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처서 매직'이라는 말을 아시는지. 8월 22일 혹은 23일인 처서는 ‘멈출 처’에 ‘더울 서’로 무더위가 물러가기 시작하는 절기다. 한여름의 무더위도 처서만 지나면 마법같이 누그러지면서 가을 공기를 느낄 수 있어 처서의 마법, ‘처서 매직’이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올해는 그 마법이 피해 가는 듯싶다. 연일 이어지는 더위와 열대야는 처서가 지났음에도 꺾일 기세가 보이지 않는다. 예측대로라면 9월 초까지 이대로 푹푹 찌는 더위가 이어질 텐데 어쩐지 마음까지 눅눅해지는 기분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언젠가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온다. 코 끝이 시린 겨울이 오면 다시 여름의 생생함을 그리워하게 된다. 2024년 여름을 돌이켰을 때, 눅진한 모습이 아닌, 청량한 녹음이 떠오를 수 있도록 오늘은 초록과 바다를 테마로 한 영화들을 추천하고자 한다. <맘마미아>나 <리틀 포레스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처럼 너무 뻔한 영화는 최대한 뺐다. 만약 리스트에 없는 나만의 여름 영화가 있다면 댓글로 추천해주시길.
<남매의 여름밤>

사실, 우리가 ‘청량한 여름’이라는 단어에서 떠올리는 이미지는 경험한 여름과는 멀다. 대개는 일본 청춘 영화의 한 장면이나 유럽 휴양지의 어느 풍광이 떠오른다.(이러한 현상을 만든 데에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7)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8)이 한몫 톡톡히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의 여름은 다르다. 주황색 가로등이 서있는 어느 골목길, 2층 양옥집에서 시골 할머니 댁에 놀러 간 기억. 사춘기의 예민한 감수성으로 대하는 데면데면한 어른들. 걸을 때마다 유독 ‘쩍쩍’ 소리가 나는 노란 장판과 시골집에만 가면 유독 돈독해지는 형제 사이같이, 한국의 여름은 보다 가족적이고, 정서적이며 내 유년의 역사를 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은 미디어의 여름에 묻혀있던 ‘우리의 여름밤’을 떠올리게 만드는 영화다.

영화는 경제적 사정이 어려워진 아빠(양흥주)가 살던 집을 빼고 남매를 데리고 자신의 아버지, 즉 할아버지(김상동)네 양옥집으로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이어서 부부 갈등으로 집을 나온 고모도 양옥집 패밀리에 합류한다. 저마다 사연 있고, 사정이 있는 사람들이 한 집에 모이는 이야기지만 영화는 그들의 갈등을 보여주는, 쉽고 자극적인 길을 가지 않는다. 오히려 주인공을 사색하는 섬세한 사춘기 소녀 옥주(최정운)로 설정해 가족이 서로를 존중해주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얼마나 지독한 사연이 있는지는 영화에서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관객은 일상적 대화에서 얼핏 드러나는 정보로 그들의 사연을 짐작할 뿐, 영화는 ‘그래서 그들이 양옥집에서 어떤 여름을 나는지’에 집중한다. 다 같이 모여 사는 공간에서 옥주는 모기장으로 자신의 영역을 주장하고, 자신이 원하는 만큼 치매 걸린 할아버지의 시간과 공간을 존중한다. 낡은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미련’(신중현 작사작곡)을 들으며 자신만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할아버지를 방해할까, 잠시 기다려주는 옥주의 행동은 가족이 갖고 있는 크고 작은 문제를 덮는 작은 배려다. 영화는 섬세한 감정선으로 가족의 갈등과 고민을 다룸과 동시에 2층 양옥집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옥주 남매의 여름밤을 ‘우리들의 여름밤’으로 확장한다.
<남색대문>

유명한 영화는 빼겠다고 말했으나, 도무지 <남색대문>만은 뺄 수 없었다. 청춘의 여름을 다룬 영화, 하면 요샌 일본의 고교생들이 먼저 떠오르지만 원조는 대만이 아닐까. 2002년에 개봉한 <남색대문>은 청춘 여름 영화의 바이블로 꼽히는데, 대만의 스타 계륜미와 진백림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소년소녀미 가득한 두 사람의 풋풋한 모습과 2000년대 영화 특유의 낭만, 그리고 사랑이 전부였던 모두의 투박한 학창 시절 추억이 <남색대문>을 청춘의 한가운데로 이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2012)나 <나의 소녀 시대>(2016) 등 대만 청춘 영화 중 명작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남색대문>은 특별하다. 앞의 두 작품은 두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에 포커스를 맞춘다면 <남색대문>은 주인공들의 ‘성장’에 보다 집중한다. 빛을 한껏 모아 만물이 빠르게 성장하는 여름과 가장 닮은 모양새다.

