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경을 담은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웰메이드 독립영화 한 편이 10월 23일 관객을 맞을 채비를 마쳤다. 하이틴스타 설이(한소희)와 운명처럼 가까워진 배우 지망생 친구 수안(한해인)이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해 엇갈렸던 어린 시절을 지나, 다시 서로를 찾아가는 한겨울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영화 <폭설>(감독 윤수익)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눈부신 청춘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윤수익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 <폭설>은 이미 런던, 로마, 함부르크, 홍콩 등 전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되며 뜨거운 관심을 입증했다. 폭설이 쏟아지는 동해의 겨울바다에서 서핑하는 두 서퍼의 모습을 보고 <폭설>을 기획한 윤 감독은, 겨울 바닷속 모습, 폭설이 내리는 설산, 명동 밤거리 등 자칫 평범해 보일 수 있는 공간들에 몽환적인 톤을 입히며 영화가 현실과 꿈, 환상 사이를 넘나드는 것처럼 스크린에 그려냈다.
눈빛만으로 수안을 한눈에 반하게 만드는 하이틴스타 설이 역에는 한소희 배우가 분해 첫 스크린 도전에 나섰다. 여기에 단편영화 <모모>(2106)로 데뷔해 차근차근 필모그래피를 쌓으며 최근작 <나의 피투성이 연인>(감독 유지영, 2023)에서 뜻하지 않은 임신을 한 비혼주의 작가 역할을 맡아 섬세한 연기로 호평을 이끌어낸 ‘독립영화계의 숨은 보석’ 한해인 배우가 수안 역을 맡았다.
“<폭설>은 그 추운 겨울 바다에서 그보다 더 뜨거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찍은 영화”라는, “이제는 폭설이 내릴 때마다 눈, 겨울, 동화 같은 것들이 떠오르는 말랑말랑한 감정에서, 그 차가운 것들 안에 그보다 더 뜨거운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하는, 그러면서 “수안이와 설이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를 상상하곤 한다”라고 말하며 수줍은 미소 속에 단단함이 비치는 한해인 배우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개봉 앞둔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떨리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긴장도 되고,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있는 거 같아요.(웃음)
영화 출연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또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도요.
출연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시나리오를 읽어 봤을 때, 이 영화의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정서가 자연과 맞닿아 있는 지점이 아름답다 느껴졌기 때문이에요. 두 인물이 서로 강하게 연결돼있는 지점, 뭔가 세상에 두 사람만 존재하는 것 같은 이야기처럼 연결돼 있는 것이 마음에 끌렸죠.
시나리오에서 인물의 힘이 굉장히 강한 이야기로 느꼈던 거 같아요. 뭔가 큰 상황이 먼저 던져지고, 그 안에서 인물이 따라가는 게 아니라, 인물이 먼저 움직이고 상황이 따라가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거든요. 인물들이 어딘가 억압돼 있기도 하고, 연약해 보이기도 하는데, 또 어떤 지점에서는 되게 강인하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분명히 억압돼 있는 본인의 상황 속에서도 주체적으로 느껴지게 하는 지점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조금 실례가 되는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만, ‘예쁜’ 여배우신데(!), ‘수안’ 캐릭터는 초반에 너무 ‘선머스마’ 같기도 하잖아요. 게다가 한소희 배우와 투톱이기도 하고요. 처음 캐스팅 제안을 받고 어떤 기분이었나 궁금해요.
저는 스스로가 외모가 돋보이는 배우라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에.(웃음) 수안이 영화 초반 학창 시절에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 뭔가 본인이 가진 남성성을 강조하고 싶어서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느끼지는 않았어요. 헤어스타일도 마찬가지고요. 수안은 그냥 그런 경계 자체가 없는 사람이구나 하고 더 느꼈던 거 같아요. 여성적인 모습과 남성적인 모습을 구분하는 데 있어서, 수안에게는 그런 게 아예 존재하지 않은 거죠.
