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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종 사업가가 올린 한 장의 이미지가 박수를 받은 이유

성찬얼기자
일론 머스크가 자신의 SNS에 게시한 이미지
일론 머스크가 자신의 SNS에 게시한 이미지


​고장난 시계도 두 번은 맞는다는 말이 있다. 얼마 전 사업가(겸 인플루언서) 일론 머스크가 올린 게시물 하나가 '맞말'이라고 박수를 받았다. 평소 온갖 관심종자스러운 언행과 본인 사업 위주의 판짜기로 호불호가 갈렸던 일론 머스크인데, 그가 게시한 그림이 무엇이었길래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었던 걸까.


일론 머스크는 최근 영화계, 특히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와 그 흐름에 앞장선 월트 디즈니 컴퍼니 저격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디즈니의 PC를 권장하는 내부 규정을 공개하며 '해당 규정으로 피해를 받은 사람이라면 법무 비용을 대신 지불해주겠다'는 발언까지 덧붙였다. 실제로 그는 정치적·혐오성 발언으로 <만달로리안>에서 해고돼 디즈니와의 소송전을 진행 중인 지나 카라노에게 법무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 X(구 트위터)를 통한 홍보를 중단한 디즈니에게 맞불작전을 놓는 것이 속셈이긴 하지만.

“디즈니 고소하고 싶으면 연락해”
“디즈니 고소하고 싶으면 연락해”

천재 혹은 사기꾼으로 평가받으며 늘 지지층과 반대층이 극렬하게 대립한 일론 머스크지만, 이번 행보는 근래 PC주의에 빠진 문화예술계에 지친 팬덤에게 전반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일평생 너드(Nerd)로 산 일론 머스크답게 팬덤이 가장 답답해하는 PC 행보를 끊임없이 긁고 있는데, 특히 진저혐오와 블랙워싱 관련한 짤을 게시해 바다 건너 한국 누리꾼들에게도 소문이 나고 있다.


진저-블랙워싱 관련 이미지는 심심찮게 업데이트 중이다.​
진저-블랙워싱 관련 이미지는 심심찮게 업데이트 중이다.​

 

이 진저-블랙워싱은 몇 년 전부터 매니아들 사이에선 심각한 문제로 여겨졌다. 요점은 이렇다. 특정 작품을 실사화, 혹은 리메이크할 때 유독 진저(붉은머리)는 대체로 흑인으로 각색된다는 것이다. 다양성을 중시하는 PC의 방향성에서 기득권, 다수를 상징하는 캐릭터를 흑인 배우에게 맡기는 건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 변화가 필요 이상으로 급작스러운 데다 '다양성 존중'이라면서 상징적인 혹은 역사적 인물마저 모조리 흑인으로 바꾼 것에서 비롯됐다. 이런 경향을 비꼬기 위해 과거 화이트워싱(백인이 아닌 캐릭터를 백인 배우가 연기하는 것)을 뒤집어 블랙워싱이란 신조어가 생겼다.​

 

디즈니 대표 캐릭터 에리얼
디즈니 대표 캐릭터 에리얼
할리 베일리가 캐스팅된 순간 팬들의 불만이 터졌다.​
할리 베일리가 캐스팅된 순간 팬들의 불만이 터졌다.​

 

이 진저혐오-블랙워싱이 대두된 시점은 <인어공주> 실사화 발표였다. 원작 애니메이션에서 에리얼은 붉은머리의 백인으로 디자인됐다. 그러나 실사영화 에리얼 역으로 할리 베일리가 캐스팅되면서 원전의 특징(백인, 붉은머리, 생머리)이 모두 사라졌다. 만일 다른 캐릭터들의 인종이나 특징까지 모두 바꿨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에릭 왕자·우르슐라·트라이튼 왕은 모두 백인배우를 캐스팅해 진저혐오가 아니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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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제인(왼쪽 두 이미지)와 미셸 존스. MJ라는 예명 빼면 아예 다른 캐릭터이지만, 스파이더맨에서 MJ라고 쓴 것부터가 일종의 변명인 셈.
메리 제인(왼쪽 두 이미지)와 미셸 존스. MJ라는 예명 빼면 아예 다른 캐릭터이지만, 스파이더맨에서 MJ라고 쓴 것부터가 일종의 변명인 셈.

