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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씬드로잉] 내가 ‘미셸’이냐고? 그냥 ‘그녀’일 뿐이야! 〈엘르〉

씨네플레이

정신건강의학 용어 중 ‘이인증(離人症, Depersonalization)’이란 게 있다. 말 그대로 자신으로부터 분리된 듯한 정신 상태를 뜻한다. ‘떼놓을 이(離)’자가 쓰이지만, ‘다를 이(異)’자를 써도 의미는 통할 거다. 이른바 자신을 타인으로 인식하는 증세다. 모종의 트라우마와 스트레스에 기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고통스러운 기억이나 상태로부터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분리하는 건데, 그 경우 자신을 타인으로 파악하게 된다. 고통은 내 것이 아니고, 현실은 타의에 의해 꾸며진 허상이라는 것.


뭐 이런 콩가루 집안이 다 있어?

 

폴 버호벤 감독의 <엘르>(2016)가 바로 그 병증을 그대로 적시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영화를 보다 보면 그 단어가 계속 맴돈다. 인물들은 하나같이 멀쩡한 듯 괴이하다. 겉으론 일반적인 사회 규범과 원칙에 충실해 보이나, 관계의 내막을 살피면 마구 뒤틀리고 꼬여있다. 사회적 명성과 부까지 움켜쥔 자들이지만, 그들의 속사정은 일견 비열하고 추잡하기까지 하다. 막말로 서로를 기만하고 속이면서 지저분한 욕망의 가면무도회를 펼친다고나.

 

친구의 남편과 몰래 바람을 피우면서 그 친구와의 우정을 끝내 지키려 드는 엄마와, 자신의 아이가 아닌 줄 알면서도 애인에게 목이 꿰어 안절부절 아빠 노릇에 충실하려는 얼간이 아들. 영화는 이 모자를 중심으로 여러 인물들이 난반사하듯 엉키면서 흘러간다. 엄마 미셸 르블랑(이자벨 위페르)은 잘나가는 게임회사의 CEO다. 아들 뱅상(조나스 블로켓)은 그녀에게 애물단지와도 같다. 마약 밀매 등 우범 행위를 저지르다 만난 애인 레베카(비르지니 에피라)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데, 레베카와 뱅상 둘 다 순혈 백인임에도 아이의 피부가 검은색이다. 하지만 이 정도 막장은 대수도 아니다.

영화는 느닷없는 가택 침입과 폭력으로 시작한다. 미셸의 저택에 온통 검은 옷을 입고 스키 마스크를 쓴 괴한이 난입해 미셸을 성폭행한다. 미셸은 저항 끝에 완전히 유린당한다. 괴한이 달아나고 난 뒤 미셸의 행동이 묘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옷차림을 추스르고 어질러진 집안을 정리한다. 표정은 심상하고 특별한 감정도 안 느껴지는 듯하다. 그러면서 무심한 듯 치밀하게 괴한의 정체를 추적하는 게 영화의 중반부까지 이어진다.


모니터 속 여자는 ‘나’일까, ‘그녀’일까

 

미셸의 회사는 새로운 게임 개발에 몰두 중이다. 직원들의 프레젠테이션을 품평하며 차갑게 반응하는 미셸의 태도는 깐깐하고 자부심 넘치는 커리어 우먼의 전형 그 자체다. 일말의 흔들림도 주저도 없다. 어느 날, 회사 컴퓨터에 이상한 영상이 뜬다. 개발 중인 게임 캐릭터가 여성을 성폭행하는 장면인데, 여성의 머리에 미셸의 얼굴이 합성된 모습이다. 회사 안의 모든 컴퓨터에 그 영상이 무작위로 뜬다. 그러나 미셸은 크게 당황하지 않는다. 그걸 근거로 자신을 성폭행한 괴한의 정체를 밝히려 한다.

 

이쯤 되면 일종의 추리극 형태를 띠게 되지만, 영화는 단서들을 정밀하게 교합해 실마리를 찾는 정통 추리극과는 거리가 멀다. 괴한이 누구인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시작하되, 그 자체가 영화의 핵심 줄기는 아니다. 괴한의 정체는 중후반을 넘어서면 싱거울 정도로 허술하게 밝혀지나 그게 영화의 허술함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영화는 섹스와 폭력을 다루는 폴 버호벤 특유의 괴팍하고 변태적인 취향을 노골적으로 제시한다. 그를 스타 감독으로 부상케 했던 <원초적 본능>(1992)이 할리우드 공식에 충실한 플롯과 자극적인 선정성으로 인기를 끌었다면, <엘르>는 그가 젊은 시절 네덜란드에서 만들었던 엽기적 스릴러물들을 더 내실 있게 세공한 느낌을 준다. 미셸 역할로 점찍어뒀던 여러 미국 여배우들이 난색을 표했던 것도 이해 못 할 바 없을 정도다. 결과적으로 낙점된 이자벨 위페르는 압도적인 몰입감으로 영화를 확실하게 매조졌다고 할 수 있다.

‘엽기’니 ‘변태’니 하는 표현을 썼지만, 그것은 폴 버호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더 가까울 뿐, 그 특유의 유별난 개성만은 아닐 수도 있다. 폴 버호벤은 세상이 더 망가질 수 없을 만큼 배배 꼬이고 뒤틀려있다는 걸 천연하게 드러내는 감독이다. <엘르>의 인물들에게서도 바로 그러한 점들이 부각된다. 영화에서 흔히 말하는 ‘정상적인 인간관계’는 그저 허울일 뿐이다. 미셸은 친구이자 동업자인 안나(앤 콘시니)의 남편과 틈틈이 괴이한 성관계(혹은 유사성관계)를 갖는다. 가히 뻔뻔스러워 보일 정도다. 미셸의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 나이에 맞지 않는 요란스러운 화장을 한 채 젊은 남성을 밝히는 모습이 주책맞은 노인네라 아니할 수 없다.


