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규 시리즈 라인업에서 이 시리즈를 처음 봤을 때만 해도 기대가 없었다. <완다비전>은 꽤 흥미롭게 보긴 했지만 이미 완다에게 패배하고 능력을 빼앗긴 채 봉인된 마법사가 다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시리즈? 그것도 중년 여성이 주인공인 데다, 얘깃거리가 조금이야 있을 법도 하지만 그게 시리즈 전체를 이끌어 갈 만큼 흥미로울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기대가 없어서였을까, <다 애거사 짓이야>는 디즈니 플러스에서 정말 오랜만에 내놓은 볼 만한 시리즈였다.
좀 재미있는 부분도 있다. 중년 여성인 캐서린 한이 주인공 애거사 역을 연기했고, 대부분의 주인공이 여성인 데다, 메인 빌런도 여성이다. 캐서린 한은 소위 말하는 '히로인 역할의 할리우드 여배우' 스테레오타입과는 거리가 먼 베테랑 연기자고, 동성애가(이야기의 주축이 되진 않지만) 다뤄지고 있다. 즉 소위 PC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꽤 흥미롭다. 중요한 건 그걸 마블 스튜디오가 한 페이즈 내내 해내지 못하다가 드디어 성공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시리즈, <전부 애거사 짓이야>를 통해서.
※ 이하 내용은 <완다비전>과 <전부 애거사 짓이야>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을 포함한다.
<완다비전>에서 스칼렛 위치를 마법사로 각성시킨 장본인이자, 시리즈의 메인 빌런이었던 애거사 하크니스는 아마 <완다비전>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법한 인물이다. 시트콤 분위기로 진행되던 시점에는 완다를 도와주는 이웃 여성으로 등장해 감초 연기를 선보이다가, 중후반에 이르러 점차 정체가 드러나고 후반부에는 완다와의 격전을 치러내는 인물.

돌이켜 보면 <완다비전>의 초반부에 애거사는 그저 뭐랄까, 감초 조연 캐릭터 정도의 존재감이었다. 완다가 이웃과의 연결고리를 갖기 전 유일한 다리 역할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곧 많은 캐릭터들이 무대에 등장했고, 늘 완다의 곁에서 그를 도와주는 듯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고 음모가 밝혀지면서 애거사는 마법사로서의 정체를 드러냈고, 그건 어쩐 다른 MCU 영웅들의 서사에 등장한 메인 빌런보다는 존재감이 얕았다.
그래서 애거사 하크니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솔로 시리즈엔 별다른 기대감이 안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애거사의 캐릭터는 <완다비전>을 본 모두가 기억하겠지만, 과연 시청자들이 굳이 시간을 들여 완다가 나올지 안 나올지도 모르는 조역 캐릭터의 이야기를 시청할 것인가. 솔직히 좀 의문이었다. MCU는 왜 애거사를 메인으로 내세웠을까.

시리즈는 그 질문에 대한 답임과 동시에, 여전히 그들에게 '뭔가 재미있는' 게 남아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다. 서스펜스 스릴러처럼 시작된 1화는 제법 하드보일드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이내 <완다비전> 속 애거사의 행적을 독특한 방식으로 되새기면서, 다시금 돌아온 애거사의 면모를 조금씩 더 강력하게 어필한다.
재밌는 건 애거사는 주인공이고 '그런 일'을 한 데에는 자신만의 이유가 분명히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빌런인 점이다. 시리즈는 매 화 애거사가 그리 좋지 못한 인간임을 보여주는 요소를 하나씩 배치해 뒀다. 형사인데 (아직 유무죄가 확정되지 않은) 용의자를 때려서 정직을 당하는가 하면, 죽게 될 걸 알면서도 뻔뻔한 얼굴로 마녀들을 모으고, 예상과 달리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도 씩 웃으면서 거짓말을 한다.

어찌 보면 상당히 전형적일 수도 있는 설정이다. 수백 년간 살아오며 다른 마녀들의 힘을 빼앗아 온 떠돌이 반골 마녀가 자기보다 더 강한 존재를 만나(심지어 몇백 살이나 어린) 무참히 패배하는 이야기. 하지만 애거사는 보통 마녀가 아니라서(...) 패배해서 기억조차 잃고 결계에 갇혔지만 (그냥 보고 싶어서는 절대 아닌) 그를 찾는 이들에 의해 밖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고, 빌런답게 하던 짓을 또 하려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걸 장장 7화까지 알고 있는 사람은 애거사뿐이었다.

