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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 팬들을 위한 추석 연휴 연극 추천, 〈굿모닝 홍콩〉! 우리는 모두 장국영의 시대를 살았다.

주성철편집장
〈굿모닝 홍콩〉
〈굿모닝 홍콩〉

 

우리 모두 ‘장국영의 시대’를 살았다고 이야기해보면 어떨까. 떠나버린 장국영처럼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바로 그 홍콩영화의 전성기가 있었다. 때는 1987년, 5월 23일 개봉한 <영웅본색>과 같은 해 12월 25일 개봉한 <천녀유혼>으로 한국에서는 거의 신드롬에 가까운 현상이 벌어졌다. 거의 모든 중고교 남학생들은 <영웅본색>의 주윤발처럼 입에 성냥개비를 물고 다녔고 <천녀유혼>의 장국영과 왕조현이 코팅된 책받침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대화에 낄 수 없었다. 거기에 1990년 개봉한 유덕화의 <천장지구>까지 더해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홍콩영화의 화려한 전성시대가 시작됐다. 왕년의 ‘외팔이’ 왕우와 ‘쌍절곤’의 이소룡, 그 뒤를 이었던 강대위와 적룡, 그리고 ‘가화삼보’라 불렸던 성룡과 홍금보와 원표의 영화들과 비교해도 그 인기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특히 1997년 홍콩 반환 정서의 무의식을 드러내듯 홍콩의 야경을 바라보며 버리기 아깝다고 말하던 <영웅본색>은, 주윤발과 장국영을 동아시아를 호령하는 대스타로 발돋움시키며 뒤늦게 등장한 동시대의 ‘현대’ 홍콩영화로 다가왔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 추억은 노래와 함께 자동으로 재생된다. <영웅본색>은 섬세하고도 애절한 장국영의 주제곡 ‘당년정’으로 기억되는데, 그 인기에 힘입어 단숨에 만들어진 속편 <영웅본색2>에서도 역시 장국영의 노래 ‘분향미래일자’가 그 자리를 채웠다. 그처럼 홍콩영화 향수의 대부분은 바로 장국영의 노래다.

 

 

 〈굿모닝 홍콩〉 공연 사진(사진 제공=극단 명작옥수수밭)
〈굿모닝 홍콩〉 공연 사진(사진 제공=극단 명작옥수수밭)

 

연극 <굿모닝 홍콩>이 시작하면, 바로 그 <영웅본색2>가 펼쳐진다. 안타깝게도 위조지폐단 검거 임무를 맡은 경찰 아걸(장국영)이 임무 중 총에 맞아 공중전화박스에서 소마(주윤발)의 품에 안겨 세상을 떠나는 장면을, ‘장사모’(장국영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들이 재연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마도 장국영과 <영웅본색> 시리즈의 팬이라면, 그가 쓰러지며 ‘분향미래일자’가 흐르기 시작할 때 그저 속절없이 눈물이 흘러내리는 명장면이다. 놀랍게도 이 장면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방송인 유재석의 데뷔(?)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아주 오래전 ‘고딩’ 유재석의 첫 방송 출연이 바로 1989년, 당시 KBS에서 일반 고등학생들이 출연해 예능감을 뽐내던 ‘비바! 청춘’이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가 바로 이 장면을 재연하며 이후 KBS ‘대학개그제’를 통해 정식 데뷔하기 전부터 시청자들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찍은 바 있다. 장국영이 없었으면 유재석도 없었다, 라고 말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그렇게 우리는 진정 장국영의 시대를 살았다.

 

무엇보다 장국영의 외모는 ‘컬처 쇼크’나 다름없었다. 과거 홍콩 쇼브라더스를 대표했던 무협영화 감독 장철의 <외팔이> <복수> <철수무정> 등을 썼던 시나리오 작가 예광은 장국영의 미모를 일컬어 미목여화(眉目如畵)라 지칭했다. ‘눈과 눈썹이 그림을 그려놓은 것처럼 아름답다’는 의미로 ‘미인’을 일컫는 최고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장국영은 <굿모닝 홍콩>의 장사모 회원들을 홀린 것처럼 수많은 영화팬들을 매혹시켰다. 그래서 종종 홍콩영화의 추억을 떠올려보면 언제나 장국영보다 주윤발, 유덕화, 주성치를 더 좋아한다고 생각했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좋아했던 거의 모든 홍콩영화에 장국영의 그림자가 비쳐 있었다. 강렬한 액션을 선보이는 이른바 ‘매운맛’ 배우들에 비해 그에 대한 애정을 미뤄두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마치 <동사서독>(1994)의 대사처럼 “잊으려고 할수록 더욱 또렷하게 생각났다”. 말하자면 장국영은 2003년 4월 1일 이후에도 결코 우리를 떠난 적 없다.

