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넷플릭스에 2022년 공개된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는 게임 소재 영상물치고는 꽤 독특한 작품이었다. 일본의 저명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전격 제작에 참여했다는 점도 그렇지만, 원작이 되는 게임인 「사이버펑크 2077」의 출시 초반 평가가 참담할 만큼 혹평이었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말하자면 참 길지만, 「사이버펑크 2077」은 개발진의 노력과 꾸준한 패치 및 DLC(확장팩 개념)로 인해 평가 반전에 성공했으며 출시 2년 후 애니메이션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는 보란 듯이 흥행에 성공한다. 애니메이션의 성공에 힘입어 게임 역시 판매고가 증가하는 등 수혜를 입었으니, 여러모로 서로에게 힘이 된 사례라고 볼 수도 있겠다.

게임이 정상화되면서 호평을 받고, 애니메이션도 좋은 평가를 받게 되자 많은 팬들이 속편(혹은 2기) 제작을 원해 왔는데, 최근 언급에 따르면 <사이버펑크: 엣지러너>의 2편 형태는 아니지만 일종의 스핀오프 격으로 또 다른 애니메이션이 고려되고 있다고 한다. 확정된 계획은 없는 것처럼 보이긴 해도, 고대하던 소식이기에 이참에 이 애니메이션의 우여곡절을 짚어 본다.
<사이버펑크: 엣지러너>가 제작을 확정한 건 2020년이었다. 공개된 해가 2022년이었으므로 게임이 출시되기 2년 전에 애니메이션 제작이 시작된 셈인데, 아마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글로벌 기대작이었던 이 게임이 그런 모습으로 나타날 줄이야.

「사이버펑크」는 테이블에 둘러 앉아 카드와 룰북으로 하는 게임(빅뱅이론의 주인공들이 하던 그것이다) 장르인 TRPG에서 출발한 시리즈다. 마이크 폰드스미스가 제작하고 1988년에 처음 출시된 이 시리즈는 SF의 한 갈래인 사이버펑크를 잘 담아냈다 호평받아 쭉 이어져 왔고, 2013년 1월에 이 TRPG를 토대로 한 비디오 게임 출시 소식이 발표된다. 이후 2018년에는 플레이 영상을 공개했고 2019년에는 배우 키아누 리브스가 참여한 시네마틱 영상이 공개되며 특유의 분위기가 잘 녹아 있는 비주얼로 호평을 받는다.
높아진 기대감은 그대로 판매고가 되었다. 「사이버펑크 2077」(CDPR 개발)은 당초 4월이었던 발매 예정일을 3차례에 거쳐 연기한 끝에 12월이 되어서야 출시했음에도 같은 제작사의 전작 「더 위쳐 3: 와일드 헌트」의 출시 전 예약 구매량보다 훨씬 높은 기록인 800만 장을 달성한다. 하지만 출시 1주일 만에 모든 플랫폼의 전액 환불이 진행되는 수모를 겪는다. 문제는 실제 게임 내용에 비해 지나치게 부풀려진 마케팅, 플랫폼의 성능에 최적화되지 않고 게임 곳곳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버그로 진행이 불가한 수준이었다.

2013년에 첫 티저를 공개하고 장장 8년간 화려한 마케팅을 해 왔지만, 실제 게임의 내용은 홍보 문구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뭐든지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오픈월드라고 했지만 갈 수 있는 곳도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았고, 버그 때문에 중요한 시점에 진행이 전혀 되지 않아 엔딩을 보기는 커녕 플레이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었다. 환불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이렇게 출시하자마자 혹평으로 가득 찬 게임의 평가 덕분에, 애니메이션의 향방도 애매한 듯 보였다.
하지만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는 원작이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묻힐 수 없는 애니메이션이었다.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기 때문인데, 제작사인 트리거는 가이낙스(<신세기 에반게리온> 시리즈 제작사)로부터 독립한 연출가와 PD에 의해 세워진 회사로, <천원돌파 그렌라간>과 <팬티&스타킹 with 가터벨트>, <킬라킬> 등 화려하고 독특한 애니메이션을 제작해 왔다.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는 2011년 설립한 '트리거'의 10주년 기념작이 될 예정이었고 그래서 회사 차원에서 신경을 많이 쓸 거라는 건 분명했다.

이 때문인지 스튜디오의 설립자이자, 대표작의 연출 및 콘티에 참여해 왔던 베테랑인 이마이시 히로유키와 오오츠카 마사히코가 각각 감독과 연출로 참여했다. 말하자면 회사 대표님이 실무진으로 들어온 셈(실무자 입장에선 생각만 해도 부담스럽다). 그래서 이 애니메이션의 질적 결과는 상당히 기대해 볼 법 했다. 하지만 문제는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원작 게임이었다. 누가 알았겠는가, 그렇게 장기간 마케팅을 하며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던 게임이 플레이할 수 없는 상태로 출시돼 조롱받게 될 줄은.
어쨌든, 딱히 애니메이션 때문이 아니라 CDPR로서도 무너진 신뢰 회복이 필요했을 것이므로... 이들은 대규모 환불 사태에도 포기하지 않고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했으며 수차례 대규모 패치를 진행했다. 덕분에 출시 2년만(...)인 2022년에 진행한 1.5 버전 패치로 드디어 제법 할만한 게임이 되었다. 그리고 '이젠 할 만해졌다'라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한 직후 공개된 애니메이션이 성공하자, 원래 계획대로라면 반대여야 했을지도 모를 홍보 효과 덕분에 역으로 게임의 판매고를 다시금 끌어올리는 원동력이 되었다.
원작의 나쁜 평가를 반전시킬 만큼 애니메이션은 시각적으로도, 연출 면에서도, 스토리와 캐릭터 면에서도 좋은 평을 받았다. 리얼 3D 그래픽을 구현한 게임과 달리 2D 애니메이션인 이상 비주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도 세계관 특유의 분위기가 잘 녹아 있으며, 점점 광기가 흐르기 시작하는 후반부로 갈수록 사이버펑크가 유구히 다루어 왔던 인간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까지 한다. 어쩌면 명불허전이란 말이 어울리는 퀄리티.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는 완전히 비현실적인 세계관에서 제법 현실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현대사회가 거진 혹은 곧 직면하게 될 다양한 문제에 대해 물음표를 던진다. 명석한 두뇌와 재능을 가지고도 정상적인 삶을 영유하기에는 너무나 가난했던, 그래서 선택지가 그다지 없었던 주인공의 삶은 그래서 많은 생각이 들게 한다.
주인공인 데이비드 마르티네즈는 제법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지독하게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불법 영상물을 팔아 근근이 용돈 벌이를 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모종의 사고로 어머니가 크게 다치고 가난 탓에 보험에 들지 못했다는 이유로 응급치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결국 얼마 못가 숨지고 만다. 데이비드는 어머니가 몰래 숨겨두었던 '산데비스탄' 이라는 특수한 사이버웨어(신체에 이식하는 인공 장기의 일종)를 이식받게 되고, 여기서부터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다.

