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길>(2009) 등 독특한 형식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온 정재훈 감독의 신작 <에스퍼의 빛>은 10대 청소년들과 온라인 TRPG 게임을 진행하면서 플레이어들이 써내려간 캐릭터와 서사를 바탕으로 판타지 세계를 구현했다. TPRG란 ‘Tabletop Role Playing Game’의 약자로, 오프라인상에서 사람들이 테이블에 모여 앉아서 대화를 통해 진행하고, 각자가 분담된 역할을 연기하는 게임을 일컫는 용어다. 낯선 방식으로 연출을 밀어붙인 만큼 작품에 대한 반응도 크게 갈렸다. 정재훈 감독을 만나 <에스퍼의 빛> 제작 과정에 대해 물었다.

평소 청소년기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2018년쯤 영화를 구상하게 됐다고.
청소년 시기에 많은 변화를 겪게 되는데, 그게 대단히 영화적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서사가 다른 식으로 흘러갈 수 있을까, 공동체 서사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하면서 TRPG에 관심을 가졌다. 옛날 이야기 보면 정자에서 시 한수 읊으면 다른 쪽에서 그걸 받아서 읊거나 가야금을 연주하며 응답하는 소통 과정이 있지 않나. 그걸 어떻게 영화화해볼까 하던 찰나에 청소년기에 대한 관심이 공통으로 가면서 이 영화의 구조가 됐다.
왜 TRPG에 이끌렸나.
청소년 친구들 만나보면 자기 마음에 대해서 표현을 잘 안 한다. 주변에 TRPG를 하는 친구도 있었고, 온라인에서 글이나 그림으로 서로 대화를 나누고 관계를 맺는 걸 보면서 멋지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다가가려면 나도 거기에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해서 2019년에야 SNS 게임 형태로 만들 수 있었다. 온라인에 모집 공고를 내고, 주변에 수소문도 하고, TRPG를 이미 하고 있거나 그림 잘 그리는 지인들에게 제안해서 플레이어를 모집했다. 결과적으로 온라인상의 모집은 잘 안됐다.

<에스퍼의 빛>을 위한 TRPG는 어떻게 진행됐나.
매체는 트위터를 썼다. 제작진이 공간과 시대적 배경 등의 세계관만 주고 캐릭터의 생김새나 능력 같은 건 플레이어들이 마음대로 만들게 했다. 몇 날 몇 시에 온라인상에서 만나 어떤 창에서 그 시각에 맞는 “캄캄한 밤이다”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같은 상황을 주고 플레이어들이 대사를 써 내려갔다. 그리고 다음날 각자 혼잣말이나 자신의 선택에 대한 생각 같은 걸 개인 로그에 쓰면, 그걸 바탕으로 다음 장을 만든다. 그렇게 진행되면 이야기 자체가 파편화될 수 있고, 이 파편화 안에서 각자의 감정들이 만들어지고 같이 일을 겪으면서 공통으로 만들어지는 감정이 생기기도 한다. 8개월 정도 즐겁게 게임을 진행했고, 한 친구가 3개의 캐릭터를 플레이했다. 아무리 캐릭터가 각자 달라도 오묘하게 데자뷰를 일으키는 부분들이 생기더라. 반복적으로 무언가를 상기시키거나 플레이어가 가진 내밀한 욕망이나 마음이 드러나는 부분에 한해선 재현하려고 노력했다.
함께 하게 된 플레이어의 조건은?
본인이 즐거워하는 것. 하다가 그만두기도 하고, 연락이 끊기기도 하고, 영화화 과정에서 실사를 찍어야 하는 단계에서 안 나오는 경우도 있다. 게임하는 과정에서는 정해진 시각에 참여할 수만 있으면 됐다.

플레이어가 만든 이야기를 영화가 다듬는 과정은 없었나.
없다. 1장이 완성되면 그걸 토대로 2장을 만들 수 있다고 봤다. 1장에 묻어 나온 결핍, 즐거움, 어떤 친구에 대한 마음 그리고 각자가 쓴 전사 등에서 힌트를 얻어 다음 장에서 그런 상황이 벌어지거나 다른 식의 인물이 출몰하거나 서로 오고 가는 과정이었다. 릴레이 소설 종류의 것은 아니고, 제작진은 이걸 인터뷰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플레이어의 역할은 어떻게 분담했나.
1장은 최대한 플레이어들이 자기가 만든 캐릭터랑 닮았다고 생각해서 본인들이 많이 출연했다. 2·3장은 성별이 다르거나 겉모습이 아예 다르기 때문에 플레이어들이 직접 연기를 하지 않고 그 이미지에 부합하는 배우를 캐스팅해서 만들었다.

영화 볼 때뿐만 아니라 크레딧을 자세히 살펴봐도 잘 모르겠더라.
몰라도 될 것 같았다. 영화 안에서 기승전결도 없을뿐더러 이야기의 감각만 갖고 아주 다른 언어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지시적으로 이 사람이 만든 거라고 지시적으로 정리하는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1장 초반부에 열심히 구조화를 시켜봤지만 사실 그것도 낯선 방식이라 진입하기 힘들 수 있을 것 같다. 두 번 세 번 봐주시면 좋겠다.
촬영 현장에서 연기 디렉션도 남달랐을 것 같다.
비전문 배우이기도 하고, 정형화된 연기로 찍게 되면 재미는 없을 것 같았다. 너무 자연스럽게 연기를 할 필요도 없고, 이 대사를 쓰고 저 대사를 쓴 시기가 다르기 때문에 그 사이를 연기할 때도 정반대의 감정을 갖고 해도 된다고 하며 작업했다. 익히 알려진 10대 청소년에 대한 이미지를 재연하는 연기는 지양했다.

고우와 최태현 두 뮤지션이 함께 음악을 만들었다.
1명에게 맡기고 싶진 않았다. 우리 영화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무언가를 만들면 거기에 반응하거나 충돌하는 음악을 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공동 작업 경험도 많고, 음악을 빠르게 만들기 때문에. 평소에 워낙 그 두 사람의 음악을 즐겨 듣기도 하고. 러프컷을 먼저 보여주고 각 장에 대한 느낌을 이야기하고 음악이 필요한 곳을 지정하면, 마음대로 음악을 만들어서 보내는 식으로 작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