커로우(계륜미)와 위에전(양우림)은 둘도 없는 단짝이다. 위에전은 쑥스러움이 많아 오랜 시간 시하오(진백림)를 짝사랑만 하다가 커로우에게 자기 대신 자신의 마음을 시하오에게 전달해달라고 부탁한다. 그의 부탁을 받아 커로우는 시하오에게 말을 걸지만 중요한 순간, 위에전은 사라지고 시하오는 위에전은 핑계고, 커로우가 사실 자신을 좋아한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와 붙어 지내며 점점 커로우에게 마음이 가는 시하오는 단순하고 솔직한 성격으로 커로우에게 고백한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흔한 청춘 로맨스처럼 보이지만 <남색대문>은 커로우의 성 지향성으로 방점을 찍고 로맨스가 아닌 ‘성장물’로 노선을 튼다. 위에전에게 우정이 아닌 사랑을 품고 있었던 커로우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터놓지 못한 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짝사랑 상대의 짝사랑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짝사랑 상대가 나를 좋아하고 있고, 내 짝사랑 상대는 나에게서 멀어져만 갈 때. 나는 그 사랑을 등 떠밀어줘야 할 때, 짝사랑 상대가 내 품에 안겨있지만 내 얼굴에는 다른 사람의 가면이 씌워져 있을 때, 커로우는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며 상처 입었다. 그리고 시하오는 감당하기 어려운 혼란과 감정 속에서 커로우의 숨 쉴 구멍이 되어주는 친구가 되어 그에게 위로를 건넨다. 나를 지탱하는 모든 게 흔들리는 시절, 온전하게 나를 바라보는 존재를 만났을 때 사람은 서툴지만 조금씩 성장해나간다. 대만표 여름 영화를 보고 싶다면 강력하게 추천하는 작품.
<테이킹 우드스탁>

이번엔 미국의 여름이다. 이안 감독의 <테이킹 우드스탁>은 히피즘의 정점이자 마지막이었던 록 페스티벌,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페스티벌 기획자였던 엘리엇 타이버의 자전적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히피즘에 대한 향수, 예찬 혹은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광란을 보여주려나, 했던 영화는 예상과 달리 주인공 엘리엇의 성장에 초점을 맞춘다. 집요할 만큼 스테이지는 비추지 않고 착한 아들 콤플렉스로 가족에 매여 있던 주인공이 어떻게 가족이란 틀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지를 시간 흐름에 따라 보여준다. 엄격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돈에 미쳐있는 어머니의 기에 눌려 가업인 모텔 운영 일을 돕는다. 하지만 깡시골에 있는 모텔이 잘 될 리가 없다. 파산 직전인 모텔과 아무것도 없는 고향 베델, 그리고 ‘돈, 돈’ 하는 어머니는 그에게 애증의 존재다. ‘가족을 떠나 네 살고 싶은 대로 디자인을 하며 살아라’라고 말하는 누나의 충고에도 그는 어쩐지 가족을 ‘버리는’ 느낌이 들어 영 떠나지 못한다. 그러던 중 그는 모텔 및 고향 부흥을 위해 베델에 ‘우드스탁 뮤직 앤 아트 페어’를 유치하는 데 성공하고, 총 50만 명에 달하는 히피들이 몰려들며 고여있던 마을은 떠들썩해진다.

경력도 없는 기획자가 후다닥 준비한 페스티벌이었기에 페스티벌은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비가 내려 초원은 진흙탕이 되고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모여 도로가 마비되며 페스티벌은 혼란에 빠졌다. 게다가 이렇게 많은 인원을 수용해본 적 없는 마을은 이를 통제할 능력조차 없었다. 하지만 ‘러브 앤 피스’ 정신을 갖춘 히피들은 이러한 혼란을 오히려 즐기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진흙탕 위에서 뒹굴며 순간을 즐기고 ‘정상’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은 채 있는 그대로의 나를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엘리엇은 히피즘에 감화되며 진짜 자신을 마주한다. 게이에다 사실은 가족과 마을을 떠나고 싶어했던 자신을 인정한 그는 스스로 걸어둔 무형의 족쇄에서 벗어난다. 페스티벌의 뜨거움보다는 성장의 열병을 담은 작품이지만, 히피즘이 주요 소재다보니 나체와 마약이 자주 등장하므로 혼자 보는 것을 추천한다.
<여름 이야기>

<여름 이야기>는 누벨바그 감독 중 가장 지적이고 우아한 에릭 로메르의 사계절 이야기 중 3번째 작품으로, 프랑스 여름 해변을 배경으로 한 남자의 평범한 사랑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일상적인 사랑을 필름에 담는 로메르 감독답게 <여름 이야기>도 우유부단한 한 남자가 브르타뉴 해변에서 세 명의 여성을 사이에 두고 고민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얼핏 이야기로만 들으면 어장관리 같은 영 좋지 못한 키워드가 떠오르나 과장됨 없이 담백한 연출과 마음이 풀어지는 프랑스의 여름 바다로 영화는 주인공 가스파르(멜빌 푸포)의 행동을 ‘여름이었다’로 눙친다.

