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상으로 되살아나는 침묵들
다큐멘터리 <되살아나는 목소리>에서 박수남 감독은 참혹한 조선인 학살을 기억하는 몸을, 지옥 같았던 노동 현장이 아로새겨진 주름을, 그 모든 고통 위로 피폭의 흔적이 끼얹어진 몸으로 가난하게 사는 이들을 담는다. 필름 속, 되살아나는 것이 목소리만은 아니다. 경험을 생생하게 털어놓는 이들도 있지만 필름 속 한 여성은 가슴을 부여잡고 이렇게 말한다. “가슴이 답답해서 할 수가 없어요. 제가 할 말이 많았는데”.
처음에는 펜으로 목소리와 증언들을 기록하고자 한 박수남 감독은 끝내 글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 때론 말없이 떨리는 어깨가, 침묵이, 묻힌 기억과 몸에 새겨진 고통들을 더 강렬하게 증언한다. 감독은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해 끝내 얼굴을 감싸 쥐고 흐느끼는 그 여성을 이렇게 달랜다. “영화가 말 없는 사람의 말을 표현하니까 제가 영화를 만드는 겁니다.”

박수남, 시대를 증언하는 감독
<되살아나는 목소리>의 시작은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박수남이 촬영했던 10만 피트의 16mm 필름이다. 시력을 잃어 가는 재일조선인 2세 다큐멘터리 감독 박수남과 딸 박마의는 필름에 담긴 채 부식되어 가던 영상들을 디지털 복원하기로 한다. 원폭 피해를 당한 뒤 한국에 돌아왔지만 후유증 때문에 시댁에서 쫓겨나야 했던 김분순씨, 강제 징용된 호쇼 탄광에서 갱도가 무너져 동료를 잃었지만 그들의 시신 대신 캐놓은 석탄을 먼저 끌어내야 했던 안용한씨, 군함도에서 매일 설사와 폭력에 시달리며 자살 기도와 포기를 반복했던 서정우씨 등. 200명이 넘는 목소리를 담은 증언 영상 중 일부를 담은 영화는 기록되지 않았다면 영원히 사라졌을 조선인 피해자들의 노동과 일상을 스크린에 불러온다.
영상을 봐도 저는 이 사람이 누군지, 왜 우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어머니는 음성만 듣고도 바로 기억을 하시더라고요. 몇 년도에 태어났는지, 어떻게 일본에 오게 됐는지, 원폭을 맞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도요.
<되살아나는 목소리> 공동 제작자 박마의 감독
펜으로는 담을 수 없는 침묵의 시간을 오롯이 재현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던 박수남은 재일조선인의 상실과 비극적 기억의 아카이브, 그 자체가 된다. 시력을 잃어가는 지금도 목소리만으로 인터뷰이의 태어난 연도까지 기억해 내는 감독은 그들 한 명 한 명을 '또 다른 나'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역사는 재일조선인으로 차별받고 살아온 박수남 감독의 역사와도 겹쳐지기 때문이다.

