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무슨 말을 보태야 할까. 탄식이 앞섰다. 2024년 12월 6일, 계엄령으로 시국이 어수선한 가운데 믿기지 않은 소식이 더해졌다. 바로 일본을 대표하는, 아니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러브레터>의 주인공 나카야마 미호의 부고였다. 향년 54세의 이른 작별이었다. 나카야마 미호의 공식 홈페이지에는 부검 결과 사인을 “목욕 중에 일어난 불의의 사고로 판명되었다”고 발표했다. 더없이 아깝고 허망하다. 내년 1월 1일 <러브레터>의 재개봉을 기다리고 있었던 차였다. 내년은 1995년 <러브레터>가 일본에서 개봉한 지 30년이 되는 해다. 기억에 관한 기억의 영화. 나카야마 미호이자, 후즈이 이츠키였던 이의 너무도 슬픈 소식에 <러브레터>의 첫사랑이 이제는 영화보다 더 아프게 다가올 것 같다. 첫사랑 판타지의 결정판, 이제는 전설이 된 <러브레터>를 이제는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러브레터>는 그 해석만큼이나 제작 이야기까지도 많다. 지금으로는 상상할 수 없지만 어쩌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수도, 나카야마 미호가 출연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몇 해 전 한중일협력사무국의 토크콘서트의 참여로, 이와이 슌지 감독을 발탁하고 <러브레터>와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의 제작에 참여한 프로듀서 카와이 신야에게 작품 제작과 관련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가이드로 삼아 <러브레터>의 제작 비하인드와 의미를 따라가 보겠다.

“저의 대표작을 만들어 주세요.” <러브레터>에 캐스팅되기 전 나카야마 미호가 <러브레터>의 프로듀서 카와이 신야에게 한 말이다. 미호는 당시 밴드 완즈(WANDS)와 함께 부른 ‘世界中の誰よりきっと’(세상 누구보다 분명)가 180만 장의 판매고로 오리콘 차트 1위에, ‘だ泣きたくなるの’(다만 울고 싶어지는걸) 역시 판매 100만 장을 넘는 등, 내놓는 노래마다 히트를 할 정도로 이미 정상의 아이돌 가수였다. 이미 세 편의 영화에도 출연해 연기를 선보였지만 가수의 명성과 달리, 배우로 성취는 저조했다. 마침 카와이 씨와도 <파도의 수만큼 안아줘>(1991)를 같이 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내놓지 못해 아쉬운 때였다.
본인이 당장 은퇴를 한다고 해도 “영화만큼은 제대로 하지 못해 후회가 남을 것 같다”는 것이 미호의 말이었다. 카와이 씨는 평소 가타부타 여러 말을 하지 않는 미호의 성격으로 볼 때도, 제대로 된 작품에서 역할을 해보고 싶다는 그녀의 바람이 평소와 달리 유독 강하다는 걸 느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이와이 슌지 감독에게 <러브레터>의 후지이 이츠키 역으로 미호의 캐스팅을 제안했다고 한다. 가수로 방송 출연을 하러 온 나카야마 미호와 이와이 슌지 감독의 만남을 곧 주선했다. 미팅 후, 이와이 슌지 감독은 선뜻 캐스팅을 확신하지 못했다. 연기로 보자면 까다로운 조건을 가진 역할이었다. 하나의 역을 해도 어려울 텐데 사고로 죽은 연인을 잊지 못하는 여성 와타나베 히로코와 사춘기 첫사랑의 감정을 현재에 되살리는 후지이 이츠키까지 1인 2역의 연기를 소화해야 했다. 톱스타인 미호가 선뜻 응해줄지 걱정되는 캐스팅이었다. 카와이 씨는 “그건 연출가의 몫이니 알아서 해 보라”고 감독에게 책임을 맡겼다고 한다.

