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의 끝이 보인다. 크리스마스도 코앞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먼지 쌓인 코타츠(전용 탁자에 이불이나 담요를 덮어 사용하는 일본식 난방기구)를 꺼내고 귤을 주문했다. 어떤 억압에 대해서는 심드렁하게 불참을 선언하는 것이 훌륭한 저항이 되는 법. 필자는 나 홀로 영화를 보는 것으로 로맨틱한 연애로만 수렴되는 크리스마스에 저항코자 한다.
주변의 영미들(영화에 미친자들)에게 연말 영화를 추천받았다. 영화에 걸맞은 야식도 페어링 했으니, 당신도 이 저항에 함께하시길!
치킨과 함께라면 그게 뭐든
<그린 북> (2018)

때는 1962년. 뉴욕 나이트클럽의 고객 관리 직원(바운서)인 ‘떠버리’ 토니(비고 모텐슨)는 새 일자리를 제안받는다. 피아노 연주자 돈 셜리(마허셜라 알리) 박사의 운전기사이자 보디가드로 남부 순회공연을 동행하는 일이다. 긴 시간 집을 떠나는 게 걸렸지만 높은 보수에 토니는 제안을 승낙하고, 흑인 전용 숙박 시설을 위한 안내 책자 '그린 북'을 챙겨 셜리 박사와 길을 나선다.
취향도 성격도 완전히 다른 두 사람. 여정이 순탄할리 없다. 입담과 주먹만 믿고 살아온 거친 토니와, 흑인 최초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해 엘리트 교육을 받은 셜리 박사는 너무 다른 개인이다. 하지만 남부로 내려갈수록 거세지는 인종 차별을 목도한 토니는 점차 박사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셜리 박사의 훌륭한 연주는 물론, 멸시와 천대를 무릅쓰고 위험하기로 소문난 남부까지 순회 연주를 나선 그의 용기에 매혹된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이 마음을 완전히 터놓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KFC 치킨이다. ‘KFC의 본고장’이라는 켄터키주를 지나가게 되자 토니가 가까운 매장에 들러 치킨을 한 양동이 산다. “냄새가 정말 좋지 않아요?”, “평생 프라이드치킨을 먹어본 적이 없어요”,(중략) “부탁이니 한 조각만 먹어봐요”, “담요에 기름이 묻으면 곤란해서요”, “그깟 담요 좀 더럽히면 어떻다고”. 티격태격 설전 끝, 박사는 결국 치킨을 한 입 베어 물고 그 맛에 반하게 된다. 따뜻한 음식으로 마음의 거리를 좁힌 둘은 여정 내내 교감하며 마지막 연주를 위해 남부로 차를 몰아간다.
분열된 2024년 12월을 사는 우리에게 서로 너무 다른 두 남자의 우정을 그린 영화 <그린북>은 특별하게 다가온다. 순회공연이 끝난 후 셜리를 크리스마스 디너에 초대한 토니의 배려와 그 초대를 기꺼이 승낙한 셜리의 용기가 지금의 우리에게도 필요하기에. 왓챠, 티빙 등에서 볼 수 있다.
사랑은 커피 & 시나몬롤을 타고
<사랑은 낙엽을 타고>(2023)

스케치북 고백과 그 장면에 포개지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지겹다면, 은유로의 전쟁이 아닌 진짜 전쟁이 발발한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 찬 시대에 걸맞은 독특한 로맨스가 만나고 싶다면, 단연 <사랑은 낙엽을 타고>를 추천한다.
안사(알마 포이스티)는 헬싱키의 슈퍼마켓에서 노숙자에게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나눠주다 해고되고, 곧이어 취직한 펍에서도 사장이 마약거래로 체포되면서 빈털터리가 된다. 한편 건설 현장 노동자인 홀라파(주시 바타넨)는 술 없인 밤낮으로 기능할 수 없다. 술 문제로 몇 차례 해고를 당해 마땅한 거처도 없이 떠도는 중이다. 적막함만이 감도는 무료하고 쌉쌀한 이들 삶의 여백을 채우는 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우크라이나 전쟁 속보다. 두 주인공들이 처한 현실과 이들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사뭇 냉담하다.
하지만 둘은 굴하지 않고 커피와 풀라(pulla, 핀란드식 시나몬롤, 영화 <카모메 식당>에도 나온 그 시나몬롤이다)를 나눠 먹으며 사랑을 시작한다. 세계는 전쟁 중이고, 노동자들의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며, 홀라파의 알코올중독 문제와 이어진 사고로 시작하는 연인들의 로맨스도 잠시 위기를 맞는다. 하지만 안사와 홀라파는 연대, 존중, 그리고 희망의 토양을 딛고 다시 연애하기 좋은 계절, 가을을 맞는다.
핀란드가 낳은 최고의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세계를 지탱하는 두 축인 무표정한 얼굴과 허를 찌르는 대사가 사랑 이야기에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코미디와 룸펜 프롤레타리아 캐릭터 또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같은 감독의 영화 <과거가 없는 남자>(2005) 또한 기억을 잃은 뒤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며 삶을 되찾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연대와 희망을 이야기한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웨이브에서, <과거가 없는 남자>는 왓챠, 웨이브에서 볼 수 있다.
아이스크림과 어울려
<샤이닝>(1980)

