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는 12월 25일 개봉 예정인 영화 <하얼빈>의 예고편은 뜻밖의 인물로 시작한다. 일본어 내레이션이 낮게 깔리더니 검은 배경 위로 낯익은 얼굴이 부상한다. '늙은 늑대' 이토 히로부미를 연기한 배우 릴리 프랭키의 얼굴이다. 일본 배우가 이토 히로부미 역으로 출연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다. 해당 영화에 대한 일본 내 반응은 다소 복잡하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도마 안중근>(2004)과 <영웅>(2022)에서 한국 배우 윤주상과 재일교포 배우 김승락이 이토 히로부미 조선총독부 총감 역을 맡은 이유기도 하다.
대중들은 '일본에서 부디 무사하길 바랍니다'라며 의외의 캐스팅을 지지하고 있다. <하얼빈>의 감독이자 <내부자들>(2015), <남산의 부장들>(2020)을 제작한 우민호 감독 또한 이토 히로부미 역으로 출연한 릴리 프랭키에 대해 “워낙에 좋아하는 배우였다”라고 운을 떼며 “이 작품의 진정성을 알고, 어려운 결정을 흔쾌히 내려줬다”라며 감사함을 전하기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페르소나이자 일러스트레이터, '도쿄 무드 펑크'의 보컬 및 작곡·작사가, 그리고 소설가로 활동하는 릴리 프랭키는 타고난 예술적 아우라를 섬세한 연기와 독창적인 캐릭터 해석에 버무려 흉내 낼 수 없는 연기 세계를 구축했다. 오늘은 <하얼빈> 개봉을 기다리며 OTT에서 만나볼 수 있는 작품 위주로 그의 대표작을 정리했다.
<어느 가족> (2018)
감독 ㅣ 고레에다 히로카즈
출연 ㅣ 릴리 프랭키, 안도 사쿠라, 키키 키린

릴리 프랭키의 배우로서 삶은 2001년 감독 이시이 데루오가 연기 경험이 전무한 그를 파격적으로 캐스팅하면서 열렸지만(<눈먼 짐승 대 난쟁이>), 대부분의 한국 관객에게 이 배우가 처음 인지된 시점은 2013년, 그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만난 뒤부터였을 것이다. 릴리 프랭키는 2013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통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만나게 되는데,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 탓에 둘의 첫 만남은 쑥스럽기 그지없었다고. 하지만 어색했던 첫 만남이 무색하게 이후 둘은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태풍이 지나가고>(2016), <어느 가족>(2018) 등을 연달아 작업하며 어느새 관객들은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 속에서 프랭키의 얼굴을 만나볼 수 있을 거란 당연한 확신을 갖게 됐다. 특히 피보다 진한 유대감이 주는 사랑으로 이뤄진 가족을 조명한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부터 <어느 가족>까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가족 시리즈는 릴리 프랭키의 연대기가 된다.
릴리 프랭키는 <어느 가족>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쳐 줄 게 좀도둑질밖에 없는 일용직 노동자 오사무로 분해 일하던 세탁소에서 '워크셰어'를 구실로 쫓겨나게 된 아내 노부요(안도 사쿠라)와 연금과 죽은 남편의 위로금을 받아 고택에서 연명하는 할머니 하츠에(키키 키린)에 기생해 살아가는 인물을 연기한다. 좀도둑으로 생계를 연명하는 처지에도 세상에 버려진 것들에 대한 측은지심을 거두지 못해 소년 쇼타와 꼬마 주리를 '주워오는' 따뜻한 심성은 릴리 프랭키의 연기로 설득력을 얻었다. 넷플릭스, 웨이브, 왓챠에서 볼 수 있다.
<13년의 공백> (2019)
감독 ㅣ 사이토 타쿠미
출연 ㅣ 릴리 프랭키, 타카하시 잇세이, 사이토 타쿠미