카와이 씨가 나카야마 미호의 캐스팅이 <러브레터>의 제작에 ‘행운’이었다며, 추진을 하게 된 데는 매우 절박한 이유가 있다. 한국에서 신드롬, 일본영화 붐을 일으킨 작품이지만, 미호의 합류 이전 <러브레터>의 제작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아니, 어쩌면 아예 제작이 불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당시 이와이 슌지 감독은 그때, 지금의 ‘일본을 대표하는’ 혹은 수많은 ‘이와이 월드’의 팬을 가진 알려진 감독이 아니었다. 주로 뮤지션의 PV(신곡을 홍보하기 위한 영상)나 MV(뮤직비디오)를 작업하고, 후지TV에서 밤 12시 이후 방영하는 심야드라마 <고스트 스프>(1992) <프라이드 드래곤 피쉬>(1993)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1993)등 10여 편의 드라마를 찍었지만 영화 경험은 없었다. 당시 후지 TV에서 일하던 카와이 씨는 사잔 올 스타즈(サザンオールスターズ)의 PV와 <고스트 스프>를 보고 이 젊은 감독을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음악도 좋지만, 영상의 접근, 사용법은 물론, 음악과 영상의 조화도 훌륭했다. 베테랑 프로듀서의 눈으로 연출자의 감각이 남다르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만나서 식사를 하면서 "영화감독하겠냐?"라고 물었더니, “뭐, 한번 해보고 싶네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시 한번, <러브레터>가 만들어지기 어려웠다는 점을 상기해줘야겠다. 당시 일본영화계는 조감독을 거쳐 연출자로 가는 도제시스템이 여전했으니, 영화 전공도 아닌 교육학부(미술학과)를 전공하고 현장 경험이 없는 20대의 청년 이와이 슌지는 바로 연출을 하기엔 누가 봐도 역부족이었다. 그런 그가 하고 싶다며 가지고 온 작품은 <러브레터>가 아닌,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였다. 규슈에 사는 많은 불법체류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일본정부가 당시 그들을 강제퇴거 시키는 걸로 뉴스가 되곤 했던 문제이기도 했다. 제작 규모 만으로도 당시 5억 엔(한화 약 50억) 정도가 드는 대작이었다.

흔히 이와이 슌지를 첫사랑의 감성을 간직한 <러브레터>로 기억하는 관객들에게는, <4월 이야기>(1998), <하나와 앨리스>(2004)같은 ‘화이트 이와이’와 반대의 무드인 <릴리 슈슈의 모든 것>(2001) 혹은 단편 <언두>(1994) <피크닉>(1996) 같은 작품군에 속하는 ‘블랙 이와이’의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러브레터>를 먼저 보고 난 후, ‘블랙 이와이’의 작품을 후에 접하면서 전혀 다른 색깔에 놀랐던 관객들이 적지 않았는데, 사실 이와이 슌지가 연출자로 처음 만들고 싶었던 건 오히려 ‘블랙 이와이’ 쪽이었다.
나카야마 미호의 등장은 모두가 안된다고 만류할 때,
나타난 한 줄기 빛이었다.
어쨌든 무엇을 하든 영화 연출을 하기 위해선 절차와 시간이 필요했다. 이와이 슌지가 연출자로 적합하다는 증명, 즉 후지 TV의 결정자들을 움직일 감독으로서 역량을 먼저 보여야 했다. 단편 <언두>와 <피크닉>이 만들어진 건 바로 이 과정에서였다. “당시 일본에는 비디오 시네마라는 장르가 있었다. 영화관에서는 상영을 하지 않지만, 비디오로 판매하는 것인데 그 형식을 시험 삼아 해보자. 그리고 난 후 ‘2시간 드라마용’를 만들어 보자 (했었다). 카와이 씨는 이 작품을 완성해서 선보인다면, ‘이와이 슌지는 대단한 감독이다’라는 걸 어느 정도 각인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와이 슌지 본인의 중학교 때 추억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바탕으로 한 <러브레터>를 만들게 된 계기다. 지금으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1인 2역의 콘셉트에 대해서 ‘진부하다’ ‘그것만큼은 안 했으면 좋겠다.’ ‘절대로 뜨지 않을 것이다’ ‘흥행은 불가능하다’는 말이 대부분의 반응이었다고 한다. 후지TV에서도 만류가 심했다고 한다.

나카야마 미호의 등장은 그렇게 모두가 안된다고 만류할 때, 나타난 한 줄기 빛이었다. 당시 나카야마 미호가 출연한다면, 소속사인 킹레코드에서 제작비를 투자를 하겠다는 제안이 있었고, 그렇게 <러브레터>는 제작에 착수, 두 달간의 촬영을 마치고 영화로 완성됐다.