‘미셸’은 '그녀'의 가면인가

 

미셸 모녀의 이면엔 깊은 트라우마가 있다. 미셸의 아버지는 추악한 살인마였다. 수 십 년째 감옥에 복역 중인 그는 과거의 사건 장면을 통해서만 관객에게 보여진다. 이른바 이 모든 뒤틀림과 변태 심리의 숨어있는 원흉이자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사건 당시 미셸은 소녀였다. 온갖 뉴스에 넋이 빠져 있는 미셸의 사진이 도배되다시피 했었다. 스스로 보고도 믿지 못했을 광경들. 그것도 타인들의 시선에 의해 자신마저 노출되며 겪었을 심리적 내상이 자라면서 내면의 괴물을 키웠을 거라는 상상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미셸은 자기를 보호하는 내면적 칼을 잘게 분해해 자신만의 독침으로 키웠을지도 모른다.

 

내가 당했다. 하지만 이것은 내 일이 아냐. 그럼에도 복수는 당연한 일이야. 그게 내가 나를 지키는 일이니까. 이런 식의 모순된 당착과 분열이 미셸의 외연을 더 굳건하고 파렴치할 정도로 떳떳하게 꾸며내는 가면의 주원료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가면’은 어떤 의식적 절차에 따라 쓰여지거나 벗겨지는 게 아니다. 미셸은 가면과 본 얼굴을 구분 없이 쓴다. 그녀가 남성들을 도발하는 방식은 말 그대로 ‘보란 듯이’다. 어떤 주저함도 체면치레도 없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성폭행 당했다는 건 수치심과 공포보다 자존심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녀는 더 치밀해진다.

건너편 집에 잘생긴 젊은 남자가 살고 있다. 미셸은 그와 그의 아내에게 친밀하게 다가선다. 아주 우아하고 품위 있는 이웃집 여자가 따로 없다. 그것은 미셸이 괴한의 정체를 밝히는 과정 중에 일어나나 그 자체가 미셸의 도착된 욕망을 자극하는 또 하나의 유혹(타인에게든 자신에게든)과도 같다. 그러면서 대뜸 안나의 남편에게 “더 이상의 성관계는 없어”라고 통보한다. 욕망이 또 다른 상대에게로 옮아가면서 오래 쓰고 있던 가면 한 장을 가차 없이 찢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미셸은 새로운 욕망에 몰두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발산한다. 그 분명하고도 내밀한 욕망 앞에 애물단지 아들이나 주책맞은 어머니 따윈 안중에도 없다. 그러다 결국 어머니는 돌연사한다. ‘그녀’(elle)는 죽음 앞에서도 여전히 냉정하기만 할 뿐, 그녀는 미셸이라는 이름의 자신을 그저 남 보듯 할 따름이다.


나는 내게서 가장 먼 타인이다

 

미셸이 건너편 집 남자의 모습을 창가에서 구경하는 장면이 있다. 서랍 속에서 쌍안경을 꺼내 침대에 앉는 미셸. 쌍안경을 보면서 치마 속에 손을 집어넣는다. 괴한이 침입한 건 일층 거실 창가를 통해서였다. 그녀가 남자를 몰래 훔쳐보는 건 2층 작은방이다. 이 역학구도는 뻔한 듯 상징적이다. 괴한의 정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미셸은 창밖의 남자를 통해 스스로 쾌감을 만들어낸다. 남자의 특별한 매력이 무엇인지는 미셸 스스로도 알지 못할 수 있다. 어쩌면 누구나 한 번쯤 마음에 드는 이성을 떠올리며 해봄직한 단순한 자위행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이 장면은 영화에서 아주 결정적인 암시로 작용한다. 미셸이 옷차림은 아무 꾸밈없는, 누구나 집에서 혼자 있을 때면 대충 걸칠만한 차림새다. 미셸은 자신만의 내밀한 방 속에서 창밖으로 욕망을 투사한다. 누군가에게 들키면 체면도 명예도 실추될 모습. 미셸은 후다닥 일(?)을 해치우고 방을 뜬다.

히치콕이나 트뤼포가 떠오를 수도 있다. 영화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 관음 본능은 유구하다. 영화는 결국 타인의 삶을 통해 자신의 욕망과 꿈을 투사하거나 조장하는 매개이기도 하다. 미셸은 자신의 삶을 타인이 만든 영화 구경하듯 한다. 그것도 아주 극단적이고 적나라하게 욕망을 즉물화한다. 회사 컴퓨터 모니터에 괴물에게 당하는 자신의 얼굴을 보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저게 나야? 좀 더 예쁜 사진을 쓰지 그랬어? 이러지는 않았을까. 그런 그녀가 이상한가. 아니, 그 모든 이상하고 비틀린 심사를 타인의 것인 양 낄낄대며 즐기는 일에 만성이 된 이 세계가 더 이상한 것 아닌가. 창밖에서 새가 운다. 고개를 내밀어 새를 찾는다. 새가 먼저 내 일상을 다 훑곤 만방에 소리 내어 알리는 건 아닐까. 나는 결국 내게서 가장 먼 타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