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날, 낯선 사람들이 나타나 당신이 믿고 있는 모든 것이 거짓이고 지금 함께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들이 당신의 과거를 ‘옳지 못하다’고 부정하고 당신의 생각이 ‘틀렸다’고 비난한다면 어떻겠는가.
필자는 간혹 ‘나의 믿음이 사실은 잘못된 것이지 않을까’하는 밑도 끝도 없는 상상을 시작한다. 영화 <트루먼쇼>(1998)가 이 같은 킬링 타임용 ‘만약에’ 놀이에 힘을 더해주었다. 이 허구의 상황에서 필자는 늘 공포에 휩싸여 현실로 도피한다. 그런데 여기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맞이한 이가 있다. <러브 달바>의 12살 소녀 달바다. 여느 아이들보다 험난한 사춘기를 겪을 수밖에 없는, 하지만 반드시 지나야 하는 달바의 시간을 함께 해보았다.
*이하 <러브 달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달바의 집에 낯선 이들이 찾아오고 그들은 달바와 함께하던 성인 남성 자크를 제압한다. 달바는 그의 이름 ‘자크’를 부르짖으며 격렬하게 저항하지만 그들의 손에 남자와 헤어지게 된다. 애틋한 연인으로 보이는 자크와 달바는 사실 부녀 관계로, 자크는 이혼한 아내 몰래 달바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떠돌며 달바에게 성적 학대를 일삼았다. 이웃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이 달바의 아버지를 체포하고 달바는 그렇게 쉼터로 거처를 옮긴다.
영화에는 세 종류의 어른이 등장한다. 가해자, 지지자, 방관자의 형태이다.
가해자인 아버지 자크는 안타깝게도 달바가 만난 첫 어른이자 가장 가까운 어른이다. 하지만 영화는 가해자와 그의 범죄에 대해 주목하지 않는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물리적으로 분리하는 모습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며 ‘중요한 것은 피해 이후 아동의 회복’이라는 점을 전제한다. 관객이 볼 수 있는 자크의 유일한 모습은 수감된 채 볼품없이 나약한 범죄자일 뿐이다.
달바가 직면한 위기는 피해 사실에서 오지 않는다. 오히려 피해 사실을 모른다는 점이 그가 해결해야 할 첫 번째 관문이다. 여기에서 친족 성폭행을 당한 아동 피해자가 가진 특수성이 드러난다. 달바는 자신이 범죄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겨우 5살의 나이부터 약 7년간 아버지에 의해 왜곡된 인식을 가지게 된 달바는 나아지기 위해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만 한다.
한껏 드레스 업한 12살의 소녀는 구치소에서 만난 연인이자 아버지 자크와 재회한다. 두툼한 패딩을 급하게 벗어던지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려 한다. 그러고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려는 듯 “(다들) 아빠가 소아성애자래”라며 질문 아닌 질문을 한다. 이어 “사실이다”라는 자크의 대답에 달바는 놀랍게도 동행한 어른(지지자)를 탓한다. 더 이상 자크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달바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자신이 선택이기에 문제가 없다고 굳게 믿는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를 사랑한다. ‘사랑’에 대해 달바와 상담사가 논쟁을 나누는 장면에서 달바는 자못 어른스럽게 논리를 펼친다. 달바는 “아빠와 딸은 사랑하면 안 되냐"라고 따져 묻고 상담사는 “그건 굉장히 복잡한 문제”라며 “사랑을 하는 것과 사랑을 나누는 것은 다르다”고 우회적으로 답한다. 하지만 이어 “사랑을 하면 사랑을 나눌 줄도 알아야 한다”는 달바의 반박은 말문을 막히게 한다. 아직 온전한 가치관이 구축되지 못한 달바의 입장에서 자신을 보호하겠다고 나서는 어른들이 제공하는 답변은 멍청하게 들릴 뿐이다.

한편, 영화는 쉼터 특수 교사 제이든을 통해 성숙한 지지자로서의 길을 제시한다. 달바가 그토록 원하는 뜨거운 사랑이 아닌 확고한 신념과 미지근한 인정(人情)으로 말이다. 높게 틀어 올린 헤어스타일과 붉게 바른 립스틱, 노출이 심한 드레스 등 달바가 12살 소녀 같지 않은 모습을 고집하며 “난 여자애가 아니라 여자”라며 스스로를 정의할 때 제이든은 동요하지 않고 “넌 여자가 아니라 어린애”라 강조한다.
이처럼 제이든의 단호한 언행은 때로는 매정해 보인다. 하지만 달바에게 진짜 어른이 필요한 순간 그의 곁에 있는 이는 결국 제이든이다. 제이든은 달바가 반복적으로 가출하면 그를 찾으러 가고, 나이에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 새 옷을 사준다. 뿐만 아니라 동급생과 다투어 학교에서 쫓겨날 위기에 있을 때는 적극적으로 항변하고 파티에서 불순하게 달바에게 접근하는 남자아이를 제지한다. 제이든은 달바가 평범한 일상을 살 수 있도록 한결같은 태도로 달바와 함께하며 극 중 신뢰를 잃은 어른의 위상을 지켜낸다.

동시에 달바의 상처에 무심한 방관자형 어른도 있다. 쉼터에 머물며 새로운 학교를 다니게 된 달바는 동급생의 도발에 폭력을 휘두른다. 이에 학교장은 달바에 대해 “왜 특수 학교에 보내지 않느냐?”며 소외된 아동을 ‘특수한 존재’로 여기며 거리를 두고자 한다. 이에 제이든은 “언제쯤 여러분 사회에 받아들여 주실 거냐?”고 따지듯 묻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영화는 관객에게 진정한 어른에 대해 묻는다. “당신이 달바를 마주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러브 달바>의 원제는 <Love According to Dalva>. 비뚤어진 사랑의 대상이었던 달바는 지독한 성장통을 앓고는 주체적으로 사랑을 나누게 된다. 쉼터를 떠나는 친구 사미아에게 먼저 다가가 진한 포옹을 건네고, 자신을 지키고자 용기를 낸 엄마의 손을 먼저 잡는다. 그제야 달바는 ‘사랑을 나눈다’는 것의 진짜 의미를 깨달았을 것이다.

<러브 달바>의 연출 엠마뉴엘 니코트 감독과 달바 역의 젤다 샘슨은 이 작품으로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치렀다. 단편 <래>(2012)와 <스내치드>(2016)로 실력을 인정받은 엠마뉴엘 니코트는 <러브 달바>의 시나리오에만 약 4년을 매달렸다. 그리고 약 5000개의 지원서 중 그의 눈을 사로잡은 젤다 샘슨을 달바로 낙점했다. 연기 경험이 전무한 젤다 샘슨을 복잡다단한 심리 묘사를 해내야 하는 달바 역에 캐스팅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젤다 샘슨의 성숙함과 자신감 그리고 시네마틱한 얼굴에 매료되었다는 엠마뉴엘 니코트 감독의 직관이 통한 것이다. 젤다 샘슨은 ‘달바’ 그 자체가 되어 달바의 어설픔과 혼란스러움을 완벽히 담아냈다. 이후 제75회 칸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 라이징스타상을 수상한 그는 “<러브 달바>를 통해 나도 몰랐던 ‘나’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며 연기를 통해 한층 성숙해졌음을 시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