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들리 스콧 감독의 <프로메테우스>(2012)는 결과적으론 실패작에 가깝다. 물론 사견이다. 애초 <에이리언> 시리즈의 프리퀄로 기획되었으나 ‘에이리언’의 기원에 대해서도, 영화 자체의 기본적 구성에서도 신통찮은 면이 많기 때문이다. 프리퀄이라 하기엔 40여 년 동안 이어져 온 이야기 구성을 산만하게 떼어내 작위로 접붙이려 한 느낌이 강하고, 한 편의 독립적인 작품이라 하기엔 짐짓 시리즈 전체에 대한 아류(?) 혹은 우려먹기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제 에이리언도 귀여운 수준이지
제목에서 아예 ‘에이리언’을 지워버린 것 역시 마찬가지. 의도를 모르진 않겠으나 그렇기에 외려 이도저도 아닌 변죽만 울리다 엔딩되는 느낌도 있다. H.R 기거의 디자인을 보다 강고한 비밀 요새처럼 재증축(?)하고 ‘엔지니어’들의 생식 과정, 그리고 프로메테우스호의 웅대한 스케일 등 시각적인 면에선 딱히 흠잡을 데가 없다. 3D를 활용해 엔지니어들의 혼령 같은 실루엣을 살려낸 것도 입체감과 눈요기에 한몫한다. 그럼에도 스토리 자체의 진부함이 상쇄되진 않는다.

<프로메테우스>에선 무엇보다 인물들의 긴장도와 설득력이 헐렁헐렁하다. 엘리자베스(누미 라파스)와 할러웨이(로건 마샬 그린)의 애정 관계 설정은 엔지니어들의 재번식을 인위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빤한 공식으로 여겨질 뿐, 그들 자체의 심리적 결속은 붕 떠 있다. 비커스(샤를리즈 테론)의 야심이나 그의 리더이자 (나중에 밝혀지듯) 아버지인 피터 웨일랜드(가이 피어스)의 갈등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수직관계 및 그 역전 상황에 대한 기본 전제로 놓였지만, 어떤 결정적인 동기가 없어 보인다. 처음에 죽은 것으로 설정되어 있던 웨일랜드가 나중에 살아있는 사람이었다는 반전조차 전혀 극적이지 않다. 어떤 소스든 마구 뿌려놓고선 이건 간장이었고, 저건 소금이었다고 뻘쭘하게 밝히는 느낌이랄까.
시작부터 비판이 너무 심한가. 리들리 스콧은 <에이리언>(1979)과 <블레이드 러너>(1982)를 처음 영화로 탄생시킨 감독이다. SF의 영원한 고전이라 할 수 있는 두 작품은 이후 거의 반세기 동안 SF영화의 기본 축처럼 변용되고 지속되며 수많은 아류도 생산해냈다. 일종의 공식이자 원본이자 궁극인 셈이다. 그런 만큼 익숙하기도 하다. 심지어는 에이리언의 경우, 그 끔찍한 외형에도 불구하고 친숙하기조차 하다. 반가운 괴물이자, 영원한 미스터리를 왜 영화가 그냥 내버려두겠는가. 최근 개봉한 페데 알바레즈 감독의 <에이리언:로물루스>(2024) 포함, 에이리언이 등장하는 영화는 총 8편에 달한다.
끝끝내 죽지 않고 입에서 다시 고개를 쳐드는 에이리언의 속성을 그대로 제작 방식에 도입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만큼 에이리언은 인간의 온갖 잠재의식과 폭력성, 그리고 미지에 대한 공포로 여전히 살아있다. ‘미지’라는 건 말 그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 알 수 없는 것을 하나의 전형적 캐릭터로 창조해 두 세대가 다 지나도록 변형 복제하는 것 또한 그 공포가 무한하고 해결 불가능이라는 소리가 된다. 사람은 미지의 공포에 떨 수밖에 없지만, 오감으로 입증되는 무언가가 존재하게 되면 공포는 이완되거나 왜곡되거나 심지어 오락이 되기도 하는 법. 이제 내 눈에도 에이리언의 형상은 귀엽고, 심지어 멋있기까지 하다.
이 낯익고 엉성한 이야기라니!

