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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씬드로잉] 털 속에 숨은 몸은 보물일까 괴물일까 〈퍼〉

성찬얼기자
〈퍼〉
〈퍼〉

 

미국의 사진가 디앤 아버스(Diane Arbus, 1923~1971)는 그 명성에 비해 한국에 알려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내 기억엔 2000년대 초반 경으로 알고 있다. 주로 미술 전공자나 유별한 사진 애호가 등에 의해 새삼 각광받았었다. ‘다이앤 아버스’ 혹은 ‘다이안 아버스’라 불렸고, 그런 표기가 최근에도 흔하다. 외국 이름의 한국식 명칭은 아직도 중구난방이 많다. 하지만 디앤 아버스의 경우, 단순히 표기만의 문제는 아닐 수 있다.


‘다이앤’일까, ‘디앤’일까

 

스티븐 세인버그 감독이 연출한 영화 <퍼>(2006)의 초반에 상업 사진가 앨런 아버스(타이 버렐)의 아내 ‘Diane’(니콜 키드먼)을 부르는 호칭은 상당히 불분명하다. 영어 히어링이 뛰어나지 않더라도, 부르는 사람에 따라 ‘다이앤’으로 들리기도, ‘디앤’으로 들리기도 한다는 걸 구별하는 건 어렵지 않을 정도다. 그 와중에 앨런 등 그의 가족만은 ‘디앤’이라 부르는 게 분명하다. 선뜻 기묘하다는 생각이 들어 여러 번 되돌려 확인한 사항이니 확실한 거라 여긴다.

 

반복하건대, 그게 왜 이 영화에서 중요한지는 영화를 보거나, 이 글의 끝에서 알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일종의 정체성 문제다. 타인이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타인이 그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이 반영될 수 있다. 서양에서 알파벳을 사용하는 국가는 흔하다. 출신에 따라 발음도 뉘앙스도 달라지기 십상이다. 디앤 아버스의 본래 성은 네메로브다. 그의 어머니가 브로드웨이의 한 연극을 보고 나서 맏딸의 이름을 ‘디앤’이라 부르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네메로브 집안은 부유한 유대계 사업가 출신이다. <퍼>에서 그들은 모피 제조 및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앨런은 처갓집의 상품들을 사진 찍으며 명성과 부를 거머쥔 인물이다. 아내 디앤은 앨런의 보조로 모델과 세트 등을 관리하는 일을 한다. 둘에겐 딸이 둘 있다. 그런데 촬영장에 모인 하객들은 대체로 그녀를 ‘다이앤’이라 발음한다. 호화찬란한 모피 쇼가 펼쳐지고 ‘디앤’은 남편의 보조뿐 아니라 집안일도 신경 써야 한다.


실화보다 더 분명한 상상

 

〈퍼〉
〈퍼〉

 

그러다 어느 날, 화장실 변기가 막힌다. 그걸 해결해야 하는 것도 디앤의 몫. 배수관을 뜯어 속을 확인하니 큼직한 짐승의 털 뭉치가 잔뜩 끼어 있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열쇠 하나. 얼마 전 2층에 이사 온 사람이 개를 키우나 보나 싶어 찾아갔으나 그 집 주인 남자가 약간 이상하다. 기괴한 가면을 쓰고 문구멍으로 디앤과 눈만 마주치며 대화한다. 개를 키우지는 않는다고 한다.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 디앤은 열쇠를 쓰레기통에 버린다. 그럼에도 자꾸 2층 남자를 신경 쓰게 된다. 그러면서 영화의 전체 분위기 또한 몽롱해진다.

 

앨런 아버스와 디앤은 어릴 때부터 사귀었던 사이다. 디앤이 14살 때부터였다. 이 영화는 나중에 디앤 아버스의 조수가 되는 사진가이자 기자인 패트리샤 보스워스(영화 제작에도 직접 참여했다)가 쓴 전기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그 전기의 초판이 발행된 건 1984년이다. 아버스 일가의 반대로 자료 수집에 난항을 겪었고, 그로 인해 여러 사실 관계들이 와전되거나 오해되기도 한, 문제투성이의 책이라 알려졌다. 디앤의 친정 측에서만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사진가의 전기임에도 작품 화보가 실리지 않은 건 그 탓이다(한국에도 영화 개봉 직전인 2007년 봄에 번역 출간됐었으나 현재는 절판 상태다).


저 털투성이 남자의 매력은 뭘까

 

그런데 그 사실이 이 영화와 절묘 또는 기묘하게 어울린다. 이 영화의 부제는 ‘An Imaginary Portrait of Diane Arbus’, 즉 ‘상상적 초상’이다. 실존 인물을 바탕 삼았으나, 실제로 있었던 일보다는 상상과 허구로 인물의 초상을 재구성해낸 셈이다. 이때, 이야기의 기저는 당연히 디앤의 삶이다. 하지만 그것을 그려내는 이미지와 구성은 전적으로 상상에 의한 것이다. 2층 남자는 어릴 적부터 다모증에 앓는 것으로 설정돼 있다. 온몸이 마치 고릴라처럼 갈색 털투성이다. 디앤은 거기에 사로잡힌다. 그러면서 그를 따라 ‘이상한 나라’로 빨려 들어간다.

