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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씬드로잉] 조커의 방아쇠는 누가 당긴 걸까〈조커〉

씨네플레이
〈조커〉
〈조커〉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는 2019년에 개봉했다. 5년이 지나는 동안, 세 번 봤다. 개인적으로 별난 일이다. 개봉 당시 많은 화제를 몰고 왔었고, 온갖 해석과 찬반양론이 드셌다. 어느 한쪽의 입장을 편들어 찬사하지도, 비난하지도 않았다. 세계가 구조적으로 양분한 선악 개념과 그 모순에 대해서 입씨름하는 것에 어떤 반감 같은 게 느껴졌던 것도 같다.


배트맨은 참 어벙해 보이지 않았나

 

나 스스로 찾아낸 답은 없다. 아니, 답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행과 가난을 주식 삼은 이들이 세계의 부조리에 맞서 부조리 자체로 저항한다는 식의 해석은 이상하게 민망했다. 집으로 향하며 처량하게 계단을 올라가는 초반부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의 모습과 경찰에 쫓기면서도 분장을 한 채 의기양양하게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후반부 조커의 모습이 반전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게 과연 수직의 전도이고 상승과 하강의 역전인가. 그저 당연히 (영화적으로) 저렇게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기시감만 들 뿐이었다.

〈조커〉
〈조커〉

조커라는 개릭터가 배트맨의 아치 에너미로 유명해진 건 팀 버튼이 감독한 <배트맨>(1990)의 영향이 컸으리라. 잭 니콜슨이 연기한 조커는 배트맨을 조롱하고 희화하는, 말 그대로 ‘광대’의 모습이었을 뿐, 그에게 어떤 상처나 고통이 느껴지진 않았다. 오락물치고는 지나치게 우울하고 스산한 영화였지만, 그게 또 매력이기도 했었다. 조커는 분명 눈에 띄는 캐릭터였으나 마음을 후벼파지는 않았던 것 같다. 웃기지도 슬프지도, 화나지도 신나지도 않는, 묘한 중립성(?)을 지녔던 것 같다.

 

조커가 문제적 인물로 떠오른 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나이트>(2008)을 통해서였다. 고(故) 히스 레저를 전설로 만든 동시에 조커를 희대의 안티테제로 등극시킨 그 작품에서 배트맨(크리스찬 베일)은 어벙해 보이기까지 한다. 영화 자체가 조커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느낌이었다고 말한다면 과언일지도 모르나, 적어도 내겐 조커밖에 안 보였다. 히스 레저의 연기력 덕분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19세기의 고전, 현대의 피카레스크가 되다

 

<조커>는 ‘조커의 기원’을 훑는 얘기다. 포커판의 ‘조커’마냥 뚱딴지 같고 불필요한 듯한 존재가 어찌하다 판 전체를 뒤흔들게 됐을까 하는 사후적 질문 혹은 상상의 일환일 것이다. 원작 만화에서조차 공식이라고 공언하지 않은 조커의 과거를 영화로 만든다니. 실제로 <다크나이트>의 조커가 시발이 되었던 건지는 나로선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영화가 남긴 조커의 여운 혹은 ‘후유증’이 영화 제작의 단초가 되었을 수 있을 거라 유추하는 건 무리가 아니다. <조커>가 그 많은 상상 중 굳이 정신병적 진단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을 사정일지도 모른다.

 

고담시의 청년 아서 플렉은 웃음이 병인 젊은이다. 웃음이 한번 터지면 사지가 비틀릴 정도로 주체하지 못한다. 아무도 웃지 않는 상황이 웃음을 폭발시키고, 그 웃음은 단어 그대로의 ‘웃음’이 아니라 일종의 발작이다. 반면, 모든 사람이 웃을 때, 그는 웃지 않는다. 아니 웃지 못한다. 전혀 웃기지 않은 건지, 웃음을 유발하는 기제가 망가진 건지 알쏭달쏭하다. 그러니까 그게 아서의 병인 거다. 그럼에도 그의 꿈은 사람들을 웃기는 코미디언이 되는 것이다. 광대 분장을 하고 여기저기 웃음을 팔러 다니면서 푼돈을 벌지만, 삶은 여전히 피폐하고 고단하다. 아이들에게 몰매를 맞거나, 뭇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도저히 제정신으로 살 수 없을 모양새다. 존재 자체가 모순과 아이러니투성인 인물.