산데비스탄은 게임 속에서는 반사신경을 극도로 강화시켜주는 아이템으로 등장하는데, 전투 시에 사용하면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느려지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감각이 강화된다는 설정이다. 애니메이션 작중에서 일반 제품보다 성능이 높은 군용 산데비스탄을 장착한 데이비드는 엄청난 전투력을 보여준다. 일반인 기준으로는 하루에 세 번 정도가 한계지만 데이비드는 산데비스탄과 신체조건이 잘 맞아 하루에 거의 10번까지도 사용이 가능했던 것.
애니메이션은 산데비스탄을 장착하고 학교를 그만둔 뒤(사실은 퇴학이지만) 용병단에 들어가 활동하게 된 데이비드의 일대기를 그려나간다. 우여곡절 끝에 데이비드는 대외적으로도 매우 유명해 팬까지 있는 용병으로 성장하고, 이 과정에서 온몸에 사이버웨어를 이식해 완전히 다른 외모를 갖추게 된다.
문제는 사이버웨어를 많이 이식하면 이식할수록 설정상 인간성을 잃어 가게 되는데, 심각해지면 완전히 폭주해 버리게 된다는 것이었다. 작중 데이비드는 처음 등장했던 모습과는 달리 차츰 인간미를 잃어가게 되는데, 직접적인 묘사 대신 대사와 리액션으로 간접적인 묘사를 하고 있어 이 점을 지켜보는 것도 감상 포인트 중 하나다.

편당 20분 내외, 총 10화 분량으로 전체 스펙이 그리 길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은 많은 걸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일반적인 애니메이션치고는 짧은 분량이지만 넷플릭스 작품 조건에 따라 빠른 전개가 된 셈인데, 오히려 그래서인지 트렌드에 잘 맞게 매력적이고 강렬한 장면으로 시작해 확실한 엔딩을 맞는, '굵고 짧은' 콘텐츠가 되어 호평에 일조했다는 느낌. 여기에 게임 유저라면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요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게임을 소재로 한 영상 콘텐츠'가 갖출 수 있는 재미 요소를 폭넓게 가지고 있다는 점도 플러스 요인이 되었다.
이마이시 히로유키 감독 특유의 화려한 색감은 처음 보면 유난스럽다는 생각도 들긴 한다. 하지만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 애니메이션의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상당히 참혹한 액션임에도 어쩐지 비현실적으로 보여서 큰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매력포인트가 된다.
애니메이션의 공개 시점에 맞추어 개발사인 CDPR은 게임에 애니메이션과 관련된 이스터 에그를 몇 가지 추가했는데, 덕분에 게임 속 나이트 시티를 돌아다니다 보면 애니메이션에서 등장했던 주요 장소는 물론이고 작중에 등장하는 물건이나 흔적도 발견할 수 있다.
여러 가지로 우여곡절이 많았고 슬픔도 좀 있었지만, 많은 팬들은 이 애니메이션이 나락으로 갈 뻔했던 게임 「사이버펑크 2077」에게 다시금 기회를 준 작품이라고 말한다. 그 말 그대로 데이비드의 이야기는 여러 사람을 매료시킬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이었는데, 그래서인지 2기를 기다리는 사람도 꽤 많았던 것 같다.

최후가 노골적으로 그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희망찬 가설을 내세우는 사람도 없진 않지만, 어쨌거나 명료하게 끝난 데이비드의 이야기에 2기는 고려되고 있지 않다는 말을 CDPR이 공식적으로 한 만큼 아마도 데이비드와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는 다시 만나보긴 어려울 듯하다. 다만 CDPR은 2기는 계획이 없지만, '사이버펑크'를 주제로 한 새로운 애니메이션 작업은 개발 중에 있다고. 생각해 보면 좋은 평가를 받고 깔끔하게 끝났으니 더 건드리는 게 오히려 좋지 않을 수는 있겠다. 속편 제작에 성공한 사례가 아직도 많지 않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 그렇고….
어쨌거나, 유명한 '뒤통수 게임'이 될 뻔한 「사이버펑크 2077」과 개발사 CDPR에게 새로운 기회를 선사한 데이비드의 노고를 치하하며, 조만간 또 재미있는 콘텐츠 소식이 들려오길 기대해 본다. (그리고 이젠… 게임도 꽤 할만하다. DLC '팬텀 리버티'를 산다는 전제 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