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된 <공원에서>는 '올해 발견한 한국영화'다. 작년 서울 세검정 주변의 밤 풍경과 한시(漢詩) 그리고 푸른 선의 드로잉을 병치한 다큐멘터리 <밤 산책>(2023)을 선보인 손구용 감독의 신작 <공원에서>는, 오후 2시 즈음의 한 공원의 10분 남짓한 시간을 故 오규원 시인의 「뜰의 호흡」의 문장들과 함께 86분으로 늘인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달 초 서울독립영화제에서도 <공원에서>를 선보이며 관객들을 만난 손구용 감독에게 <공원에서>에 관해 물었다.

<공원에서> 속 시간이 오후 2시인데 인터뷰 시간을 오후 2시로 정해주셔서 재미있다고 생각하면서 약속 장소에 왔습니다. 영화를 만들기 전엔 사진 작업을 하셨더라고요.
대학교 말미 즈음 독립 출판물을 만들던 와중에 사진이 필요해서 직접 찍어보다가 독학하기 시작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워낙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고 창작에 관심에 많았는데 그게 사진이랑 맞아떨어져서 깊이 빠져들었어요. 필름으로 몇천 롤 찍었을 거예요. 진지하게 더 작업해보고 싶어서 대학원에 갔는데, 학풍이 안 맞고 교수님도 추구하는 스타일이 달라서 엄청난 회의감에 한 달도 못 돼서 다니지 않았어요. 개념적인 사진이 점점 늘고 미술이랑 혼합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이미지 이면에 뭔가를 덧붙이는 게 부자연스러워 보였어요. 옛날 방식대로 사진 작업을 할 수 있다고 나이브하게 생각하다가 대학원 가서 현실이 좀 보였죠. 그러던 와중에 지인한테 영화를 추천받았어요. 그전엔 영화를 잘 몰랐거든요. 그때 자크 타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로베르 브레송을 보고 이런 영화도 있다는 걸 알게 됐죠. 서사 중심의 영화만 봐왔는데 다른 가능성들을 많이 발견하게 됐어요. 영화는 시간성이 있어 여백이 트이는 느낌이 들어서 뭘 갖다 붙이지 않아도 그 자체로서 작동이 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지난 장편 <오후 풍경>(2020)과 <밤 산책>은 제목 그대로 각각 오후와 밤을, 이번 <공원에서>는 오후 2시 즈음의 풍경을 담았습니다. 오후와 밤에 특히 이끌리는 이유가 있을까요.
돌이켜보니 있는 것 같긴 한데… 서사의 반대로서 서정성을 영화적 언어로 삼아야겠다는 뜻이 무의식적으로 있어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시나리오화된 스토리텔링의 세계를 믿지 않게 돼요. 믿고는 싶은데. (웃음) 작업을 하려면 진심으로 가야 하는데 이상하게 그게 안 생겼어요. 어떻게 보면 형식 실험처럼 보이는 길로 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이번엔 좀 극단적으로 리얼타임 10분이라는 짧은 시간을 해체해서 들어가 확장하고 응축시키는 방식으로 시간성을 고민해서 시간대가 더 제한된 듯해요.