〈조커〉
〈조커〉

사실, 조커는 19세기 빅토르 위고의 소설 『웃는 남자』를 기원으로 한다. 모든 감정을 웃음으로 표현하기 위해 입아귀를 칼로 찢어 언제나 웃음을 띠고 있는 기괴한 남자. 빅토르 위고는 그 소설에서 당시 프랑스에 만연한 여러 인종 문제, 사회적 병리, 정치적 타락 등을 묘파했었다. 소설에서 ‘웃는 남자’는 어릴 때부터 삶과 죽음의 접경을 오간 인물로 나온다. ‘웃는 남자’가 계속 웃고 있을 수밖에 없는 건 일종의 사회적 형벌이었다. 그는 결국 그걸 역설적으로 무기 삼는다. 자신의 고통과 상처로 자신을 괴롭힌 타인을 징벌한다. 저주와 능멸. 쾌락과 희열을 동일선상에 놓음으로써 세계의 비틀림을 자신의 비틀림으로 치환하는 것이다.


대중의 역린이 된 비천한 존재

 

그 ‘원전(原典)’의 현대적 현현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서였을까. <조커>라는 영화 전체가 아서 플렉이 자신의 고통을 자학적으로 즐기는 모습으로 점철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게 내겐 묘하게 중독적이다. 그러면서도 조커는 자신의 행위가 자발적이라 인식하지도 못하고 아무런 즐거움도 못 느낀다. 이상한 괴리이고 분열이다. 영화 초반부터 조커는 계속 궁지에 몰린다. 자신을 ‘해피’라 부르는 어머니(프란시스 콘로이)는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신보다 더 정신 나간 사람이었고, 유일하게 사랑하고 자신을 이해해줄 거라 착각하게 되는 이웃 여인 소피(재지 비츠)는 그저 환상 속의 연인일 뿐이다.

 

아서는 정신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완전히 정상 세계에서 떠밀려 있다. 영화 시작부터 노골적이다. 태생부터 그러했다는 설정도 나오지만, 나중에 배트맨이 되는 브루스 웨인이 자신의 배다른 동생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아서뿐 아니라 관객마저 아연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물론, 영화는 모든 걸 까발리지 않는다. 아니 까발릴 것도 없다. 그저 영화적 상상과 가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설정들이 아서의 병증을 더 가속화하고 아서 스스로 자신의 망상을 실제로 믿게 하는 (동시에 관객까지 덩달아 흥분(?)케 하는) 섬망(譫妄)의 지렛대 역할을 한다.

〈조커〉
〈조커〉

조커가 자신을 각성하는 건 우발적인 총기 살인 이후다. 그는 분노하고 슬퍼하고 저주하는 자로 태어났지만, 세상은 그를 우스개 삼고 그 스스로도 우스꽝스런 광대를 자처한다. 그러나 그에게 웃음은 상처이자 고통이다. 그래서 그 웃음이 무기가 되고 불길이 되고 뭇 대중들을 선동하는 전염력 강한 바이러스로 작동한다. 세상 자체가 미쳐 있고, 욕망을 쟁취한 자들은 타인을 우습게 여기며 집단적 병원체라 낙인찍어 징벌하려 한다. 바로 그러한 낙인과 차별과 멸시가 거대한 힘이 되어 거대한 역류로 변한다는 건 세계 정치사의 오래된 관성이기도 하다. 조커는 혁명가는커녕 사회적 인습 바깥으로 배제되어야 할 존재로 치부되지만, 바로 그렇기에 사회적 인습과 규율 및 편견 등을 뒤엎는 예상치 못한 대중적 역린이 된다.