 

 

〈퍼〉
〈퍼〉

 

디앤 아버스의 사진 작품은 다종다양한 기형들을 포착한 것으로 유명하다. 일란성 쌍둥이, 나체족, 성전환자, 거인, 난쟁이, 팔이나 다리가 없는 사람 등이 그녀의 주 모티프였다. 기형에 대한 편견과 왜곡을 강화했다고 비판받는 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의 사진들은 이 세계가 숨기고 있는 소위 ‘정상성’이라는 일방적 질서와 억압을 부드럽게 해체시키는 힘이 있다. 디앤의 사진 속 인물들은 분명 실재하지만,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감춰지거나 외면받거나 소외된 인물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의외로, 정상인보다 꿋꿋해 보인다. 정상인이 생각하지 못하는 자신들만의 본질적 유대로 끈끈하게 뭉쳐있다.

 

반면에 디앤의 일상은 부르주아 상업주의에 물든 허위와 가식과 허영으로 가득 차 있다. 디앤은 숨 막혀 하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앨런은 그녀에게 자신만의 작품을 찍으라고 종용하지만, 디앤은 망설인다.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주저하는데 마침 나타난 게 2층 남자 라이오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이다. 그는 물론 상상으로 가공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감싼 털 때문에 폐병을 앓고 있다. 그 또한 디앤을 처음 만났을 땐, ‘다이앤’이라 불렀다. “제 이름은 다이앤이 아니고 디앤이에요.” 영화 속에서 디앤이 유일하게 타인에게 자신의 이름을 교정하는 장면이다. 이때부터 디앤은 진짜 ‘디앤’이 되기로 (자기도 모르게) 작정하게 되는 거다.

 

2층은 이제 디앤의 유일한 해방터이자 안식처가 된다. 매일 밤 카메라를 들고 2층을 향한다. 그러다 집안일마저 등한시하게 되는데, 눈치 빠른 큰딸이 엄마에게 시큰둥해진다. 하지만 한번 ‘사로잡힌’ 디앤은 라이오넬을 만나는 걸 멈추지 않는다. 목덜미와 가슴속을 틀어쥐던 털 뭉치 같은 게 빠져나가는 기분이었을까. 막혀있던 본능이 터져 나와 새로운 사랑에 눈뜨게 되는 걸까. 어쨌거나 2층에 올라갈 때마다 삶이 변화하는 걸 느끼게 된다.


‘다른 존재들’을 보니 나도 달라져!

〈퍼〉
〈퍼〉

 

디앤은 라이오넬을 통해 다양한 기형들을 만난다. 그녀에게 그들은 여태 만나오던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들이다. 기이하고 때로 혐오스럽기도 하고 때론 신비롭기도 한 그들을 통해 디앤은 자신의 삶을 각성한다. 물론 그 과정이 설명적으로 나열되거나, 커다란 영화적 반전으로 작동하는 건 아니다. 영화는 이미지와 느낌,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심상의 변이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미스터리하지만, 그것을 풀어줄 열쇠 같은 건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은은하게 역동적이지만, 격렬한 사랑의 불꽃 따윈 타오르지 않을 것 같은 직감도 뒤따른다. 결론은? 맞기도 틀리기도 하다. 물론, 보기 나름이다.

 

영화에서도 디앤의 실제 작품들은 거의 인용되지 않는다. 후반부에 디앤이 찍은 필름을 큰딸과 앨런이 몰래 훔쳐 현상하지만,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풍경들만 잔뜩 찍혀있을 뿐 특별한 건 없다. 하지만 이미 디앤이 이전의 삶과 결별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진다. 원래 알던 엄마도, 20여 년 같이 지내왔던 남편도 이제 디앤에겐 과거에 밀봉된 낡은 흑백 필름 같아진 건지도 모른다.

 

라이오넬은 폐병이 더욱 심해진다. 새로운 삶과 사랑을 발견한 디앤은 절망한다. 자신의 시야가 트이고 세계의 질서가 바뀔수록 라이오넬은 죽음과 가까워지는 상황. 라이오넬은 결국 디앤에게 자신의 털을 모두 깎아달라고 부탁한다. 디앤은 정성 들여 라이오넬을 면도한다. 새살 같은, 오래 감춰있던 피부가 드러나고 평생 그를 짓누르던 털, 아울러 디앤의 삶을 둘러싼 숨통을 죄던 가짜 모피의 세계가 맨몸을 드러내는 거다. 사랑은 그렇게 더 강렬하게 일상 바깥으로 그들을 떠나보낸다.


누구에게나 자기 자신이 가장 내밀한 비밀이지

자신의 시야가 트이고 세계의 질서가 바뀔수록 라이오넬은 죽음과 가까워지는 상황. 라이오넬은 결국 디앤에게 자신의 털을 모두 깎아달라고 부탁한다. 〈퍼〉
자신의 시야가 트이고 세계의 질서가 바뀔수록 라이오넬은 죽음과 가까워지는 상황. 라이오넬은 결국 디앤에게 자신의 털을 모두 깎아달라고 부탁한다. 〈퍼〉

 

이 영화의 배경은 1958년이다. 실제로 앨런과 디앤이 이혼한 건 1959년이었다. 디앤 아버스가 사진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게 딱 그 무렵이다. 당시 디앤은 서른다섯 살이었다. 이후 디앤 아버스는 사진 예술을 혁명적으로 바꾼 인물로 기억되게 된다. 그녀가 찍은 건 분명 존재하지만, 존재의 기반과 본질을 ‘정상적’으로 알 수 없는 인물들이다. 단순 기이 취향이라 몰아붙일 혐의도 분명 존재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한 개인의 시각과 사고를 역동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건 누군가에겐 가히 내적 혁명과도 같을 수 있다. 그건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자신만의 ‘비밀’을 내처 깨우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바로 그 ‘비밀’에 관한 이야기다. 그 ‘비밀’은 말로 설명될 수 없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자신만이 스스로의 가장 내밀한 ‘비밀’이기 때문이다. 내 방 천장 위엔 누가 살까, 갑자기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