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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시네아스트 빅토르 에리세의 작품들

씨네플레이

스페인의 가장 위대한 감독으로 추앙받는 빅토르 에리세의 최신작 <클로즈 유어 아이즈>가 극장가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한편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에리세의 장편 넷과 단편 둘을 상영하는 '빅토르 에리세 회고전'을 진행 중이다. 지난 50년간 에리세가 만든 작품들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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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아트시네마에서 진행 중인 빅토르 에리세 회고전 이미지

더 챌린지스

Los desafíos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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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챌린지스〉

스페인 영화 학교를 졸업한 빅토르 에리세는 영화 잡지 '누에스트로 씨네' 비평을 쓰고, 단편영화들을 연출했다. 1969년 개봉한 <더 챌린지스>는 에리세와 더불어 클라우디오 게랭(Claudio Guerín), 호세 루이스 에게아(José Luis Egea) 세 신인감독이 연출한 3개의 단편을 모은 옴니버스 영화다. 평범해 보이는 상황이 어떻게 폭력으로 이어지는지 보여주는 작품들 중 마지막에 해당하는 '3부'가 에리세의 작품. 버려진 듯한 마을에서 침팬지와 함께 사는 이들의 우여곡절을 보여준다. 3개 단편 모두 미국 배우 딘 셀미어(Dean Selmier)가 각자 다른 캐릭터로 출연했다. 이번 '빅토르 에리세 회고전'에서 4개의 장편과 함께 상영된다.


벌집의 정령

El espíritu de la colmena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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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의 정령〉

 

스페인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손꼽히는 <벌집의 정령>은 빅토르 에리세의 장편 데뷔작이다. 벨기에 극작가/시인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책 『꿀벌의 생활』(La Vie des abeilles)에서 제목을 빌려온 영화는 1940년 카스티야 고원의 마을에 사는 5살 소녀 아나(아나 토렌트)가 이동 영화 트럭에서 <프랑켄슈타인>(1931)을 보고 영화 속 괴물이 사실 정령이라는 언니의 말을 믿고 집 주변에서 괴물을 찾아다니는 이야기를 그린다. 동화처럼 보이지만, 스페인 내전 이후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을 향한 상징으로 똘똘 뭉쳐 있다. 제작 당시 촬영감독 루이스 쿠아드라도(Luis Cuadrado)는 시력을 잃어버린 상태였지만 조수가 폴라로이드로 찍은 장면으로 돋보기로 봐가면서 조명을 연출했다고.


남쪽

El sur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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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남쪽>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텔지아>, 로베르 브레송의 <돈>, 마틴 스코세이지의 <코미디의 왕>이 경합을 벌인 걸로 잘 알려진 1983년 칸 영화제를 통해 처음 공개됐다. 아델라이다 가르시아 모랄레스(Adelaida Garcia Morales)의 단편을 바탕으로 한 <남쪽>의 주인공 역시 소녀다. 스페인 북부에 사는 에스트렐라는 물로 점을 치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영화들 모두가 아이린이라는 배우가 주연이라는 걸 알게 되고 그녀가 남쪽에 사는 아버지의 애인이라고 의심한다. 남부가 고향인 에스트렐라의 아버지가 스페인 내전 중에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지지한 아버지와의 불화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설정 등 프랑코 정권의 그림자는 여전하다. 빅토르 에리세와 (훗날 스페인의 또 다른 거장이 되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와 오랫동안 작업한) 촬영감독 호세 루이스 알카이네는 <남쪽>이 미완성이라 주장한다. 시나리오의 절반을 찍고 남부로 촬영하려던 중 제작비 부족의 이유로 촬영이 중단됐다.


햇빛 속의 모과나무

El sol del membrillo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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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속의 모과나무〉

빅토르 에리세의 세 번째 장편 <햇빛 속의 모과나무>는 다큐멘터리다. ‘현존하는 최고의 사실주의 화가’라 추앙받던 안토니오 로페즈 가르시아가 그 주인공. 로페즈가 정원에 있던 모과나무를 그리겠다고 하자 에리세는 언젠가 로페즈가 들려준 꿈을 떠올리며 이 작품을 구상했다. 모과 열매가 떨어지기 전 계절의 태양과 그 태양이 나무에 미치는 영향을 포착하려 애쓰며 에리세는 그 과정을 그 꿈과 연결시키고자 했다. 1990년 9월 로페즈의 아내 마리아 모레노가 프로듀서를 맡아 촬영이 시작됐고, 1992년 5월 칸 영화제 경쟁부문을 통해 처음 상영됐다. 화가는 모과나무 앞에서 보고 느낀 것을 진실하게 표현하기 위해, 감독은 그런 화가를 진실하게 담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차분한 격정으로 가득하다.