<러브레터>는 그렇게 1995년 일본에서 개봉했는데 ‘그렇게까지’ 흥행이 잘 된 작품이 아니라는 건 다소 의외긴 하다. 정작 ‘난리가 난 건’ 한국이었다. 그 시절을 공유하는 모두가 알다시피,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발표한 10월 일본문화 개방 이후 수입된 작품이라, 그전까지는 이미 궁금증을 못 참고 알음알음 복사본으로 그 영화를 본 씨네필이 30만 명이 넘는다고 (추정)한다. 그 시절 나도 불법 루트를 통해 <러브레터>를 먼저 접했는데, ‘삿포로의 설원 위에 펼쳐진 가슴 아픈 멜로’라는 입소문이 무색하게도, 하도 비디오테이프를 돌려 봐서 이미 손상이 될 대로 된 화면 탓에 영화 보는 내내 거무튀튀 은갈치 빛 화면을 참아내야 했던 게 기억난다. ‘에게!’라는 말이 나왔지만, 그럼에도 스토리가 주는 감흥과 정서는 깊이 각인됐었다. 나카야마 미호가 “오겡끼데스까? 와따시와 겡끼데쓰”라고 할 때 펼쳐진 아름다운 설원은 몇 년 후 정식 개봉 후 극장 스크린을 통해서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일본 영화, 문화 수입에는 1차, 2차, 3차, 4차에 이르는 순차적인 개봉으로 수입 규칙과 절차가 뒤따랐는데, 그중 제 일 전제가 한국 문화에 악영향을 끼치면 안 된다는 조건 하에 ‘칸, 베니스, 베를린 등 국제영화제 수상작’이라는 인증 마크가 있어야 했다. 기타노 다케시의 <하나-비>나 <소나티네>,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 같은 작품 같은, 아이러니하게도 폭력성과 선정적인 면에서 수위가 ‘센’ 영화들을 접하던 관객들에게 <러브레터>의 감성은 일본 영화라는 카테고리 안에서도 달라도 너무 다른, 이와이 슌지의 색깔을 단박에 규정지어줄 작품이었다. 이와이 슌지라는 감독과 <러브레터>는 말 그대로 관객의 감성을 사로잡을 동시대를 배경으로, 동시대의 감성을 장착한 작품의 첫 번째 연출자이자, 작품의 등장이었다.

후지이 이츠키 라는 이름을 공유한 사춘기 시절의 첫사랑.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과 남은 사람의 슬픔, 닮은 얼굴과 잊지 못할 기억의 잔상까지. <러브레터>는 도서관 커튼 뒤에서 모습을 비추는 소년 후지이 이츠키와, 빈티지 폴라로이드 SX-70을 들고 사진을 찍던 어른이 된 여성 후지이 이츠키를 연결시키며,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가슴에 간직하게 하는, 어쩌면 이 영화는 모든 지구상 첫사랑의 요소를 모두 집합해 만들어 낸 결정체 같은 작품 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속에는 어쩌면 이와이 슌지 감독조차 다시 흉내 낼 수 없을, 이와이 슌지라는 고유명사로 규정되는 모든 것이 응축되어 있다. 모든 것이 완벽했고 모든 것이 매직 같았다. <러브레터>를 비롯해 이후 <릴리 슈슈의 모든 것> <4월 이야기> <하나와 앨리스>로 이와이 월드의 선율 그 자체인 레미디오스의 음악과, 이와이 월드의 색채를 규정지어준, 지금은 유명을 달리 한 촬영감독 시노다 노보루의 서정적인 영상 역시 모든 장면을 간직하게 해 주는 이 영화의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다.
영화가 나온 지 4년 후인 1999년 11월 20일 한국 정식 개봉. 이후 100만 명 이상의 관객이 볼 정도로 한국인에게 <러브레터>는 개별 작품의 흥행을 뛰어넘어 일본영화, 감성, 문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남게 됐다. 관객의 심상을 뒤흔들었을 뿐 아니라, 무수한 멜로영화의 콘셉트와 결정적 장면이 이 영화에 일정 부분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영화 개봉 후에는 배경이 된 홋카이도를 찾아가는 한국인 관광객도 200만 명 정도로 부쩍 늘었다. 이것 역시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고. 카와이 씨 말에 따르면, “한국인들이 와서 <러브레터>를 찍은 그 집은 어디예요?라고 묻는데, 정작 오타루 사람들은 그 영화를 많이 보지 못해서 어딘지도 모르고 놀랄 정도”였다고 한다. 돌아보면 신기하게도 <러브레터>의 영향은 그 자체로 직접 전파되었다기보다, 그 여과지를 통과해 한국적인 첫사랑 판타지가 더해져 이 감성이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운 현상이다.