<프로메테우스>의 기본 주제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라는 제목(이자 영화 속 탐사 비행선의 이름)마따나 서양의 오랜 신화에 바탕한 내용인데,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전해주었듯, 지구의 인류가 눈 뜨도록 만든 게 외계 생명체였다는 상상을 전제로 한다. 이건 그닥 낯선 설정도 아니다. 스탠리 큐브릭의 명작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도 그런 외계 기원설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현재에도 그러한 가설은 여전히 파다하다. 음모론 내지는 망상 취급받는 경우가 많지만, 고대 잉카나 마야 문명, 그리고 잊었다 싶으면 갑자기 누군가의 시선에 포착되는 UFO의 존재는 아직도 완전한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더 신비롭고 두려운 동시에 끝내 붙들어 매야 할 숙제처럼도 여겨진다. 과학의 발전은 AI의 일상화까지 진입했음에도 여전히 풀어내지 못한 비밀이 많다. 과학이 발전하는 만큼 더 알 수 없어지는 것도 많다. 인간이란 존재 역시 마찬가지. 과학은 계속 나아가나 인간은 더 작아지거나 더 정밀해지거나 더 단순한 형태로 잔존에 연연하기 직전이기도 하다.
과장 같은가. 하지만 에이리언보다 10년 채 안 되게 먼저 태어난 나로선 인간이 점점 자연과 대립되는 존재이자, 과학에게 잡아먹히는 존재가 되고 있다는 실감을 떨쳐버리기 힘들다. <프로메테우스>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시각적인 첨단을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 사이의 갈등과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를 더 가중시키는 내적 균열에 대한 영화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2094년이 배경이고, 아직은 우주선도 에이리언도 실제로 경험할 순 없지만, 과학적 효과가 첨단에서 첨예해질수록 공포와 인간의 소외의식은 더 강해진다고도 할 수 있다. <프로메테우스>의 서사가 유치할 정도로 헐겁게 여겨진 것도 그 까닭일 터다.
웅장한 무대와 초라한 배우들
뭔가 웅장한 무대에서 쪽대본으로 겨우 장면 때우고 마는 일일드라마를 본 듯한 느낌. 그 언밸런스한 기시감이 인간의 상상과 과학, 그리고 우주나 지구의 기원에 대해 계속 캐묻게 되는 인류의 천형 같은 한계일지도 모른다. 외려 100여 년 전 자신만의 망상을 가공할 만한 디테일로 표현해낸 H.P 러브크래프트의 골방이 아직 더 재고해야 할 연구 대상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비행기와 자동차가 등장한 지 얼마 안 된 시절, 남극으로 대표되는 지구의 극지와 인간 심리의 불가해한 심연을 다시 들여다보기. 아닌 게 아니라. 영화 <프로메테우스>는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광기의 산맥」을 우주의 어느 행성으로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한 느낌도 강하다.

인간의 극지는 때로 인간 자체의 본성 안에 내재한다. 물리적으로 그리고 육체적 한계로 인해 극복할 수 없는 것들을 극복, 나아가 장악하는 데 과학은 큰 힘을 써 왔다. 그로 인해 인간의 시공인식 체계와 육체적 능력 또한 향상되었다. 수명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웬만한 불치병도 과거엔 상상 못했을 정도로 말끔하게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늘 불행하거나 아프거나 불만족스럽거나 폭력적이다. 공포를 단속하기 위해 CCTV가 여기저기 존재하지만, 바로 그것으로 인해 심리적 충격의 여파는 다른 방향으로 다시 전이되고 변질된다. 여전히 인간은 인간이 무섭고, 세계는 폭탄 덩어리와도 같다.
쥐와 바퀴벌레가 집안 곳곳에 잠식해 있던 시절은 한참 전에 지났다. 깔끔하고 단정한 집안에서 스마트폰과 거대한 모니터를 바라보며 뇌를 외장하드에 저장하듯 자신으로부터 분리시킨다. 그것들로 인해 잠깐 행복하고, 잠깐 즐거우며, 그것들로 인해 타인의 불행이나 고통에 공감하기도 하고, 선행을 베풀 마음도 가지게 된다. 그러면서 공포와 소외는 여전할 뿐 아니라 더 단단하고 폐쇄적으로 변한다. 지구가 살기 힘들어지니 태양계의 다른 별로 이주할 상상마저 실현하려 든다. 인간이 너무 커졌거나 너무 작아졌다. 그러나 원래 인간이 어떤 존재, 이 우주에서 어느마한 규모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쉽게 알 수 없다. 때문에 다시 오래된 기원과 신화를 뒤진다. 신화와 과학이 만나 이 세계를 다른 세계처럼 보여주는 게 결국 SF다.
에이리언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프로메테우스>는 불시착했다. 아니, 불시착할 수밖에 없음을 불시착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준 영화라 여긴다. 흠잡을 데 없는 시각효과도, 거창한 주제의식과 정밀하게 디자인된 괴물의 형상도 자꾸 눈 사이로 비껴가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딱히 재미가 없거나 지루하진 않았다. 그저 대충 박아놓고 얼렁뚱땅 꿰맞춘 듯한 인물 구도가 자꾸 거슬렸던 건 마치 뉴욕의 어느 대기업 직원들을 호화찬란한 우주선에 잠재워놓은 듯한 느낌이었다고 비유한다면 말이 될까.
보람(?)이 있다면 이 영화에서 처음 알게 된 여주인공 누미 라파스의 다른 연기를 보고 싶어졌다는 것. 그래서 그녀를 스타로 만든, 이전에는 전혀 관심 없었던 <밀레니엄> 시리즈를 뒤져보려 한다. 뚱딴지같은 일 맞다. 영화는 이렇게 전혀 다른 방향에서 하나의 점과 몇 개의 선을 긋는다. 그 주체는 물론 감상자다. 모든 영화는 다르다. 당연한 얘기다. 모든 인간도 다르다. 이 역시 당연한 얘기다. 당연한 게 당연해지지 않을 때 ‘다른 것’이 발생한다. 그게 어쩌면 에이리언의 생존 방식인지 모른다. 에이리언은 누구에게나 다르게 존재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