뭔가 수안 안에 뜨거운 불꽃 같은 게 있는데,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본인이 편한 방식을 선택한 게 그런 모습으로 나타났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성적인 부분에서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행하고 선택했던 부분은 아니라고 느껴서, 수안 안에서 그 틀이 깨져 있는 지점들이 개인적으로는 좀 해방감을 느끼게 했던 거 같습니다.
수안이 처음 등장하는 체육관 씬이 강렬합니다. 거의 원맨쇼 수준인데요.(웃음) 어떻게 준비했는지 설명해주세요.
일단 저의 자전적인 욕심도 있었는데요.(웃음) 어렸을 때 햄릿 역할을 너무 해보고 싶었어요. 햄릿은 남자 역할이니 저는 오필리어를 했었거든요. 그런데 수안은 그런 인식에 대한 틀이 없는 캐릭터잖아요. 윤수익 감독님이 수안 첫 등장 씬에서 연극을 할 거라고 말씀하시길래, 제가 햄릿을 제안 드렸어요.
그 장면에서 감독님이 의도하셨던 게 있어요. 수안이 뭔가 친구들하고도 잘 어울리지 못하고, 이런저런 불만들을 연기를 방어벽 삼아서 터트리는 거였죠. 저는 햄릿 대사를 좀 섞어서 그런 장면들을 표현해봐야겠다고 생각했고요. 햄릿의 대사이긴 하지만, 햄릿의 내면을 표현한 게 아니라, 수안이 친구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하는 감정으로 표현했습니다.(웃음)

한해인 배우는 어린 시절 못 해봤던 햄릿 역할인데, 영화에서 수안으로 대신해보니 어떠셨어요?(웃음)
좋았어요.(웃음) 아, 맞아. 내가 이런 걸 해보고 싶었는데!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런데 지금 돌아보니, 좀 더 나답게 햄릿을 연기해 볼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웃음) 그래도 영화에서의 연기가 수안의 어린 시절과 더 어울렸을 거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화 초반에 수안은 조금 수동적인 캐릭터처럼 보여요. 그런데 설이를 만나면서 바뀝니다. 설이가 하자는 건 다 해요. 수업도 빠지고, 운전해서 명동까지 가죠. 그런데 키스 장면에서 처음으로 수동적이었던 수안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죠. ‘이건 아닌 것 같다’고요. 이 장면에 오기까지 어떻게 수안을 분석하고 연기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수안이 처음부터 설이에 대해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수안은 그 감정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거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처음에 설이를 거부한 건, ‘정말 이건 아니야!’라고 생각했다기보다, 그런 것에 대해 아무 생각도 안 해본 사람이라고 할까요? ‘순수’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단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의 수안은 너무 순수했다고 해야 할까요?
그 순간에 드는 묘한 긴장감을 수안 스스로 받아내거나 인정할 상태가 아니라고 느꼈던 거 같아요. 그래서 당혹스러웠던 거죠. ‘아, 내가 설이를 어떻게 대해야지 좋을까’ 라기보다 자신이 이 감정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본인 스스로 구축이 돼있지 않다 보니, 설이에게 그런 식으로 행동했던 거죠. 그래서 수안이는 후회했을 거라고 느꼈어요.
설이가 “누가 봐도 멜로영화잖아!”라고 했을 때, ‘아, 맞아. 너무 두근거리잖아’라고 말해야 했는데, ‘아, 정말 키스해도 되는 걸까’ 하는 마음이 더 커서 밀어낸 거죠. 그렇게 밀어냄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더 잘 알게 됐다고 생각해요. ‘나도 멜로영화라고 말할걸’, ‘다시 말할 수 있을 거 같은데’ 하는 그런 어떤 후회와 아쉬움? 그렇게 하고 싶었던 말을 전하고 싶다는 간절함으로 연결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원래 수안은 어떤 인물이었다고 생각했나요? 생각한 전사가 있었는지도 궁금해요.
