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소니 마키가 연기하는 새로운 캡틴 아메리카 캐릭터가 꽤 멋진 사람이라는 건 인정할 수 있다.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면 나름 매력 있는 남자다. 1대 캡틴이 곤경에 처했을 때 조건 없이 그를 도와주었고, 모든 것을 등져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친구의 편에 섰다. 캡틴이 마지막 선택을 할 때까지 곁에 있었던 친구가 바로 샘 윌슨이었다.
여전히 샘은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가 아니다. 캡틴의 방패를 들었고, 가슴에 (아메리카의 상징) 별을 달고 있지만, 모두가 기억하는 그 캡틴은 아니다. 어쩌면 참 애석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배우 안소니 마키에게는 익숙하지만 그래서 동시에 도전이기도 했을 것이다. 관객들도, 그리고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세계 속 인물들도 '캡틴 아메리카'를 말하면 스티브 로저스를 먼저 떠올릴 테니까.
하지만, 생각해 보면 세대교체에 제대로 성공한 히어로는 샘뿐이다. 1대 캡틴이 무엇에 가치를 두고 행동하는지 알고 있었고 거기에 동의했으며, 그의 가장 든든한 동료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식으로 캡틴의 상징인 방패를 본인으로부터 전달 받았다는 점이 크다. 돌이켜 보면 수많은 신규 히어로 중에 이만큼 정식으로 이름을 계승한 케이스는 없으니.
그래서 인피니티 사가가 끝난 MCU가 가장 먼저 선보이려 했던 것이 바로 <팔콘과 윈터 솔져>였을 것 같다. 정식으로 세대를 계승한 유일한 히어로가 바로 캡틴 아메리카이기도 했기에. 또 공교롭게도 캡틴의 곁에서 그를 가장 많이 돕고 지지해 주었던 두 사람, 샘 윌슨과 버키의 이야기가 가장 덜 다루어졌기 때문에 할 얘기도 많았다.

아무래도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에 주로 등장했기 때문일 텐데, 사이드킥의 운명이랄까. 어쨌거나 '사이드킥 히어로의 전면 등장'과 주역화에 있어서 샘 윌슨만큼 좋은 예시는 없을 것이라 하겠다. 처음에는 비행 안 되는 캡틴 아메리카에게 꼭 필요한 기동력 유닛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3대 캡틴이 되다니..

<팔콘과 윈터 솔져>는 최초 공개 당시부터 화제가 됐었다. 일단 캡틴의 이름을 넘겨받은 팔콘이 어떻게 캡틴으로 거듭나는가에 대한 관심도 있었을 테고, 제모 남작의 재등장을 반기는 사람도 많았다. 물론 '스티브 로저스가 아닌' 캡틴을 인정하기 힘들어 하는 팬들도 많았고(사실 지금도 그럴 테지만) 슈퍼솔져 혈청도 맞지 않은 일반인이 캡틴의 자리를 맡아도 되는지에 대한 의문도 있었다.
일단 전작의 주요한 이야기는 1대 캡틴인 스티브 로저스조차 알지 못했던 슈퍼 솔져와 혈청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돌이켜 보면 윈터 솔져 역시 혈청의 피해자였으므로 관통하는 바가 많았다. 최초의 흑인 슈퍼 솔져였던 아이제아 브래들리는 한국 전쟁에 참전하는 등 활약을 펼쳤으나 전쟁이 끝나자마자 -아마도 이용 가치가 없어졌다고 판단했을지도-30년 동안이나 실험체로 이용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주된 흐름은 슈퍼 솔져 혈청을 둘러싼 음모와 그를 막아내려 하는 두 사람의 고군분투이겠으나, 그려진 적 없는 각자의 개인사도 등장했다. '윈터 솔저' 버키 반스는 늘 그의 뒤를 따라다니던, 하이드라의 꼭두각시로 이용당하던 시절에 죽였던 많은 사람들에 대한 속죄를 시작한다. 그리고 샘은 이제 팔콘이 아닌 샘 윌슨의 삶을 돌아보고, 부담감으로만 다가오던 캡틴 아메리카의 이름을 당당히 목에 걸기 위한 준비를 마친다.

샘의 이야기는 이제 드디어 솔로무비로 제작되는,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로 이어진다. 2022년 코믹콘에서는 부제가 '뉴 월드 오더'로 발표되었으나 최근 제목이 변경되었는데, 고전 명작 소설 중 하나인 「멋진 신세계」의 영문명과 동일한 이름이다. 디스토피아적 미래사회를 그렸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듯.
예고편에서는 해리슨 포드가 새로 캐스팅된 로스 장군이 대통령이 되었고...나아가 레드 헐크도 되었고(...) 화염을 뿌리는 모습이 등장한다. <인크레더블 헐크> 이후 MCU에서 종종 얼굴을 비추긴 했지만 헐크 솔로무비의 가능성이 희박해 도저히 보기 어려울 줄 알았던 레드 헐크, 등장하니 반가운 느낌이기도... 한데 총을 맞는 등 수난도 겪을 듯. 여담이긴 하지만, 예고편 공개 직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이 벌어지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화제가 되기도.

로스에게 총을 쏜 건 다름 아닌 최초의 흑인 슈퍼 솔져 아이제아 브래들리인데, 그는 정황상 서펀트 소사이어티에 의해 세뇌당했던 것으로 보이며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갇혀 있는 자신을 찾아온 샘에게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브래들리가 샘을 '캡(Cap)'이라고 부른다는 점이 좀 인상적이었달까.

돌이켜 보면 MCU의 전체 영화 라인업 중에 가장 현실적이고, 스릴러물에 가까운 시리즈가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였다. 여전히 명작으로 꼽히는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의 수많은 씬이 팬들에게 기억될 수 있었던 건 전체 구성이 쫀쫀하고 탄력적이었기 때문일 터. 아직도 캡틴의 엘리베이터 전투는 잊기가 어렵다. 이 영화가 그런 인상적인 액션을 보여줄 수 있을까? 일단 예고편에서는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보이지만.
외신에 의하면 영화는 이미 디즈니 내부에서 시사회를 거쳤는데 반응이 좋지 않았고, 이 때문에 여러 번 재촬영을 거듭했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의 디즈니는 제법 보는 눈이 없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디즈니 내부에서 부정적인 의견이 더 많았다면 재밌는 영화 아니겠느냐는 말을 하고 있는 중. 뭐, 진짜로 그럴지도 모른다.

시리즈가 쭉 지켜 왔던 첩보물스러운 쫀쫀함과 긴장감을 아주 오랜만에, MCU 영화를 통해 스크린에서 다시 볼 수 있길 바라며. 윈터 솔져가 카메오 수준으로만 나온다는 건 좀 아쉽지만, 팔콘이 아니라 이제는 3대 캡틴 아메리카인 샘 윌슨의 도약을 다시 한번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