<공원에서>는 오규원 시인의 시 「뜰의 호흡」을 전면에 인용하고 있습니다. 전작 <밤 산책>은 한시를 잔뜩 가져오셨죠. <공원에서>는 공원이 먼저인가요, 오규원 시인의 시가 먼저인가요? GV에서 산문집 『가슴이 붉은 딱새』로 오규원 시인을 처음 접했다고 하셨는데, 『가슴이 붉은 딱새』를 읽고 「뜰의 호흡」을 인용하기까지의 과정을 듣고 싶습니다.
공원이 먼저였습니다. 소설보다는 에세이나 시를 더 좋아해요. 앙드레 지드나 알베르 카뮈 같은 프랑스 작가의 에세이를 보다가 번역된 것이 아닌 우리 말로 쓴 걸 보고 싶어서 찾아보다가 『가슴이 붉은 딱새』를 알게 됐어요. 그걸 재미있게 읽고 시론집 『날이미지와 시』를 봤는데 그 날이미지론이 굉장히 영화적이라고 느꼈어요. '투명한 이미지'라는 것에서 카메라 자체가 인위적인 개입 없이 특정 이미지를 보는 방향과 맞닿아 있다고 느껴서 이걸 언젠가 영화에 접목시켜야겠다 싶었죠. <밤 산책> 이후로 시를 동전의 앞뒷면처럼 영화 이미지와 완전히 붙어 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던 중에 제한된 공간에서의 제한된 시간이라는 게 계속 맴돌았고, 이게 오규원 시인의 시를 읽었을 때의 감흥이라고 비슷하다 깨닫고 그분의 시를 더 많이 찾아 봤어요. 날이미지론을 정립하고 처음 발표한 시집이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이라 주의 깊게 보다가 공원과 느슨하게 얽혀 있는 듯한 시를 몇 개 찾았고, 장편영화 내내 나와야 하니 행이 좀 많았어야 해서 「뜰의 호흡」을 택했어요. 정독도서관 정원 보면 분수가 딱 중간에 있고, 그 오른편에 남자가 서성이는 잔디밭이 있어요. 그게 대략 70평 정도 될 거예요. 「뜰의 호흡」에 “칠십 평의 우주”라는 말이 나오는데, 시가 묘사하는 세계가 영화 속 제한된 공간인 공원 안의 일부를 계속 맴돌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 선택했어요.

영화 처음 다섯 분의 이름을 역할 구분 없이 가나다순으로 띄운 게 크레딧의 전부예요. 그전에는 (‘감독’이나 ‘연출’이 아닌) ‘만든 사람’이라고 본인 이름을 따로 띄우긴 했지만, 이번엔 그조차 없어요.
참여한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적고 무엇무엇 역할을 나누기도 뭐해서 깔끔하게 이름만 넣자고 했는데, 가나다순으로 하면 저를 4번째로 두는 게 또 괜찮은 것 같아서 그렇게 했습니다.
<공원에서>와 더불어 감독님의 지난 두 장편을 보면서 새삼 물에 대한 이끌림이 분명히 있구나 싶었어요.
아무래도 캐릭터나 서사 위주로 흘러가는 게 아니다보니까 은연중에 물을 찾았던 것 같아요. 뭐라도 좀 흘러갔으면 해서. <오후 풍경>과 <밤 산책>의 시간은 선형적이기 때문에 시냇물이나 계곡물처럼 A에서 B로 흘러가는 물이 나온 것 같아요. <공원에서>는 A에서 B까지 가기는 하지만 그 사이가 90분이 걸려도 실제로는 1초 차이일 수도 있는 이상한 시간성을 갖고 있어도, 우연히 물이 나오긴 나오죠. 이번엔 흘러가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는 아니에요. 분수는 계속 똑같고, 물레방아는 상징하듯이 돌아가는데… 아무튼 물이 제 영화에서 흘러가거나 순환시키는 매개로 작동되는 거 같긴 해요.