원작 코믹스의 애거사 하크니스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실사화 버전 애거사와는 좀 다른데, 오랜 세월을 살아온 강력한 마법사라는 점은 같지만 첫 등장은 노인이 된 상태였다. 사실 마녀라고는 해도 원작 설정상 수 세기를 살아왔기 때문에 노인이긴 하지만(...). 어쨌든 애거사의 첫 등장은 판타스틱 포의 리더인 리즈 리처드의 아들 프랭클린의 가정교사로서였는데, 1970년의 코믹스 이슈였으니 캐릭터 연식으로 따져도 나이는 꽤 있는 편이다.
드라마와는 달리 아들 니콜라스 스크래치의 계략에 휘말려 마법사 커뮤니티에서 배척당하지만, 진실이 밝혀지고 니콜라스가 추방당한 후 '스칼렛 위치' 완다 막시모프의 마법 교사로 활동하기도 한다. 이 과정이 상당히 비극적이었는데 애거사를 곤경에 빠뜨렸던 주역들이 바로 아들과 손주들인 세일럼 세븐이었기 때문이다.(세일럼은 1692년대 마녀재판으로 유명한 미국 도시이다)

시리즈 마지막에서 애거사가 아들을 위해 했던 행동들과 결말을 돌이켜 본다면 서글픈 일이기는 한데, 원작에서 니콜라스 스크래치가 제법 굉장한 빌런이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우주에는 좋은 일일지도….
스칼렛 위치와의 관계도 재해석된 요소인데, 애거사는 완다가 자신의 쌍둥이 아이들을 만들어 내고 그들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완다를 도왔으며 이후 완다가 곤경에 처하자 어벤져스를 도와 구해주기도 했던 인물이다. 즉 원작에서는 완다와 이래저래 얽혀 있는 관계이긴 하나 애거사만큼은 완다에게 우호적인데, 드라마에서는 확연한 대척 관계로 등장한 셈.

<전부 애거사 짓이야>는 여러모로 <완다비전>과 관계가 깊다. 완다 막시모프와 애거사 하크니스의 관계성과 <완다비전> 이후 3년이 지난 시점의 애거사에 대한 이야기라서이기도 하지만 <완다비전>을 본 사람이라면 반가울 만한 여러 가지 연출과 장면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여전히 작품 연계성 때문에 <완다비전>을 보지 않고 시작한다면 약간 아쉬운 부분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만, MCU판 21세기 마녀 이야기라고 한다면 이 시리즈만으로도 볼거리는 풍성하다.
디즈니 플러스에서 선보인 시리즈들이 글쎄, <완다비전>, <로키>를 제외하고는 <문나이트> 정도가 호평이었고 이외의 작품들은 기대만큼의 재미를 보여주진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안 그래도 많은 OTT 시장에 디즈니 플러스 말고도 볼만한 콘텐츠가 넘쳐나는 요즘 굳이 마블 드라마-그것도 전작을 다 보지 않으면 잘 이해도 안 되는-를 보려는 목적으로 꽤 높은 가격의 구독료를 지불하는 건 좀 손해 보는 장사 같았으니까.

하지만 <전부 애거사 짓이야>는 꽤 흥미로웠다.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에서 갑자기 빌런으로 등장해 <완다비전>의 마지막을 무색한 느낌으로 만들었던 완다 막시모프가 다시금 무대 전면에 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었달까. 완다는 시리즈에 얼굴조차 나오지 않지만 정말 여러 번 언급되고, 우리가 이제까지 본 완다라면 다시 무대 위로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를 결말에 남기고 끝냈다. 솔직히 앞으로의 MCU에 기대보다는 우려가 더 많이 되는 게 사실이지만, <전부 애거사 짓이야>는 그래도 MCU가 디즈니 플러스 독점 시리즈를 통해 만들어 나가려고 했던 연계성의 제법 괜찮은 예시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