<13년의 공백>에서 릴리 프랭키는 담배 사러 나간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 아버지 마츠다 마사토로 분한다. 13년 만에 가족과 연락이 닿았을 때 마사토는 3개월의 시한부 상태였고, 그는 곧 세상을 떠난다. 안타까운 사연인데도 애도의 분위기나 슬퍼하는 기색 같은 건 없다. 가족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미움, 그리움이 13년간 차곡차곡 쌓인 터다. 문전성시를 이루는 옆 장례식장과 달리 아버지의 죽음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마작 친구, 단골 술집의 종업원, 경마 친구, 한때 빚을 수금하던 조폭 등 열 명 남짓의 조문객의 면면은 아버지의 지난 삶의 궤적을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장례식장에 모인 몇 안 되는 조문객들이 차례로 입을 열자 마츠다의 인생은 새롭게 재구성된다. 그리고 조문객들의 말과 추억으로 그려진 아버지의 모습은 아들 코지(타카하시 잇세이)의 기억과는 사뭇 다르다.
아버지 역의 릴리 프랭키는 몇 차례 등장하지 않지만 기억 속에 자리한 아버지의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킨다. 무기력해 보이는 구부정한 자세, 힘없이 날리는 머리카락, 심심한 이목구비에 떠오르는 사람 좋은 미소 등 '바보처럼 착한' 아버지 마츠다의 이미지는 상당 부분 배우 릴리 프랭키의 본연에서 빌려왔다. <13년의 공백>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활동했던 배우 사이토 다쿠미의 연출작이다. 왓챠, 웨이브에서 시청 가능.
<아버지와 이토씨> (2017)
감독 ㅣ 타나다 유키
출연 ㅣ 릴리 프랭키, 우에노 주리, 후지 타츠야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34살 아야(우에노 주리)는 같은 편의점에서 일하는 스무 살 연상 이토(릴리 프랭키)가 눈에 밟힌다. 쉰이 넘도록 변변한 직업 없이 몰래 만화 잡지나 훔쳐보는 이토를 보며 '패배자, 낙오자, 저렇게 되면 끝장'이라 되뇌었건만 아야는 어느새 마성의 매력남 이토에 빠지고, 둘은 함께 살게 된다. 한편 아야는 아버지(후지 타츠야)를 6개월만 맡아달라는 오빠의 간곡한 부탁을 받지만 이토와 함께 산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한다. 하지만 이미 집에 도착한 아버지는 당분간 이곳에 머무르겠다 선언하고 아버지, 이토, 아야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내키지 않는 동거는 시작부터 삐걱거린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잔소리를 늘어놓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가 불만인 아야. 새로운 식구를 위해 2인용 식탁에 부족한 의자까지 사다 놓고 어색한 동거를 즐기는 건 이토 뿐이다.
<아버지와 이토씨>에서 릴리 프랭키는 텁텁한 공기만 가득한 아야와 아버지 사이 작은 환기창을 낸다. 필요한 순간마다 등장해 능숙하게 문제를 조율하고 아야와 가족을 다시 연결시키는 가교 역할을 자청한다. 20년 터울의 세 사람을 통해 가족과 세대의 문제를 들여다보는 영화는 나카자와 히나코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소설 속 인물이 실존한다면 이런 모습이라 생각될 정도로 릴리 프랭키는 캐릭터에 밀착해 연기한다. 웨이브, 티빙, 왓챠에서 서비스 중.
<아름다운 별> (2018)
감독 ㅣ 요시다 다이하치
출연 ㅣ 릴리 프랭키, 카메나시 카즈야, 하시모토 아이

외계인 가족이라는 기발한 상상력이 환경오염으로 망가져가는 지구를 구하기 위해 벌이는 엉뚱한 사건들과 만나며 오늘날 지구가 처한 문제들을 역설하는 영화 <아름다운 별>에서 릴리 프랭키는 기상캐스터 주이치로로 분한다. 번번이 빗나가는 일기예보로 악평이 자자한 주이치로는 언제 밀려날지 몰라 전전긍긍하면서도 직장 동료와 바람을 피우는, 한마디로 권태로운 중년이다. 아들 카즈오(카메나시 카즈야)는 운동을 그만둔 후 아르바이트로 버티고 있는 꿈만 큰 프리터(일본 사회에서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편집자 주)다. 딸 아키코(하시모토 아이)는 빼어난 외모로 이목을 끌지만 소심하고 조용한 성격 탓에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엄마 이요코(나카지마 토모코)는 다단계에 속아 먹지도 못하는 물을 대량으로 구매한다.
위기의 가족에 대한 흔한 드라마일까 생각하는 찰나, 영화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아빠는 화성인, 엄마는 지구인, 아들은 수성인, 딸은 금성인이라고 믿기 시작한 후 이야기의 2부가 시작된다. 자신들의 정체를 자각한 오스기 가족은 환경오염으로 망가져가는 지구를 구하기 위해 폭주하는데 이게 마냥 엉뚱하지 많은 않다. 쓰나미, 지진, 원자력 발전소 붕괴 등 각종 재난을 겪은 일본이기에 설득력과 진지함을 획득하는 지점이 있다. 미시마 유키오가 1962년 발표한 동명의 SF소설을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이 영화화했다. 현재 웨이브에서 시청 가능.
릴리 프랭키 ♥ 사카구치 켄타로,
우리 제법 잘 어울려
<남은 인생 10년>(2022), <퍼레이드>(2023),
<사랑 후에 오는 것들>(2024)

릴리 프랭키는 2022년부터 2024년까지 무려 3편의 영화와 드라마에서 사카구치 켄타로와 만난다. <남은 인생 10년>에서는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카즈토(사카구치 켄타로)에게 도움을 내미는 현명한 어른 겐으로, 드라마 <사랑 후에 오는 것들>에서는 주인공 준고(사카구치 켄타로)의 아버지로 분해 무심한 듯 다정한 어른의 모습을 연기한다. 특히 <사랑 후에 오는 것들>에서 릴리 프랭키를 아버지 역으로 영입하는 데 사카구치 켄타로가 큰 역할을 했다는 후문이다.
각자의 이유로 저승으로 떠날 수 없어 '중간세계'에 머무는 영혼들의 이야기를 그린 넷플릭스 드라마 <퍼레이드>에서 릴리 프랭키는 영화의 뒷부분을 완성하지 못한 제작자로, 사카구치 켄타로는 모든 이의 이야기를 소설로 기록해두고 싶은 문학청년으로 분해 다시 한번 조우한다. 서로 만나는 장면은 없지만 둘은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에도 함께 출연했다. 릴리 프랭키는 영화 속 네 자매가 자주 가는 카페의 주인을, 사카구치 켄타로는 네 자매 중 둘째 요시노(나가사와 마사미)의 연하 연인 역을 맡아 작지만 임팩트 있는 연기를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