 

이 영화의 대중적 반향이 의외라거나 위험스럽다는 의견들도 있었다. 웃긴 영화도 아니고, 범죄 스릴러도 아니고, 사회성 강한 고발 영화도 아니지만, 그 모든 형태를 유사하게 갖춘 기이한 파급력 자체가 또하나의 화제거리였던 것으로 안다. 영화(뿐 아니라 모든 예술작품)를 해석하고 분류하는 것으로 시대 상황을 고찰하는 일은 매우 의례적인 일이다. 그 어느 것도 옳다고도 틀리다고도 말할 수 없다. 각자의 의견을 가지고 싸우는 것도 그런 일을 하는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의 업인 거다.

 

하지만, 그 어떤 의견에도 동의하지 않고 영화가 드러내는 액면 그대로의 가상 존재를 다만 오랫동안 자주 바라보게 되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내겐 <조커>가 그런 영화였다. 왜 자꾸 조커의 얼굴이 떠오를까. 화가 나거나, 기분이 안 좋거나, 혹은 뭔가 우습거나 내처 울고 싶거나 할 때 자꾸 조커이 얼굴이 떠올라 여러 번 다시 보게 되는 영화. 이유는 나도 모른다. 다만 그 중. 가장 오래 각인된 한 장면을 스케치했다.


환상 속에도 이제 그대는 없다!

아서는 아무 말이 없고 눈빛은 어둡다. 갑자기 목에 뭔가 걸린 듯한 이물감이 솟구치는 건 나만 그랬던 걸까. 아서가 불쌍하다기보다 무섭고, 무섭다기보다 이상하게 환상적으로 여겨진 것 또한 나만의 망상일까.
아서는 아무 말이 없고 눈빛은 어둡다. 갑자기 목에 뭔가 걸린 듯한 이물감이 솟구치는 건 나만 그랬던 걸까. 아서가 불쌍하다기보다 무섭고, 무섭다기보다 이상하게 환상적으로 여겨진 것 또한 나만의 망상일까.

아서가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고 입원 중인 어머니를 베개로 질식사시킨 다음 이웃 여인 소피의 집에 무단침입한 장면. 비에 홀딱 젖은 몰골이다. 분장도 하지 않았고, 차림새는 추레하기 그지없다. 울고 있지도 웃고 있지도 않다. 그저 남의 집에 가만 앉아 있다. 그전까지 소피는 아서의 잠재적 연인(썸?)처럼 등장했었다. 하지만 이 순간 모든 게 까발려진다. 다정한 연인으로 보였던 소피는 그저 살짝 스쳐 지나친, 그것도 아서를 짐짓 불쾌하게 여기는 평범한 이웃 여자였던 것. 겁에 질린 소피가 아서에게 나가라고 종용한다. 아서는 아무 말이 없고 눈빛은 어둡다. 갑자기 목에 뭔가 걸린 듯한 이물감이 솟구치는 건 나만 그랬던 걸까. 아서가 불쌍하다기보다 무섭고, 무섭다기보다 이상하게 환상적으로 여겨진 것 또한 나만의 망상일까.

 

소파에 가만히 앉아있던 아서가 가만히 오른손가락 두 개를 이마에 대면서 소피를 바라본다. 소피가 소스라친다. 그리고 장면이 바뀐다. 러닝타임 1시간 18분 즈음. 아서 플렉이라는 괴이하고 불쌍한 청년의 내면이 블랙홀처럼 벌어지며 진짜 조커가 태어나는 건 그 시점부터다. 환상의 허공에 떠 있던 방아쇠가 실제 고담시(로 대표되는 이 세계)에 장착되는 순간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