카와이 씨는 결국, 아시다시피 이와이 슌지 감독과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을 만들 수 있었다. <러브레터>는 비록 자국 흥행은 저조했지만, 수치로 기록된 흥행과는 별개로 어쨌든 연출자로서 이와이 슌지 감독의 가능성을 입증하기에는 충분한 작품이었다. 개봉 해인 1995년 「키네마 준보」 독자투표에서 ‘최고의 영화’로 선정되었으며, 일본 아카데미상, 요코하마 영화제 등에서 작품상을 받으며 인정받았다. 물론 나카야마 미호도 연기상을 받으며, 바람대로 자신의 연기 대표작을 만나게 된 거고. <러브레터>를 후지TV의 우려와 사규에서 벗어나 멋대로 만든 카와이 씨는 영화 제작이 아닌 다른 곳으로 부서 이동을 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이와이 슌지 감독이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를 만들게 한다는 약속은 유효했다. “<러브레터>보다 더 진부하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고 하니 쉽지는 않았을 텐데, 다행히 의외의 곳에서 행운이 찾아왔다. 록밴드 ‘미스터 칠드런’의 영화화에 대한 프로듀서 제안을 받고 만든 <Mr.Children in FILM>이 흥행의 성공이 이어졌고, 음악을 담당한 코바야시 다케시가 이와이 슌지 감독의 작품에 수익금을 투자하는 과정이 있었다.
이후 이와이 슌지 감독을 여러 차례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는데, 매번 작품에 들어가기까지 그는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이와이 슌지의 대표작인 <하나와 앨리스>도 투자 난항은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지금도 그런 환경은 변함이 없다. <러브레터> 이후 20년간 작품을 만들어왔는데, 제대로 매진해서 만든 건 6년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실현되지 않고, 결과물로 이어지지 않은 작품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성사되지 못하는 기획이 있을수록 하나의 작품이 풍성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며 당시 신작인 <립반윙클의 신부>(2016)의 예를 들었다. “이 영화에도 내가 생각하는 대여섯 개의 기획이 섞여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여건이 되지 않아 만들어지지 못하고 엎어지는 기획들이 마냥 없어지는 건 아니다. 작가 입장에서 보면 뭐든지 원하는 걸 자유롭게 만드는 건 결코 좋은 환경이 아니라고 본다. 안 되는 작품이 있을수록 열심히 주워 모아 지금 같은 작품을 만들게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제작 과정의 난항조차도 어려움조차도 작품을 만드는 하나의 동력으로 해석하며 꾸준히 신작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그런 이와이 슌지의 신작을 기다린다. 거기에는 <러브레터>가 관객과 만나기까지에는 아직 경력이 입증되지 않은 신인감독과 그를 믿고 지지해 주는 프로듀서의 연대라는, 산업의 논리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과정이 존재하고 있었다.

다가오는 2025년은 <러브레터> 개봉 30주년이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나카야마 미호와 개봉 30주년을 기념하자고 약속했었다”고 한다. 나카야마 미호는 그 약속을, 그리고 정말 자신의 바람대로 대표작이 된 <러브레터>에서의 아름다운 모습을 남기고 유명을 달리했다. 틈만 나면 꺼내보는 ‘러브레터’가 지금은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팬들에게는 너무 ‘슬픈 편지’가 되어버렸지만, 부디 우리 모두의 후지이 이츠키가 홋카이도의 설원에서 “와따시와 겡끼데쓰”하고 웃어 주기를. 그녀의 모든 움직임, 표정, 떨림 하나하나로 기억되는 영화 <러브레터>를 슬프지만 다시 또, 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