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호평을 받으며 종영한 JTBC 드라마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장면을 딱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4화 도다해(천우희)의 아버지 장례식 씬이 아닐까 싶다. 조문객 없이 썰렁한 장례식장에 찾아온 백일홍(김금순). 조의함을 뒤적거리며 “야, 이제 아빠 거 다 네 거니까, 네가 갚아야 되겠다”라며 도무지 대꾸할 수 없는 눈빛으로 어린 다해에게 빚을 지우던 그. 평범한 찜질방 관리인이자 도다해의 엄마인 줄로만 알았던 백일홍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많은 시청자들이 백일홍의 두 얼굴에 소름이 돋았을 터다.

반전 이후에도 백일홍은 사람 냄새가 진하게 나는 이 초능력 소재 드라마의 키와 같은 역할을 톡톡히 해낸 캐릭터였다. 조의금까지 털어가는 빚쟁이지만, 부모를 잃은 도다해의 엄마 역할을 자처할 정도로 인간다움과 악덕이 공존하는 그의 입체적인 얼굴은 배우 김금순이 연기해내 그만한 설득력을 얻었을 터였다.

드라마 <카지노> <최악의 악> <LTNS> <살인자ㅇ난감>, 영화 <잠>(2023) <브로커>(2023) <사바하>(2019) 등의 교집합은 바로 배우 김금순의 출연이다. <LTNS>에서는 이학주의 불륜 상대인 연상녀로, <잠>에서는 정유미의 집을 봐주는 카리스마 넘치는 무당으로, <브로커>에서는 아이유의 포주로. 배우 김금순을 모르더라도, 그가 짧게나마 출연했던 장면을 언급하면 누구든 단박에 떠올릴 얼굴. 영화 <울산의 별>로 202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한 김금순은 “스크린, TV, 시리즈. 그 모든 매체 속에 제가 있겠습니다”라던 수상소감을 몸소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 단역과 이름 없는 역할을 가리지 않고 진한 인상을 남겨왔다.

<파묘>의 김고은 이전, 장재현 감독이 그리는 모던한 무당의 모습은 <사바하>의 제천 무당, 김금순이 먼저였다. 영화 <사바하> 오프닝의 몰입감을 책임진 제천 무당(김금순)은 마샬 스피커를 튼 채, 얼굴에 검은 먹과 붉은 피를 묻히고 신을 부른다. 그가 칼춤을 추다 소가 쓰러지자, “이런, 씨발”이라며 내뱉는 대사는 단연 압권. 김금순 배우를 잘 모른다면 실제 무당의 굿 장면을 찍었나 싶을 정도로, 그가 <사바하>에 미친 공은 상당했다.

김금순 배우는 드라마 <홍천기>, 단편영화 <작두>(정재용, 2022), 그리고 작년 개봉한 공포영화 <잠>(유재선, 2022)에서도 압도적인 포스의 무당 역할로 등장해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잠>에서 김금순은 <사바하>에서보다도 한층 더 모던하고 압도적인 비주얼로 등장했는데, 숏컷 머리에 링 귀걸이를 하고, 빨간 립스틱과 빨간 매니큐어를 바르고, 가죽 라이더 재킷을 입은 해궁할매의 모습은 귀신보다도 더 오금을 저리게 했다.
<잠>에서 대사보다도 눈빛으로 압도했듯,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브로커> 속 포주로 출연했을 때도 김금순은 눈빛만으로 고레에다 감독의 극찬을 이끌어냈다. 김금순이 영화에서 맡은 역할은 ‘엄마’라고 불리는 인물로, 아이들을 데리고 작은 아파트에서 살면서, 갈 곳 없는 여성들을 데려다 성매매를 알선한다. 그가 <브로커>에 나온 분량은 약 2분 남짓.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당초 아이유와 김금순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을 찍기로 계획했으나, 김금순의 등장 씬 하나만으로 이미 캐릭터가 완성되었다고 느껴, 나머지 촬영을 취소했다고.

김금순의 눈빛은 단지 ‘타고났다’라고 말하기엔, 그의 부단한 노력을 평가절하하는 것만 같다. 김금순은 배역의 분량이나 대사량에 상관없이, 맡은 캐릭터의 공백을 상상으로 채운다. 단역일수록 짧은 등장 씬 만으로도 캐릭터를 확실하게 전달해야 하기에, 대본에 쓰여 있지 않은 인물의 전사를 상상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다. 실제로, 김금순은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카지노>에서 다단계 사장 역할로 출연했을 당시, 그 인물이 유치원을 다닐 시절까지도 생각해 봤다고.
2022년 정동진독립영화제에서 배우 김금순은 “대본을 읽고 나면 내가 맡은 인물의 성장 배경, 미래,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 성격을 상상해 본다. 그런 뒤에 시나리오 안의 인물과 김금순이라는 인물이 갖는 교집합을 찾는다. 인물의 감정을 나라는 그릇에 담아놓고 연기하려고 한다”라고 전하기도 했다.

<사바하> <잠>의 무당,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의 빚쟁이, <브로커> 의 포주까지, 김금순은 유난히도 강한 배역을 많이 맡아 이른바 ‘센캐’ 전문 배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김금순의 단독 주연 독립영화 <울산의 별>과 <정순>을 보면 김금순이 얼마나 깊이 있고 다채로운 얼굴을 가지고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울산의 별>의 윤화, <정순>의 정순은 소외된 약자들의 현실을 대변한다. <울산의 별>의 윤화는 해고 통보를 받은 조선소 노동자, <정순>의 정순은 디지털 성범죄에 노출된 중년 여성이다. 그러나 김금순이 표현한 두 약자의 모습은 매우 상이하다. <울산의 별>의 윤화는 중년 여성 조선소 노동자로서, 생존을 위해 억척스러운 성격을 체화한 인물이다. 한편, <정순>의 정순은 자신이 처한 현실에 처음에는 소극적으로 대응하다가, 점점 자기만의 방식으로 담담하게 대응해나간다. <울산의 별>과 <정순>에서 담담하게 심금을 울리는 김금순의 연기에 빠져들었다면, 김금순이 출연한 단편영화 <베란다> 역시 감상해 보길 권한다. 김금순 특유의 현실감 짙은 연기로 표현해낸 평범한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에, 눈물을 참기 어려울 것이다.
“내 속에 윤화도 있고, 정순도 있다”라며 한 인터뷰에서 말한 김금순. 배우 김금순의 내면에는 윤화도, 정순도, 무당도, 일홍도 있을 터다. 2022년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배우상, 2022년 로마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2024년 들꽃영화상 여우주연상 등, 배우 김금순의 진가는 해가 갈수록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닿고 있다. 올 7월 개봉하는 영화 <더 납작 엎드릴게요>, 연내 공개될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게임 2>, tvN 드라마 <엄마친구아들> 등. 벌써 예정된 차기작만 해도 손에 다 꼽기 힘든 김금순의 다양한 모습을 더욱 자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