기후 변화 때문인지 내리는 눈이 영 시원찮다. 펑펑 내리는 눈, 소담한 눈에 덮인 풍경이 그리워 영화 <러브레터>(1995)와 <철도원>(1999)을 틀었지만, 새로울 것 없어 하품만 나온다. 그래서 올해는 영화 <샤이닝>(1980)을 다시 찾았다.
콜로라도주에 있는 오버룩 호텔은 폭설로 고립되는 겨울에는 영업을 하지 않고 관리인을 고용해 봄이 올 때까지 호텔을 맡긴다. 소설가 지망생 잭 토렌스(잭 니콜슨)은 평화롭게 소설을 쓸 수 있는 5개월을 놓칠 수 없었다. 좋은 기회라 생각한 그는 호텔에서 일하기로 결정하고 아내 아내 웬디(셜리 듀발)과 대니(대니 로이드)를 데리고 눈 내리는 고요한 오버룩 호텔로 향한다.
겨울 동안 글을 쓸 생각에 들뜬 잭은 호텔의 전임 관리자가 아내와 쌍둥이 딸을 죽이고 자살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한 귀로 흘릴 뿐이다. 하지만 말을 않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거나 사물이나 장소에 깃든 영혼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 '샤이닝'을 가진 아들 대니는 호텔에 드리워진 음산한 기운을 직감한다. 곧 대니는 샤이닝을 통해 끔찍한 이미지들을 보게 되고,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잭 또한 서서히 미쳐간다.
한겨울 고립된 호텔에서 폭주하는 주인공의 광기를 섬뜩하게 그려내 현대 공포영화의 고전이 된 작품으로 미국 원주민에 대한 폭력의 역사, 과거의 죄와 폭력의 순환 등 다양한 해석의 재미를 안긴다. 웨이브 등에서 만나볼 수 있다.
독한 위스키 한 잔과 함께
<이다>(2013)

한 소녀가 세상 밖으로 나가 자신을 억압하던 것들을 걷어내고 본래의 이름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 <이다>(2013)는 한 해를 정리하고 다가오는 내일을 준비하는 연말에 보면 좋은 작품이다.
가족의 존재조차 모르는 채 수녀원에서 자란 소녀 안나(아가타 트르제부초우스카)는 서원식을 치르기 전 유일한 혈육인 이모 '완다'에 대해 알게 되고 그를 찾아간다. 하지만 어렵사리 만난 이모는 쌀쌀맞기만 하고, 안나가 사실 유태인이라는 것과 본명이 '이다'라는 뜻밖의 이야기를 전한다. 혼란스러운 감정도 잠시, 부모님의 죽음에 대해 알고 싶어진 그는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완다와 함께 부모님의 유골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다. 그렇게 이다는 주어진 삶에서 선택한 삶으로 그 한 발을 내딛는다.
극도로 조용한 흑백 영상과 공백으로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과 유대인 박해의 역사 모두를 가진 폴란드의 어둠과 죄의식을 응시하는 <이다>. 이 영화를 보는데 그 어떤 음식이 필요하랴. 독한 위스키 한 잔이면 충분하다. 왓챠에서 볼 수 있다.
알록달록한 머핀이 생각나는
<매기스 플랜>(2015)

온기로 가득한 뉴욕의 겨울을 느끼고 싶다면 <매기스 플랜>을 놓칠 수 없다. 매기(그레타 거윅)는 아이를 갖고 싶지만 평생 진득한 연애 한번 해보지 못한 자신을 알기에 결혼은 자신 없다. 그렇게 인공수정을 결심하고 대학 동창 가이(트래비스 핌멜)에게 정자를 얻어 계획을 하나씩 실행에 옮기던 차, 매기는 새 인연을 만난다.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인류학자 존(에단 호크)이다. 존은 자신을 이해하고 소설을 좋아해 주는 매기와 점점 가까워지고, 결국 아내 조젯(줄리앤 무어)과 이혼을 택한다.
존과 결혼을 하고 그토록 원하던 귀여운 딸과 함께 행복한 결혼생활을 시작한 매기.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변해가는 존을 느끼며 매기는 그와의 결혼을 결정한 과거의 선택을 후회한다. 이에 남편의 전 아내와 남편의 재결합을 돕겠다는 다소 황당한 계획을 실천하는데, 매기의 노력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꼬여만 간다.
눈 덮인 뉴욕의 스케이트장, 워싱턴 스퀘어의 겨울 풍경, 책으로 탑을 쌓은 붉은 톤의 빈티지한 매기의 아파트까지. 따뜻한 겨울 감성 넘치는 풍경에 알록달록한 머핀을 베어 무는 매기의 발랄함이 더해지자 막장 스토리조차 사랑스러워진다. 왓챠 등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