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리뷰 사이트 ‘레터박스’(Letterboxd)는 전 세계의 씨네필이 모여 서로의 영화 취향을 공유하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다. 레터박스 유저들은 자신이 본 영화를 기록하거나, 앞으로 보고 싶은 영화를 ‘찜’ 해놓거나, 혹은 특정 주제에 따라 고른 영화들을 ‘리스트’로 만들 수 있다. 마치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노는 놀이터 같달까.
그래서 영화배우나 감독들 역시 레터박스에서 활동하기도 한다. 그 때문에, 종종 감독이나 배우가 직접 자신의 작품에 리뷰를 남기기도 하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2022년, 배우 겸 제작자 마고 로비는 ‘MaggieAckerley’(마고 로비의 별명+남편의 성을 조합한 닉네임)이라는 아이디로 비밀스럽게(?) 레터박스 활동을 했는데, 팬들이 이 계정을 알아내 마고 로비의 ‘찜 리스트’를 보고, 당시 개봉 전이었던 영화 <바비>에 대한 유추를 해내자 마고 로비는 계정을 삭제하기도 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한 인터뷰에서 레터박스 비공개 계정이 있음을 밝혔는데, 공개적으로 레터박스를 통해 씨네필들과 소통하는 영화인들도 적지 않다. 그래서 영화감독들의 레터박스 계정을 소개한다.
마틴 스코세이지 @mscorsese

만 35세 이하의 젊은 유저들이 많은 레터박스에서, 가장 많은 팔로워를 보유한 인물이 80대의 노장이라는 점은 꽤나 놀랄 만한 사실이다. 여전히 건재한 영화감독 마틴 스코세이지는 지난해 레터박스 계정을 개설했다. 그러나, 언제나 본인이 생각하는 최고의 영화들을 공개적으로 말하길 좋아했던 그가 레터박스에 가입한 것이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긴 하다.

작년 10월 북미에서 <플라워 킬링 문>이 개봉한 직후, 스코세이지는 레터박스에 가입했다. 지난 2019년 “마블 영화는 시네마(cinema)가 아니다”라고 말해 영화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던 자신의 말을 스스로 패러디하는 듯, 그의 레터박스 계정의 소개 문구는 “이것이 시네마다”(This is cinema).

스코세이지의 계정에 들어가면 그가 ‘좋아요’를 눌러 놓은 영화들을 확인할 수 있다. 존 휴스턴의 <물랑 루즈>(1952) 부터 오시마 나기사의 <교토, 내 어머니의 고향>(1991), 텐좡좡의 <말도둑>(1986) 등 다소 의외의 영화들까지, 스코세이지의 좋아요 목록에서는 그가 영화의 장르와 국가를 가리지 않고 시청하는 ‘시네마광’임이 여실히 드러난다. 한편, 그가 ‘좋아요’를 한 2000년대 작품은 예시카 하우스너 감독의 <루르드>(2009)가 유일하다.

또, 스코세이지는 ‘최고의 와이드스크린 영화 10편’(Top Ten Widescreen Films), ‘함께 보기 좋은 영화’(Companion Films) 등의 리스트를 만들었다. 스코세이지의 필모그래피를 좋아한다면, 그가 공유한 ‘함께 보기 좋은 영화’ 리스트만큼 유익한 것이 없다. 그는 이 리스트에서 자신의 영화에 영감을 준 고전 영화들을 나열하고 설명을 덧붙였는데, 이를테면 <더그아웃의 여인>(The Lady of the Dugout, 1918) <사랑아 나는 통곡한다>(The Heiress, 1949) 등의 영화는 <플라워 킬링 문>(2023)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마이클 만 @michaelmann

스코세이지의 또래인 노장 감독이자, 스코세이지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필모그래피로 종종 함께 언급되곤 하는 마이클 만 감독은 최근 레터박스 계정을 개설했다. 마이클 만 감독의 레터박스 계정을 구경하다 보면, 머리에 ‘포템킨.. 포템킨..’이 맴돌 것이다. 마이클 만은 그의 계정에 자신의 ‘최애’ 영화가 <전함 포템킨>(세르게이 아이젠슈타인, 1925)임을 한껏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가장 좋아하는 영화 14편’ 리스트를 만들어 공유했는데, 다른 영화들은 특별한 순위에 따라 나열된 것이 아님을 밝히면서도 <전함 포템킨>은 개중 공고한 1순위임을 분명히 했다.

마이클 만의 ‘가장 좋아하는 영화 14편’ 리스트는 어찌 보면 상당히 파격적이기도 하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가여운 것들>(2023),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비우티풀>(2010), 기예르모 델 토로의 <판의 미로>(2006) 등, 고전 영화부터 최신작까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션 베이커 @lilfilm

이번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의 주인공, <아노라>의 션 베이커 감독은 활발한 레터박스 유저다. 7월 들어서만 벌써 <맥신>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 날> 등 영화 4편을 봤다고 기록해 놓았으니 말이다.

션 베이커는 자신이 본 영화에 리뷰도 종종 남기는데, 이를테면 이창동의 <버닝>(2018)을 보고는 “이창동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 중 한 명이다. 그는 절대 실망시키지 않는다. 세 명의 주연이 모두 훌륭하다. 그런데 이 영화를 필름으로 찍었으면 더 좋았겠다. 물론, 디지털처럼 황혼을 제대로 담을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이라고 적기도 했다.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2016)을 보고는 “어떻게 이 영화를 즐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남겼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작품에 리뷰를 남기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에 별점 한 개를 주며 “마지막 장면은 디지털로 찍었다. 우웩!”이라고 남겼다. 다만, 그는 자신의 영화에 대한 다른 유저들의 반응을 신경 쓰지는 않는 듯하다. 그는 프로필에 “나는 내가 만든 영화의 리뷰는 읽지 않는다”라고 재치 있게 적어놓기도.
유재선 @doolys2289

지난해 가장 인상적인 데뷔작을 선보인 <잠>의 유재선 감독은 작년에 레터박스 계정을 만들어 몇 개의 영화에 리뷰를 작성해 놓았다. (유재선 감독은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영국에 거주해 영어에 능통하며, 다수의 영화에서 영문 자막 작업을 했다. 그러나 아이디가 왜 ‘둘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에 “<기생충> 이후 내가 본 최고의 한국 영화 중 하나”라고 남겼으며, 조현철 감독의 <너와 나>(2023)에는 “올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고 썼다.

유재선 감독이 자신의 작품에 남긴 리뷰는 웃음을 자아낸다. 그는 2015년 <영상편지>라는 단편을 연출했는데, 해당 작품의 리뷰에는 “이게 여기 어떻게 있어”라고 쓰는가 하면, <잠>(2023)의 리뷰에는 “나의 첫 영화다. 잘 보셨으면 좋겠다!”라며 신인 감독다운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