 

〈굿모닝 홍콩〉 공연 사진 (사진 제공=극단 명작옥수수밭)
〈굿모닝 홍콩〉 공연 사진 (사진 제공=극단 명작옥수수밭)

 

그즈음 장국영의 사극 의상이 돋보였던 <천녀유혼>도 그야말로 충격적인 작품이었다. 홍콩의 시대극이란 성룡의 코믹 무술영화 <사형도수>나 <취권>처럼 무술을 하거나, 귀신들이 청나라 복장을 걸치고 콩콩 뛰어다니던 강시 영화가 전부인 줄 알았던 당시 팬들에게 이제껏 보지 못한 획기적인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천녀유혼>의 영채신(장국영)은 용감무쌍하게 적들을 물리치고 여자를 구하는 영웅이 아니었다. 싸움이라고는 한 번도 안 해봤을 법한 순진한 이미지에, 위기 때마다 섭소천(왕조현)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당시 왕조현의 인기도 하늘을 찌를 듯했다. 게다가 그 둘의 관계에서 바로, 장국영만의 애칭인 ‘꼬고’가 탄생했다. ‘오빠’를 뜻하는 한자 가가(哥哥)의 광동어 발음으로, ‘꺼거’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꼬고’가 더 귀엽게 들린다. 홍콩 사람들에게 꼬고는 젊고 친근한 남자 혹은 사춘기 때 짝사랑했을 법한 이웃집 미소년, 더 나아가 순정만화의 근사한 왕자님 같은 뜻이다. <천녀유혼>을 촬영할 당시, 얼핏 또래처럼 보이지만 왕조현이 무려 11살이나 많은 장국영에게 ‘꼬고’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

 

2011년에는 고천락, 유역비, 여소군 주연으로 엽위신 감독이 각색한 리메이크작 <천녀유혼>이 개봉했다. 사실상 아시아에서 장국영에게 미모로 필적할 배우가 없기에, 1987년작과 유사하게 리메이크한다는 것은 너무 무모한 일이었다. 그래서 엽위신은 여소군이 연기하는 영채신의 비중을 대폭 축소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개봉 당시 엽위신 감독을 인터뷰한 적 있는데 “장국영의 영채신을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굳이 도전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영채신으로 캐스팅된 여소군도 자신이 장국영을 연기한다는 생각에 스트레스가 굉장히 컸는데, 주인공이 아니니까 안심하라고 말했다”라는 게 그의 얘기였다. 더불어 “장국영은 여전히 홍콩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남아 있다. 새로운 <천녀유혼>이 마음에 들거나 안 들거나 그건 관객들의 자유다. 하지만 나는 장국영을 떠올리며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무한한 영광이다”라며, 영화의 마지막에 ‘장국영을 그리며’라는 자막과 함께 장국영의 과거 주제곡 원곡이 흘러나오게 했다.

 

〈굿모닝 홍콩〉의 〈영웅본색〉 오마주 포스터(사진 제공=국립정동극장)
〈굿모닝 홍콩〉의 〈영웅본색〉 오마주 포스터(사진 제공=국립정동극장)
〈굿모닝 홍콩〉의 〈천녀유혼〉 오마주 포스터(사진 제공=국립정동극장)
〈굿모닝 홍콩〉의 〈천녀유혼〉 오마주 포스터(사진 제공=국립정동극장)

 

<굿모닝 홍콩>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부터 장국영의 노래 ‘풍계속취’가 흘러나오고, 막이 바뀔 때마다 역시 장국영의 노래 ‘모니카’가 귀를 채우면서 <굿모닝 홍콩>을 보는 내내 행복할 테지만, 연극에서 가장 압권인 장면을 꼽으라면 장사모 회원들이 바로 그 <천녀유혼>을 재연하는 장면이다. <천녀유혼>의 클라이맥스인 연적하와 흑산대왕의 대결이 그야말로 블록버스터급(!)으로 펼쳐지는데, 퇴마사인 연적하의 ‘뽀로뽀로미(반야바라밀)!’이라는 주문과 ‘광복혁명, 시대혁명!’을 외치는 시위대의 물결이 하나로 만날 때, 홍콩영화는 물론 홍콩 그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온몸에 전율이 일 정도로 굉장한 감동을 받았다. 배우들의 귀여움과 상황의 절박함 사이에서 무대와 객석이 마치 하나가 되는 것 같은 감흥을 느낄 것이다. 단순한 향수의 환기 이상으로 영화와 현실, 그리고 추억과 현실이 이처럼 근사하고도 날카롭게 맞물리는 풍경의 상상력이 실로 놀라웠다. 아무런 접점이 없어 보이는 장국영의 ‘월량대표아적심’과 우리의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이 만나는 풍경은 또 어떤가. 우산혁명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홍콩의 민중과 그저 장국영의 흔적을 찾기 위해 홍콩으로 떠난 영화팬들이 그렇게 장국영이라는 이름으로 만난다.

 

 

〈굿모닝 홍콩〉 공연 사진(사진 제공=극단 명작옥수수밭)
〈굿모닝 홍콩〉 공연 사진(사진 제공=극단 명작옥수수밭)

 

2019년 8월 23일, 정확히 30년 전인 1989년 ‘발트의 길’을 본받아 연극에서도 상세히 묘사되는 범죄인인도법안(송환법)에 반대하며, 13만여 명의 홍콩 시민들이 시내에서 사자산 정상에 이르는 인간 띠를 이어 장장 60킬로미터에 달하는 ‘홍콩의 길’을 만들었다. 발트의 길은 1989년 8월 23일, 당시 발트 3국의 시민 200만여 명이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서 라트비아 수도 리가를 거쳐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 이르는 총길이 678킬로미터를 인간 띠로 연결했던 길을 말한다. 당시 소련의 점령하에 있던 발트 3국이 독립에 대한 열망을 세계 각국에 보여주기 위해 계획했던 것으로, 시위 7개월 만에 리투아니아는 소련의 공화국 중 처음으로 독립을 선언하기도 했다. 그처럼 발트의 길은 세계역사상 가장 대중적이고 창의적인 비폭력 운동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로부터 30년의 세월이 흘러, 홍콩 사자산 정상에도 ‘FREE HK’라는 불빛이 빛난 것이다. 혹시 장국영이 살아있었다면 그 홍콩의 길에 동참했을까. 아마도 <굿모닝 홍콩>을 본 사람들이라면 분명한 답을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