전사를 드러내는 장면이 거의 없죠. 엄마랑 통화하는 장면 잠깐 나오긴 해요. 학창 시절 설이의 전화를 받는 장면도 있긴 하고요. 그런데 가족 장면은 전혀 없어요. 이 아이에게 분명히 가족이 존재했겠지만, 혼자 지내는 것 같은? 그런 시간이 굉장히 길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거기서 뭔가 모르게 사회나 자기 삶에 대한 불만 같은 게 있었을 수도 있고요.
그게 학창 시절에는 뭔가 치기 어린 마음에 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스타일이었지만, 설이라는 인물을 만남으로써 또 하나의 세계를 만나게 된 거죠. 그때 수안이 설이를 통해 느끼는 감정이 너무나 다양한 색깔이고 깊어서, 수안이 정의를 내리기에는 어려운 감정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미성숙한 말과 태도로 설이를 상처 주게 되고, 그 시간을 겪으면서 엄청나게 후회, 자책하는 시간이 계속 풀리지 않고 남아 있었던 거죠.
성인이 돼서 배우 활동을 하면서도 그런 감정은 풀리지 않아요. 당당하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갔으면 그런 지점들도 조금은 옅어졌을 텐데 말이에요. 배우로 살아가며 연기를 하는데, 그것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계속 뭔가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무의식적으로 쌓여 있었을 거 같아요. 그래서 설이라는 인물이 수안에게 더 간절하지 않았을까요?
설이가 예전에 느꼈던 불안이라든가 어려운 감정을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뒤늦게 이해하면서 계속 후회는 반복되죠. 뭔가 계속해서 겹겹이 쌓여 있는? 수안은 어쩌면 스스로 그 억압들을 쌓아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왜냐면 그걸 깨고 싶어서요. 그런데 강하게 느껴져야만 깨고 싶고, 나아가고 싶은 용기가 생기잖아요. 자기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방금 말씀하신 부분에서 수안이 설이를 사랑한다는 마음을 인정하는, 결정적 계기가 나오지 않더라고요. 고교 시절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생략돼 있어서 그럴 수도 있는데요. 성 정체성에 대한 각성까지는 아니어도, 변화하는 계기랄까 그런 것들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더라고요.
음, 그렇죠.(고민)
질문을 좀 보태서요. 아직 고등학생인 수안에게 설이는 꿈꾸는 배우로는 탑을 찍은 친구이자 동시에 첫사랑이기도 하죠. 자신만 바라봐주길 바라는데, 지저분한 소문도 돌고요. 거기서 오는 질투나 첫사랑의 혼란함이 뒤섞여서 수안은 어쩌면 설이에 대한 감정을 사랑이 아니라 우정이라 정리했던 건 아닐까요? 나중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확신하고 설이에게 가지만요.
일단은 그렇게 말씀해주신 대로 약간 그런 생각은 했어요. 이 인물의 시간을 어떻게 담아야 할까 고민했을 때, 어떤 명확한 계기가 없었다고 해도 수안이는 계속 설이에게 자극을 끊임없이 받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자기 자신과 너무 밀접하게 연결을 시켜 놓은 인물이었기 때문에요. 그리고 저는 그 지점이 이 둘의 사랑을 좀 더 강하게 연결해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저는 수안이가 하고 있는 사랑이 ‘로맨틱 러브’라는 이름을 벗어나서 더 광범위한 사랑이 됐다고 느꼈어요. 사랑이라는 게 처음에는 이 사람에게 그냥 마냥 되게 좋은, 그런 감정일 수 있지만, 나중에는 계속 자기 자신을 마주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어주는? 물론 자극이 되기도 하고 열등감을 느끼기도 하지만요. 하지만 그 감정들을 통해 이 인물이 결국에는 사랑에 가까운 사랑을 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은? 말이 좀 어렵네요.(웃음)

아닙니다. 이해가 됐습니다.(웃음) 전작 <나의 피투성이 연인>(감독 유지영, 2023)의 ‘재이’는 본인과 닮지 않은 부분이 많아서 연기에 쾌감을 느꼈다고 했는데요. 수안에게 한해인 배우님의 닮은 점이 있었나요? 그렇다면 연기에 어떻게 녹였는지도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하는 일이 비슷하다 보니 개인적으로는 더 닮았다고 느꼈던 부분이 많긴 했어요. 저는 수안이라는 인물의 뿌리는 굉장히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본인 스스로 그걸 발견하지 못하고 계속 헤매면서 다니는 느낌을 받았어요. 꼭 헤매고, 스스로 알아내면서 성장해나가는 방식이, 저랑 좀 닮았다고도 느꼈고요.