<인어공주> 캐스팅에 백래시가 일어난 건 그간 진저에서 흑인으로 변경된 캐릭터가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스파이더맨의 연인 메리 제인(MJ)도 진저이나 최근 실사화에서 젠데이아가 맡았고(약자만 같은 것으로 변명의 여지를 두었지만), <위쳐> 시리즈의 트리스도 진저인데 안나 샤퍼가 연기했으며, <애니> 리메이크에서도 주인공 애니를 쿼벤저네이 월리스가 연기했다. 이외에도 진저 캐릭터 다수가 실사화/리메이크에서 흑인 배우에게 돌아가 논란이 되던 중 <인어공주>가 기폭제가 된 것이다. 영화계의 일관성 있는 '인종 교체'에 일각에선 '진저 혐오' '진저 지우기' 아니냐는 목소리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 진저 지우기가 왜 문제인가 할 수 있다. 백인이 흑인돼서 그런가? 붉은머리가 실제로 소수이므로 오히려 비현실적이지 않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다만 일상에서 붉은머리를 보기 힘든 아시아권과 달리 서구권에선 예전부터 진저에 대한 편견이 많아 비하하는 일이 잦았기에 진저 캐릭터가 변경되는 과정이 일종의 인종 혐오로 와닿게 된 것이다.

'붉은머리 사람들에 대한 편견' 항목이 위키백과에 있을 정도로 긴 세월 이어진 역사가 있다.
'붉은머리 사람들에 대한 편견' 항목이 위키백과에 있을 정도로 긴 세월 이어진 역사가 있다.

 

모든 붉은머리가 그런 건 아니지만 대체로 '아일랜드인'이나 '아일랜드계 이민자'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붉은머리, 새하얀 피부, 주근깨로 대표되는 아일랜드인들은 이전부터 옆나라 영국에서 핍박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천대받는 분위기가 암암리에 퍼졌다. 미국에서도 분위기는 다르지 않았다. 먼저 미국땅에 정착한 영국계 이민자들의 텃세와 뒤늦게 노동시장에 뛰어들어 다수가 3D 노동에 투입된 탓에 이들을 향한 편견과 천대는 계속 이어졌다. 서구권에서 진저를 보는 시선을 쉽게 이해하려면 그 유명한 「빨간 머리 앤」이나 「해리 포터」 시리즈의 위즐리 가족을 향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해보라.

앤이 길버트의 '뚝배기'를 깬 데는 붉은머리의 역사가 있기 때문.
앤이 길버트의 '뚝배기'를 깬 데는 붉은머리의 역사가 있기 때문.

이렇게 천대와 괄시 속에서 역사를 이어온 인종인데, 그와중에 붉은머리가 특징인 인기 캐릭터들을 다른 인종으로 교체하는 꼴을 보고 있으니 반발이 없을 리가. 영화계의 행보에 '문화에서 진저를 지워버리려는 속셈 아니냐'는 다소 과격한 반응까지 나온 원인을 단순히 '블랙워싱에 대한 반발'로만 봐선 안되는 이유다.


물론 이같은 인종 교체에도 분명 훌륭한 재해석으로 돌아온 캐릭터도 많다. <데드풀 2>의 파이어피스트(줄리안 데니슨)나 <더 배트맨> 제임스 고든(제프리 라이트),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헤임달(이드리스 엘바) 등이 기존의 스테레오 타입을 타파하고 시대에 알맞게 재탄생한 사례이다.

1984년 영화 〈듄〉의 글로수 라반 (왼쪽), 2021년 〈듄〉라반 하코넨
1984년 영화 〈듄〉의 글로수 라반 (왼쪽), 2021년 〈듄〉라반 하코넨

 

​또 이런 형국과 정반대로 진심으로 붉은머리 편견 타파를 위해 진저 지우기를 한 사례도 있다. 드니 빌뇌브와 <듄>의 제작진은 하코넨 가문 캐릭터들에게 붉은머리란 요소를 없앴다. 하코넨 가문은 모두 붉은머리라는 묘사가 원작에 있으나, 영화 구조상 악역일 수밖에 없는 캐릭터들을 붉은머리로 묘사하는 건 편견을 강화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현실을 위해 원작 재현을 과감하게 포기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대중이 인식할 만큼 많은 캐릭터가 인종 변경으로 기존의 특색을 잃은 건 단순히 시대의 흐름이라고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것도 PC라는 명목 하에 대중이 사랑한 캐릭터를 애매모호하게 재해석하는 건 어떤 의미에서 팬들에게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행태일 수 있다.

요컨대 진정한 PC라면, 어째서 <알라딘>으로 일약 스타가 된 메나 마수드가 그 후에도 악역 제안이 많이 들어온다고 하는지부터 돌아봐야 한다. 기존의 인기 많은 캐릭터를 변경해 새로운 스타를 만들어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서 인기를 모으는 것이 우선이다. 너드들이 알고, 매니아들이 알고, 소비자들이 아는 것을 생산자들이 모르진 않을 것이다. 아마도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일 테다. 모두가 그렇게 느끼고 있으니, 이렇게 호불호가 갈리는 일론 머스크의 의도된 쇼조차 이렇게 환호받는 것 아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