개인의 상실과 비극은 모두의 상실과 비극
일본에서 태어난 박수남은 본인의 언급대로 '황국 소녀'로, 천황 폐하의 신민으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스스로를 일본인으로 인식했지만 치마저고리를 입은 모친과 거리를 거닐던 중 날아든 돌의 기억과 민족학교를 폐쇄하려던 공권력의 폭력적 경험은 소녀를 민족 정체성에 눈뜨게 했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친북 성향의 재일본인 단체) 계열 기자로 경력을 시작한 박수남은 특히 1958년 '코마츠카와 사건'을 계기로 차별받고 버림받은 삶에 시선을 돌린다. 고등학생 재일교포 2세 이진우가 두 명의 일본 여성의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이 일은 훗날 일본 뉴웨이브를 대표하는 거장 오시마 나기사에 의해 <교사형>(1968)으로 극화되기도 하는 등 일본 사회를 떠뜰썩하게 했던 사건이다. 극빈층이었던 이진우는 청각장애인 어머니를 돌보며 공장일과 학업을 병행했다. IQ 135의 수재로, 우수한 성적을 거뒀지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취업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던 그는 살인자가 되었고, 저명한 지식인들의 감형 청원 또한 이어졌다.
그는 (한국의) 역사도, 말도 모르고 자랐어요. (한)민족으로서의 자존심도 없었어요. 그렇다고 일본인으로 살아갈 수도 없었죠.
<되살아나는 목소리> 박수남 감독
당시 조총련 소속 기자로 일하던 박 감독 역시 사건에 관심을 가졌다. 조선인으로의 정체성을 가질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차별에 직면한 이진우를 조선인 사회가 힘써 구명과 갱생에 나서야 한다는 소신은 둘을 누나 동생처럼 교감하게 했고, 박 감독은 적극적으로 구명에 합류한다.
하지만 당시 북일 관계 악화를 우려한 조총련은 박수남에게 이진우 사건에서 손을 뗄 것을 요구했고, 거절한 그는 결국 직장을 잃는다. 이후 호구지책으로 고깃집을 운영한 박수남은 4년 후 끝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진우와의 옥중서신을 엮은 책 『죄와 죽음과 사랑과』(1963), 『이진우 전 서간집』(1979)을 펴내고, 1965년부터 히로시마의 원폭 피해자들과 징용 피해자 등 재일조선인 1세의 체험을 취재한 증언집 『조선, 히로시마, 반(半)일본인』(1973)을 간행하는 등 프리랜서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재일조선인 피해자들을 인터뷰하면서 침묵을 비롯해 비언어적인 것들, 그리고 말을 이어나갈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활자화하는 것에 한계를 느낀 박수남은 1980년대 본격적으로 영상 작업을 시작하여 강제징용 조선인, 원폭피해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나며 남한, 북한, 일본 역사의 틈새에서 누락되었던 목소리를 찾아내 기록하는 작업들을 이어간다.

침묵을 깨는 박수남의 영화들
평생 5편의 기록영화를 완성한 박수남은 다음 세대를 위해 재일조선인이 겪은 역사의 만행을 전하며 전범국이 개인의 역사에 깊게 새겨 지워지지 않는 피해를 또렷이 증언한다. 감독은 강제 연행과 피폭, 전후보상 문제에서 누락된 1세대 재일조선인 피폭자의 목소리를 담은 <또 하나의 히로시마-아리랑의 노래>(1988)를 시작으로 1989년부터 오키나와 전투에 동원된 조선인 군 징용자,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밝히기 위해 오키나와와 한국에서 증언을 발굴하여 다큐멘터리<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1991)를 연달아 완성했다.
특히 쌀과 김치를 멘 15명의 할머니들이 1994년 일본으로 직접 건너가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공식 사죄와 배상을 요구한 투쟁을 담은 <침묵>(2017, 현재 '퍼플레이'에서 시청 가능)은 일본 우익세력의 조직적인 상영 방해 행위와 감독을 향한 모함 등 갖은 수모에도 관련 영화 중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꼽히며 유수의 영화제에서 많은 상을 수상했다.

박수남 감독의 과거는 현재로 이어진다. 영화 마지막, 전쟁에 희생당한 오키나와 사람들을 영화에 담아 온 감독은 미국과 그 파트너 지위를 움켜쥔 일본 정부에 의해 군사화가 진행 중인 현재의 오키나와를 방문한다. 어느덧 구순을 앞둔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평화를 이야기하는 노장 감독의 모습은 과거를 제대로 기억하고 복원하는 것이 어떤 미래 전망을 열어주는지 증명한다. 최근까지도 박수남은 그렇게 중요한 순간들을 기록한다. '기억을 영원히 기록하는' 다큐멘터리는 피해자의 기억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피해자의 기억이 살아있는 한 가해자의 책임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일본인 작가 오이와케 히데코는 박수남 감독은 자신이 매개체가 되어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사람들로부터 말을 끌어내는 '무녀'와 같은 존재였다고 회상한다. 사람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계성으로 완성된 <되살아나는 목소리>를 보는 것은 곧 복원된 역사의 증인이 되는 일이다. 기억의 망망대해에서 함께 역사를 되짚어나가는 끝나지 않은 여정에 부디 많은 이들이 동참했으면 좋겠다.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