전 수안이라는 인물이 하나의 색깔로 규정되는 인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특히나 어떤 답습하는 캐릭터라든지, 캐릭터로서 이 인물이 대상화되거나 혹은 이상화되거나, 혹은 너무 연민의 감정으로 이 캐릭터를 대하거나 이런 지점들을 경계하는 편인데요. 이 영화에서 수안으로 저는 긴 시간 연기를 해야 하기도 했고, 이 긴 시간을 관통하려면 이 인물의 본질을 고민하고 고유성에 집중하는 게 맞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저는 수안의 어떤 한 면모를 강하게 보여줌으로써 이 인물을 드러내기보다는, 이 인물이 내면에 가지고 있는 다양한 색깔들을 시기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하나씩 나오게 하는 연기 방법을 택하려고 생각했는데, 사실 이 지점도 저와 닮아있다고 느꼈어요. 제 안에도 굉장히 다양한 게 있잖아요. 하얀색도 있고, 보라색도 있고 노란색도 있는데, 그걸 명확하게 드러내는 스타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지점에서 저는 수안을 표현하는 데 있어 자유로울 수 있다고 느꼈던 거 같아요.

인터뷰 초반에 <폭설> 시나리오를 읽고 “인물이 가진 정서가 자연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아 아름답다”고 느꼈다고 하셨죠. 영화 촬영하면서는 <폭설>이라는 제목이 어떤 감정으로 다가왔는지 궁금합니다.
시나리오 초고에는 거의 다 눈이 오는 날이었고, 높은 파도가 아니라 태풍 수준이었어요. ‘태풍 오는 날 여자 둘이 태풍을 가로질러 가는 모습’ 같은 지문이 쓰여있었죠. 나중에 수정됐지만요.(웃음) 폭설이 펑펑 오는데 둘만 이동하지 못하죠. 둘은 어쩔 수 없이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폭설로 인해 그 시간을 온전히 즐기게 되는 순간들이 된 거죠. 그런 지점들이 계속 마음을 울렸던 거 같아요. 이미지가 상상이 됐었고요. 되게 연약해 보이는 저 두 사람이, 거대한 자연 속에서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이 인물들 안에 어떤 감정들이 있는 걸까 하는 궁금증도 컸던 거 같아요.
촬영을 마친 지금은, 일단 폭설이 내리면 기분이 더 이상해지는 거 같아요. <폭설>을 찍고 나서 눈, 겨울에 대한 의미가 제 안에서 굉장히 확장됐어요. 원래도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했는데, 이 작업을 통해서 되게 춥고, 되게 시리고, 하지만 이 안에 되게 뜨거운 게 있는, 그런 계절이기도 하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왜냐면 실제로도 양양의 겨울 파도가 서퍼들에게 타기 좋은 파도로 알려져 있어요. 그만큼 힘 있고, 거칠지만, 아름다운 파도가 나타나는 계절이라고 해요. 그런 것처럼 정말로 제 안에 겨울이라는 계절은, 눈 올 때 예쁘고 동화 같고 춥지만 약간 어딘가 말랑말랑한 감정에서 훨씬 더 방대하게 확장이 돼서, 이제는 폭설주의보 뉴스 기사 본다거나, 어딘가에 폭설 내라고 했다는 소식을 듣거나, 제가 그런 환경에 처하면, 수안과 설이는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예전 촬영 기억이 떠오르기도 하고요. 더 깊게 눈에 대해서 느끼는 거 같아요.

