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의 인생에서 가장 큰 후회 중 하나는 운전을 배우지 않은 것이다. 사실 35년 전, 그녀도 면허를 따긴 했다. 자가용도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모종의 계기로 과감히 도전해 마침내 면허증을 거머쥔 이 젊은 여성은 자부심으로 형형했으리라. 하지만 웬일인지 운전은 계속되지 않았다. ‘운전하는 여자’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솥뚜껑 운전”이니, “김여사”니 하는 혐오와 편견의 언어를 남성 운전자들은 부지런히도 실어 날랐다. 어쩌겠는가. 1980년대는 할리우드에서조차 <델마와 루이스>(1991) 시나리오를 놓고 “계집애 둘이 차에 탄 이야기라니, 그래서 뭐 어쩌라고.(Two bitches in a car, I don’t get it.)”, 혀를 차던 때였다.
엄마의 면허는 장롱 속에서 다시는 빛을 못 봤지만, 무명의 할리우드 관계자의 시대감각은 다행히 게으른 것으로 판명 났다. 업계를 떠돌던, ‘계집 둘이 차에 탄 이야기’는 1991년 마침내 영화화됐고, 칼리 코우리의 각본은 골든글러브와 아카데미를 모두 거머쥐었다. 너무나 유명해져 이제 스포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여성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 찬 세상을 뚫고 절벽으로 차를 몰아 비상하는 마지막 장면은 많은 이의 가슴에 각인됐다. 여성의 주체성, 이동성, 그리고 자유의 상징으로의 자동차가 우리 마음속으로 날아든 순간이기도 하다.

<델마와 루이스>로부터 33년이 지났다. 애석하게도 영화 속 여성들은 여전히 충분히 핸들을 잡지 못한다.(2018~2019년 한국에서 개봉한 국내외 영화 40편에서 남성 캐릭터가 자동차와 함께 등장하는 비율은 여성 캐릭터의 두 배다. 손희정, 2022) 영화와 현실 속 여성들은 더 자주, 더 멀리 운전해야 한다. 그래서 여성의 자리와 이동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삶의 선택권을 넓혀 나가야한다. 때론 35년 전 엄마를 움츠려 들게 했던 혐오와 편견을 불도저로 밀어버리는 객기도 부리고(<불도저에 탄 소녀>(2021)), 가끔은 과감한 드리프트로 좀비가 들끓는 폐허에서 타인을 구하기도 하고(<반도>(2020)), 이따금 남성의 영역으로 인식되는 운전직에 과감히 도전해 특송 전문 드라이버(<특송>(2022))로 큰돈도 벌면서 말이다. 이제 여성들에겐 ‘자기만의 방’에 더해 ‘자기만의 자동차’가 필요하다. 영화 <프리실라>(2023)의 주인공 프리실라 볼리외도 예외는 아니다.
<프리실라>에서 프리실라 볼리외(케일리 스페이니)는 자주 자동차에 '태워진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1959년, 프리실라가 9학년(한국 학년제로는 중학교 3학년)에 불과한 미성년자인 것을 감안하면 응당의 보호이자 배려로도 보인다. 하지만 성인이 된 프리실라가 원하는 건 보호가 아닌 자유다. 억압적인 남편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두 손으로 운전대를 움켜쥐고 직접 인생의 가능성을 가늠하는 것. 그것이 그녀가 원하는 것이다.

프리실라와 엘비스의 인연은 1959년, 한 파티에서 시작된다. 서독에 주둔한 공군 장교인 아버지를 따라 독일에서 생활하던 프리실라는 유명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제이콥 엘로디)의 파티에 초대된다. 마침 같은 지역에서 군 복무 중이던 엘비스가 미국에서 온 동향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이유에서다. 몇 번의 만남 끝에 엘비스는 프리실라에게 자신의 감정적인 취약점을 고백하며, 그녀에게 의존하고 싶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로맨스의 외향을 취한 이 장면은 프리실리가 고작 14살이라는 사실과 맞닥뜨리면 그루밍(grooming)의 전형적인 패턴으로도 읽힌다. 안절부절못하는 건 관객과 프리실라의 부모뿐이다. 슈퍼스타와의 운명적 사랑에 빠진 주인공은 아랑곳 않고 엘비스가 사는 멤피스로 향한다. 프리실라는 그곳에서 그와 동거하며 미국 가톨릭계 고등학교에 입학해 학업을 이어간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결혼까지, 엘비스의 끊임없는 염문설에 혼란을 느끼면서도 프리실라는 그에게 종속되어 간다. 프리실라의 발과 입은 꾸준히 억압당하고, 드레스 종류와 머리카락색, 심지어 성적 욕구까지 통제의 대상이 된다. 프리실라는 참을 수 없어 "나는 욕구가 있고 욕망의 대상이 있는 여자야"라고 항변도 해 보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진 않는다. 남성 배우자 아래서 육체적, 정신적 학대로 고통받는 여성이 적극적 투쟁을 벌인다는 것은 어쩌면 환상이다. 카메라는 군중 속 갈 곳 잃은 프리실라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그녀의 외로움과 무력감을 짐작하게 한다. 일로 집을 비울 때면 엘비스는 자주 프리실라에게 '집을 잘 데워놓고'있으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남자들이 로드트립을 떠나 자유로이 대륙을 누비는 동안, 여성은 애완견과 자식을 껴안으며 집을 데운다. 이곳은 가부장이 돌아와 언제든 쉴 수 있는 어머니의 품이어야 한다. 그 어디에도 '단독자' 프리실라를 위한 공간은 없다. 좁은 집조차 여성에겐 온전히 허락되지 않는다.

프리실라가 엘비스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은 영화가 거의 끝날 즈음이다. 언제나처럼 기분 전환용으로 프리실라의 몸을 탐하려던 엘비스의 손길을 마침내 떨쳐낸 프리슬리는 결혼 생활의 종말을 선언한다. 이제 정말 짐을 챙겨 떠나 할 시간이다. 정들었던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엘비스의 자택에서 나오는 프리실라 앞에 자동차가 있다. 자신의 인생을 찾아 떠나는 결정적 순간, 프리실라가 누군가 운전해 주는 차 뒷좌석에 예의 바르게 앉아있었다면 나는 별수 없이 그녀의 앞날을 걱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운전대를 움켜쥔 결기에서 머물지 않겠다는 다짐이, 악셀을 밟고 나아가는 속도감에서 제 길을 찾아가겠다는 의지가 읽히자 나는 그를 엔딩 크레디트 너머로 맘 편히 보낼 수 있었다.
<프리실라>는 프리실라 프레슬리의 회고록 「엘비스와 나」를 원작으로 한 극영화로,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마리 앙투아네트>, <매혹당한 사람들>로 국내에 잘 알려진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최신작이다. 영화는 제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에 노미네이트되었고, 주연을 맡은 케일리 스페이니는 같은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59년에 시작해 1973년에 마무리된 '세기의 사랑'을 다룬 영화는 정작 스펙터클과는 거리를 둔다. 마약, 폭력 등 통상의 영화라면 비극이나 동정으로 가득 찬 감정의 드라마로 나아갔을 장면들도 최대한 힘을 빼고 잔잔하게 그렸다. '회고'하는 프리실라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