정독도서관 앞 정원을 공간으로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밤 산책>보다 더 제한된 공간에서 찍고 싶었던 이유가 사방팔방 다니는 게 아니라 고요하게 붙박이 상태라면 어떤 이미지들이 흘러들어올 수 있을까 궁금해서였어요. 공원을 여러 군데를 돌아다녔는데 물 있는 데가 없었어요. 정동 근처에 평소 좋아하는 공원이 몇 군데 있는데 거기도 그래서 못 찍었죠. 예전부터 정독도서관을 다녔어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가 가봤는데 곳곳에 질감이 많더라고요. 아무것도 없는 공원이면 소리로 뭘 어떻게 하기가 어려울 텐데, 분수와 물레방아의 특징이 특히 크다고 느꼈어요. 처음 구상 단계부터 계속 반복된다는 걸 염두에 뒀기 때문에 소리의 질감이 다양하다는 점에서 거기로 정한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도서관 앞 정원에 물레방아가 있다는 게 재미있네요. (웃음) 이전 작품들에서의 물이 흐르는 느낌이라면, <공원에서>의 물은 보다 더 역동적이에요. 분수는 물이 솟아오르고, 연못은 잉어가 헤엄치고, 물레방아는 쉼 없이 돌아가고. 시 구절이 인터타이틀로 인용되는 빈도도 저마다 달라요.
최대한 고르게 하려고 했어요. 사실 원문은 행갈이가 다른데, 저는 임의대로 문장 단위로 잘랐어요. 문장 인터타이틀도 한 번에 서너 개가 이어지는 게 있는가 하면, 딱 하나만 뜰 때도 있고, 문장을 똑같은 방식으로 넣은 경우는 없어요. 완전히 복사/붙여넣기 된 행과 이미지는 없다는 걸 행으로도 알리고 싶었어요. 내용이 이어지는 문장을 이어서 띄우기도 해서, 가장 긴 건 4개가 이어져요. 이어지는 문장들 중 처음에 해당하는 게 아무래도 많이 나오고요. 영화 속 시간이 오후 2시라 (시의 첫 문장인) “오후 두 시 나비가 한 마리 저공으로 날았다”를 의도적으로 제일 많이 넣었습니다. 한편 앞뒤랑 잘 안 붙는다고 생각한 문장은 몇 번 안 나오죠.
원문에서 문장은 한 행에서 완성되는 법 없이 계속 미끄러지듯 배치돼 있죠. 문장 단위로 반듯하게 다듬은 이유가 있을 텐데요.
본래의 행갈이가 시인의 중요한 의도일 텐데 원문을 해치는 거라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무성영화의 인터타이틀은 굉장히 심플하잖아요. 인터타이틀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초기부터 계속 써왔는데, 원문의 행갈이 그대로 넣으면 영화의 형식과는 안 맞는 거 같더라고요. 인터타이틀이라는 형식으로 바꾸면 문장이 단순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문장 단위로 바꿨어요.

촬영 기간이 꽤나 길었다고요.
시나리오가 있고 회차도 정해놓고 찍는데 저한텐 너무 안 맞았어요. 절대 회차를 한정하지 않고 내가 편한 대로 길게길게 찍자고 결심했죠. 그러니 카메라를 보는 태도가 달라졌어요. 능동적으로 들이대지 않아요. 오랫동안 찍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 같아요. 카메라도 제 것이니까 <공원에서>는 두세 달을 거의 매일 나가서 최대한 편하게 내려놓고 찍었어요. 풍경들을 제가 2달 정도 찍어 놓고, 배우들 회차는 그렇게 많이 안 갔어요.
<공원에서>의 인터타이틀 지속 시간은 어떻게 정했나요?
<밤 산책>을 본 몇 분께서 인터타이틀이 빨리 지나간다고 하셔서 지난번보다 좀 길게 줬습니다. 그저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정도. 인터타이틀 하나하나의 시간을 부여했다기보다 앞뒤 숏과의 관계에 맞췄어요.

