 사랑이라 부르기엔 어려워 보인다. 욕망과 그로 인한 일말의 책임감 정도로 움직이는 그의 행동에 넬리는 물론, 그의 아내 역시 보이지 않는 여인이 되어 버린다. 그의 행동에는 저마다의 평가가 붙을 수 있으나 디킨스의 책처럼 인물의 얼굴을 깊숙이 비추며 책을 읽는 듯한 서정적인 연출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지점.
<마릴린 먼로와 함께 한 일주일> - 마릴린 먼로의 연인

지금까지 유명인의 연인이 된 ‘여성’ 이야기가 주되었기에 마지막은 남성 이야기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영화 <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은 팜므파탈의 아이콘, 마릴린 먼로(미셸 윌리엄스)와 <왕자와 무희>(1957) 영화의 조감독이었던 콜린 클라크(에디 레드메인)의 짧았던 첫사랑을 담았다. 콜린의 자서전을 일부 각색해 영화화한 작품으로, 그의 시점에서 진행되는데 섹시 아이콘, 여신으로 추앙받던 마릴린 먼로를 질투도 하고, 고민도 하는 ‘인간’으로 그려낸 점에서 인상적이다.

마릴린은 섹스 심벌로 전 세계의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동시에 이미지 소비가 심해 슬럼프를 겪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는 이미지 탈피를 위해 차기작으로 <왕자와 무희>(1957년 영화)를 선택했으나, 그의 변덕스러운 성격으로 감독이자 남자 주인공이었던 로렌스 올리비에(케네스 브래너)와 계속해서 충돌했다. 영화에는 비비안 리(줄리아 오먼드)도 등장하는데, 마릴린은 그의 노련함과 연기력을 갈망하고 비비안은 그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질투한다(두 사람은 13살 차이). 심리적으로 끊임없이 흔들리는 인물들 사이에서 콜린은 그를 한결같이 다정하게 대한다. 화려한 쇼비즈니스에 휘둘리던 그는 ‘인간적 호의’를 베푸는 콜린의 친절함에 기대어 휴식을 취한다. 면면히 살펴보면 대단한 사랑 이야기는 아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는 ‘시대의 아이콘’ 타이틀 뒤에 숨겨졌던 마릴린 먼로의 모습과 조감독의 눈으로 바라본 당시 영화 촬영 현장을 그대로 담아내었기 때문이다. 뜨거운 불장난보다는 순수했던 첫사랑에 가까운 이야기로 인간 마릴린 먼로를 연인의 눈으로 바라보고 싶다면 추천하는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