<폭설>이라는 제목처럼 한겨울에 그것도 바다에 들어가서 촬영을 하셨죠. 서핑 장면이 많이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추위를 워낙 많이 타는 스타일이어서, <폭설> 촬영이 다른 현장보다 유난히 더 춥다고 느끼지는 못했어요. 제가 까먹은 건지는 모르겠지만.(웃음) 물론 당연히 추웠지만, 오히려 굉장히 뜨겁게 느껴졌달까요? 그 겨울 바다에서 촬영은 굉장히 어렵고 고됐어요. 바다처럼 보이는 수조를 만들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고, 실제 ‘리얼’ 파도 안에 들어가서 촬영해야 했으니까요.
자연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잖아요. 시시각각 조류도 파도도 날씨도 변하기 때문에, 현장에서 최대한 모두가 집중해서 그 장면을 만들어내야만 한다는 그 에너지가 굉장히 중요했어요. 그래서 더 스태프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죠. 어떻게든 서로 소통해보겠다고 잘 들리지 않는 거리에 있을 때 소리 지르고 몸으로 싸인해 가면서요.(웃음) 그런 과정들이 한편으로는 되게 재밌는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뜨거운 사람들이 모여서, 뜨거운 에너지로 이 추운 날 그렇게 만들어낸 영화였다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설이 역의 한소희 배우와 처음 연기하셨는데, 호흡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우선 영화 속에서 말씀드리자면, 3번째 챕터인 ‘바다’에서 수안이 설이가 지내고 있는 카라반을 찾아가 노크해요. 그랬더니 설이가 힘든 모습으로 나와서 “야, 너 왜 이렇게 날 찾아오냐”라고 하죠. 저는 소희가 뱉은 그 대사에서 정말 많은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이게 설이와 수안의 관계를 너무 담고 있는 말이라고 느꼈거든요.
배우로서 느꼈던 점은, 뭔가 거칠면서도 여린 면을 가지고 있는?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자신의 색깔 등에 대해 굉장히 오랜 시간 고민을 해온 친구구나 하는 걸 옆에서 보면서 느꼈던 거 같아요.
기자간담회에서 한소희 배우와 첫 만남에서부터 눈물이 왈칵 났다고 하셨는데, 그건 어떤 이유에서였나요?
방금 말씀드렸던 카라반 대사 리허설 할 때였어요. 그때 그렇게 느꼈죠. 설이 캐스팅 되게 늦게 됐어요. 저 혼자서 작품 준비하던 과정 있었는데, 수안도 이 영화에서 계속 혼자 뭔가 기다리고 있었고요.(웃음) 찾고, 헤매는 과정이 되게 외로운 시간이었다고 느꼈고, 저 스스로도 외로운 시간들을 경험했어야 했는데, 한소희 배우를 만남으로써 그걸 인정받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달까요? 정말 말로 표현하기 좀 어려운데, 저랑 한소희 배우가 정말 수안이와 설이처럼 좀 닮아 있는 부분들이 있다고 느꼈던 거 같아요. 둘이 수안과 설이처럼 어딘가 분명히 다르면서도 또 어딘가 통하는 시너지가 일어나는, 그런 관계 같았어요.

엔딩 장면에서 산장에 고립되는 장면이 몽환적인데요. 그래서 말입니다. 수안과 설이는 어떻게 됐을까요?(웃음)
정말 현실적인 세계에서는 못 만날 수 있다고도 생각해요. 언젠가 다시 만날 수도 있지만요. 엔딩에서 설이와 수안이 함께 보내는 시간은 어쩌면 다른 차원의 시간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전체적인 흐름을 보기도 했어요. 너무 슬프고 아프겠다는 감정이 들었고요. 영화 찍으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지금은 볼 수 없지만, 마음속에서 계속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진짜 존재하는 걸까,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걸까 하는. 그런 차원에서 수안과 설이가 연결돼 있나보다 하고 느꼈던 거 같아요.