생명선

Alumbramiento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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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선〉

2002년 공개된 프로젝트 <텐 미니츠>는 밀레니엄 전환기를 맞아 15명의 명감독들이 각자 시간에 대해 성찰해보이는 10분 분량의 단편을 모은 작품이다. 각각 ‘트럼펫’과 ‘첼로’로 나뉘어진 <텐 미티츠>에는 빅토르 에리세와 더불어 아키 카우리스마키, 베르너 헤어조그, 짐 자무쉬,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클레어 드니 등이 참여했다. <햇빛 속의 모과나무> 이후 또 다시 10년간 신작을 내놓지 않고 있던 에리세가 연출한 <생명선>은 갓난아기의 날카롭고 애절한 울음소리로 시작해 잠든 아이와 의식을 잃은 엄마, 작은 마리아 조각상, 손목시계를 스케치하는 소년 등을 비추면서 2차 세계대전 시대에 태어나 성장한 에리세의 개인사와 역사를 포개며 시간에 대해 사유하는 모노크롬 이미지가 이어진다.


붉은 죽음

La morte rouge

2006

〈붉은 죽음〉
〈붉은 죽음〉

<생명선>으로 장편 데뷔 이래 처음 단편을 작업한 에리세는 이후 (10년에 한번 꼴로 장편을 내놓던 과작의 감독치고는) 나름 활발하게 단편들로 필모그래피를 늘려갔다. 2006년 선보인 <붉은 죽음>은 다섯 살 때 누나와 함께 생애 처음 영화를 봤던 경험으로 파고든다. 셜록 홈즈 시리즈에 속하는 <주홍 발톱>(The Scarlet Claw, 1944)을 중심으로 영화에서 발췌한 장면뿐만 아니라 아카이브의 사진과 녹음을 활용해 <주홍 발톱>을 본 산세바스티안의 쿠르살 극장의 역사적 맥락과 영화적 체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에리세가 직접 내레이션을 맡아 극장이란 그림자의 왕국이자 유령의 피난처가 된다고 말한다.


서신교환: 빅토르 에리세-압바스 키아로스타미

Erice - Kiarostami: Correspondences

2008

〈서신교환: 빅토르 에리세-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서신교환: 빅토르 에리세-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앞서 소개한 <붉은 죽음>은 스페인의 바르셀로나현대문화센터와 프랑스 영화평론가 알랭 베르갈라가 만든 전시 ‘에리세-키아로스타미: 서신교환’의 일환으로 빅토르 에리세가 연출한 단편이다. 이 전시에서 비롯된 또 다른 프로젝트로 <서신교환>이 있다. 국적과 언어가 다른 두 감독이 ‘영화 편지’를 서로 주고받은 결과물을 내놓는 기획으로 2005년 4월부터 2007년 5월까지 빅토르 에리세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마드리드/산세바스티안과 테헤란/이란 북부 등에서 촬영한 영상이 교차되어 이어진다. 에리세와 키아로스타미 각자의 연출뿐만 아니라,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와 여전히 영화의 가능성을 펼쳐보였던 두 거장이 서로의 작품에 어떻게 조응하는지도 확인할 수 있는 귀한 프로젝트다. 에리세와 키아로스타미에 이어 하이메 로살레스와 왕빙, 호세 루이스 게린과 요나스 메카스, 알베르트 세라와 리산드로 알론소 등의 짝패로도 제작됐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

Cerrar los ojos

2023

〈클로즈 유어 아이즈​​​​​​​〉
〈클로즈 유어 아이즈〉

 

<햇빛 속의 모과나무>가 공개된 1990년대가 끝나고 2000년대가 와도 간간이 단편 소식만 있을 뿐, 빅토르 에리세의 새 장편이 나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2023년 칸 영화제에서 31년 만의 새 장편이자, 41년 만의 새 장편 '극영화' <클로즈 유어 아이즈>가 세상에 나왔다. (에리세는 <남쪽>을 미완성 영화라고 했으니, 어쩌면 장편 데뷔작 <벌집의 정령> 이후 50년 만의 온전한 장편 극영화라 할 수도 있겠다.) 나이든 감독이자 작가인 미겔(마놀로 솔로)은 22년 전 사라진 절친이자 끝내 완성되지 못한 영화 <작별의 눈빛>의 주연배우 훌리오(호세 코로나도)의 흔적을 찾아나선다. 에리세의 이전 많은 작품들처럼, 아이가 아닌 중년의 남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서사 역시 '영화'로부터 작동한다. <벌집의 정령>의 주연배우 아나 토렌트가 훌리오의 딸로 등장해 많은 영화 팬들이 열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