주인공 가스파르는 우유부단하고 자기확신이 없는 남자로 그는 레나(오렐리아 놀랭)를 좋아하고 있다. 브르타뉴 해변으로 곧 휴가를 온다는 걸 알고, 가스파르는 먼저 그곳에 도착해 레나를 기다리는데 그 과정에서 카페 종업원 마고(아망다 랑글레)를 만난다. 가스파르는 마고와 이야기를 나누며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마고와의 만남을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마고는 그를 클럽에 데려가고 그곳에서 솔렌(그웨넬 시몽)이라는 또 다른 여성을 만난다. 활기차고 적극적인 솔렌은 적극적으로 가스파르에게 다가가고 그런 솔렌에게 가스파르는 레나에게 선물하려던 곡을 선물한다. 마고와 솔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사이, 레나가 그곳에 도착하고 가스파르는 끊임없이 자기방어를 하며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선택을 미룬다. 선택이 무서워 선택하지 않는 걸 선택한 가스파르. 그는 자신의 이러한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붙여보지만 결국 그는 한 사람에게만 기대했다 실망하는 게 두려울 뿐이다. 한 사람과의 관계가 불편하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치유받으며 그는 자신을 보호할 수 있기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선택을 유보한다. 줄거리만 보면 ‘뭐 이런 나쁜 놈이 있나’ 싶지만 <여름 이야기>가 매력적인 이유는 이 모든 행동을 아름다운 영상미와 함께 버무려 관객에게 거부감 없이 다가간다는 점이다. 다만, 다소 지질한 남자 주인공의 행동까지 포장할 생각은 없는 모양인지 영화의 결말은 꽤나 임팩트 있게 마무리된다.
<썸머 타임 머신 블루스>

아무래도 일본의 여름이 빠질 수 없기에 일본 여름 영화도 가져왔다. 가장 고민이 많았지만 ‘특별한 여름 영화’를 소개하자는 콘셉트에 맞게 ‘청량 필터를 뺀’ 일본 여름 영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썸머 타임 머신 블루스>는 타임리프물이지만 인생의 철학이나 시간여행의 위험성을 강조하며 무게를 잡은 다른 영화와는 결을 달리한다. 다른 타임리프물이 ‘연인을 만나기 위해’, ‘지구를 구하기 위해’, 기타 나에게 소중한 무언가를 구하기 위해 시간을 이동한다면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여름 날 망가진 에어컨 리모컨을 되돌리기 위해 시간을 이동한다. (물론, 요즘 같은 날씨엔 꽤 설득되는 이유다) 누군가는 ‘시시하다’고 해도 좋을 이런 소재 때문인지 우에노 주리나 에이타처럼 일본 대표 배우가 출연했으나 영 인기가 없다. 하지만 늘 진지하게, 교훈을 얻으며 살아갈 순 없지 않나. 때로는 이런 시시한 장난이나 쓸데없음을 보며 킬킬거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요즘처럼 무기력하고 예민한 계절에는 더더욱 말이다.

대학 동아리 SF 연구회는 말이 ‘SF 연구회’지, 남자 다섯 명이 모여서 노는 곳이다. 무더운 어느 여름 날, 동호회실에 콜라를 쏟으면서 에어컨 리모컨이 망가지게 되면서 그들은 더위에 지쳐만 간다. 단종된 모델이라 새로운 걸 구할 수도 없고 에어컨 본체에는 전원 버튼이 없어 오로지 리모컨을 고치는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그들의 눈앞에 타임머신 기계가 나타난다. 5명 중 3명은 고장 난 에어컨 리모컨을 돌리기 위해 시간여행을 감행하는데, 그 기계를 알게 된 박사가 ‘에어컨 리모컨을 가져오면 과거와 달라지면서 시간이 완전히 꼬이게 된다’라며 세계를 지키기 위해선 에어컨 리모컨을 가져오면 안 된다고 말한다. 영화는 어제와 완벽하게 동일한 오늘을 만들기 위해 온갖 난리를 치는(고군분투보다는 난리에 가깝다) 영화로, 리모컨 하나에 심각해하며 매달리는 모습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일본 영화 특유의 B급 감성과 여름 냄새, 그리고 풋풋한 대학생들의 열기가 매력적인 작품으로, 포스터의 압박만 이겨내면 재밌게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