<밤 산책>과 달리, <오후 풍경>과 <공원에서>엔 사람이 등장합니다. 다만 대사도 표정도 없어서 다른 사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여요.
두 영화 모두 풍경의 요소로 쓴 측면이 있죠. 왜 그러는지 스스로 분석이 안 돼요. 영화제 가서 스틸 보면 바스트숏에 클로즈업에 전부 사람이잖아요. 저는 그게 좀 숨 막혀요. 화면에 인간, 인간, 인간, 인간으로 채워진 게 답답해서 사물이나 풍경에 더 관심을 갖게 되고, 그 와중에 인간은 그중의 하나의 요소로 움직이는 듯한 방식으로 계속 가는 것 같습니다. 이번엔 공원 벤치에서 누군가가 화자처럼 시를 읽고 있다는 설정이 있었고, 보편적인 배우의 이미지가 아닌 여성 화자를 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남자가 나온 건 위계 때문이었죠. 인간 없이 모두 풍경이었다면 그렇지 않았을 거예요. 인간인 우리가 인간의 시선으로 보니까, 인간이 나온다면 나비나 개미와 같은 위상으로 두려면 남자가 하나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시간성이 뒤죽박죽되니, 남자가 팔을 걷고 셔츠를 벗는 과정이 있어야 시간이 바뀐다는 게 보일 것 같아서 넣은 것도 있고요. 이 남자가 특별한 행동을 하면 바로 여자와 관계를 짓고 서사를 떠올릴까 봐,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고 이 동선 안에서 움직이면 된다는 것만 주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하라고 했어요. 남경우 배우는 단편 작업할 때부터 같이 해왔는데, 실제 사람도 투명하고 사물 같은 느낌이 있어서 <공원에서>의 남성 캐릭터와 잘 맞지 않았나 싶습니다.

여자의 동작은 감독님이 세부적으로 지시한 건가요?
사람의 분량이 꽤 돼요. 처음부터 생각한 건 여자는 완전히 붙박이로 앉아 있고, 남자는 좀 풀려진 느낌이었어요. 리얼타임 10분이라면 여자를 일으켜 세우거나 움직이게 해서 다양하게 가보면 어떨까 싶을 텐데, 그걸 뿌리치고 강박적으로 앉은 자세에서 무얼 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그렇게 현장에서 오랫동안 찍었기에 담아낼 수 있었던 이미지는 무엇인가요?
물레방아 있는 연못을 클로즈업으로 촬영하고 있었는데 잉어가 아주 잘 찍혔어요. 그저 물을 찍으려고 한 건데 마치 제가 찍고 있는 걸 아는 것처럼 프레임 인 아웃을 현란하게 해줬죠. 그 와중에 햇빛은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 하고. 영화에선 나눠놓긴 했지만 한 7분 정도를 찍었는데 계속 잉어와 빛이 리듬을 만들어주는 거예요. 그리고 예고편으로도 쓴 숏의 까치. 까치가 나무들을 이동하다가 프레임 아웃 하는 걸 원경으로 찍었어요. 특히 그건 애초부터 길게 찍은 걸 잘라 뒤죽박죽 섞어서 까치가 프레임에 들어오고 나가는 앞뒤 과정을 바꾸려고 정해놓았기 때문에 만족스러웠어요.

배우 회차를 찍은 후에도 추가로 찍었던 게 있나요?
촬영 끝나고 제일 애먹은 게 사운드였어요. 영화 안에는 공간이 완전히 비어 있는데 실제로 정독도서관 정원에 사람이 굉장히 많아서 찍는 것들 죄다 사람 소리가 다 들어가 있는 거예요. 사람 없을 때를 찾아가서 소리만 따로 딴 게 많아요.
프레임 대부분을 부러 비스듬하게 잡은 게 분명해 보이는 와중에 개미나 고양이를 찍을 때는 프레임이 유독 안정적으로 보입니다.
사실 그것도 어떻게든 비튼 건데도 결국 그렇게 보이더라고요. 아무래도 수평선이 있으면 기운 게 더 도드라지고 없으면 그게 잘 안돼요. 고양이 역시 까치처럼 프레임 아웃을 했는데 또 있네? 느낌 때문에 넣었어요. 조금 유치한 방식이긴 하지만 크게 잡으면 더 중요해 보이니까 가까이서 찍어서 사람과의 위계를 지우기도 했어요. 정독도서관 자주 다니는 분들이 예뻐해주는 고양이에요. 사람이 좀 가까이 있어도 꺼리지 않는 개냥이 같은 애.
오규원 시인님이 살아 계시다면 무엇을 묻고 싶으세요?
<공원에서>를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분의 반응이 정말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