수안을 연기하면서, 어린 배우 지망생 한해인을 만나지 않았을까 싶어요. 실제로 그런 시기를 겪어온 배우로 봤을 때도 흥미로운 설정 아니었나 싶고요. 수안을 보면서 본인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나요? 그 시절 한해인은 왜 배우가 되고 싶었나요? 지금까지 어떤 질문을 하면서 살아왔나요?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 공감이 있었죠. 되돌아보면 연기를 접하게 된 건 굉장히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던 거 같아요. 중학생 때 우연히 선생님께서 “연극반 활동해보는 게 어떻겠냐” 하셔서 별생각 없이 들어갔던 연극동아리에서, 뭔가 같은 마음을 모아서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는 데 마음이 굉장히 끌렸어요. 연기를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에 예고에 진학했고, 그때부터 진지하게 배우의 꿈을 꿨죠.
뭔가 제 삶을 연기라는 일, 배우라는 일에 많이 기대면서 살았던 거 같기도 해요. 제 삶에서 좀 공허하다고 느껴지는 것들이라든지, 뭔가 제 안에 밝고, 뭔가 저를 펼쳐내려고 하는 그런 것들에 대해 연기를 하면 할수록 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강했죠. 그런 과정을 지나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습니다.

영화 속 수안은 열심히 파도를 헤치며 나아갔죠. 한해인 배우에게 파도를 헤치며 나아가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요?
저도 모르겠어요.(웃음) 수안이가 파도를 헤쳐 나갈 때 제가 서핑을 배우고, 매일 바다에 입수하면서 서핑을 하면서 느꼈던 지점이랑 비슷할 거 같아요.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잘 모르겠는데, 계속 하고 있더라고요. 연기나 배우의 길에서도 항상 제가 원하는 길을 걸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워요. 그래서 아픈 때도 많았고요. 그런 시간들이 길었지만, 왜 이거를 하고 있을까 생각할 때는 뭔가 명확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이 분명 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 한해인 배우의 앞으로의 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어떻게 제가 이 길을 걸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을 해보면요. 어렸을 때는 막 저를 펼쳐서 보여주고 싶은 에너지도 강했고, 거기서 만족감을 느끼기도 했어요. 요즘 드는 생각은 그런 열망이 더 이상 이 일을 계속하게 만드는 힘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죠. 그렇다면 저는 어떤 걸 기반으로 잡고 갈 수 있을까를 생각했을 때, 저를 위해서, 저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기보다는 정말 낮은 곳에서 있어야겠다 하는 마음이에요. 그 마음이 아니면 이 일을 오래 하진 못할 거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더라고요.
다른 인물을 살아내야 하는 배우로서, 제가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겠다? 이런 그럴듯한 사명감을 붙여서 하는 것도 거짓말 같고요. 이 일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정말 낮은 곳에서 다른 사람들의 모든 마음,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악한 마음부터 가장 선한 마음까지 다 품어낼 수 있는? 그런 마음으로 임해야지만 제가 힘들지 않게 이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해인 배우가 <폭설> 속 수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음(잠시 고민). “네가 하고 싶은 거 해. 너는 너로 존재해도 괜찮아”라는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영화를 볼 관객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폭설>만이 가진 유니크한 매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영화가 영화로 존재하기 위한 지점들을 굉장히 고민한, 도전적인 작품이거든요. 이야기의 힘으로 끌고 나가는 영화라기보다는, 화면 안에 담겨 있는 풍경, 인물, 소리, 음악 그리고 두 인물의 감정 같은 모든 것들이 다 말을 하고 있는 영화라고 할까요? 어떻게 보면 좀 시적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 지점에서 <폭설>은 매우 매력적인 영화고, 그 지점을 아름답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극장에서 봤을 때 그 매력을 더 느낄 수 있고, 감흥을 느낄 수 있는 영화니까요. 극장에서 꼭 봐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