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권 로맨스가 한국을 휩쓸었던 적이 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에 나온 피아노 배틀을 따라하고, <나의 소녀시대> 속 왕대륙을 이상형으로 꼽는 여성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그곳에서 학교를 나온 적이 없음에도 스크린 속 청춘의 한 조각을 나눈 기분을 만끽했다. 경험한 적 없는 시간과 공간을 추억앓이 하며 대만, 중국 청춘 로맨스를 소비했다. 그리고 지금, <청설>부터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까지 우리가 사랑했던 중화권 청춘 로맨스가 다시 한국 감성으로 재해석되어 개봉하고 있다. 오늘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한국판 개봉 기념으로 한국 감성으로 로컬라이징 된 중화권 로맨스 영화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리스트 외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이 있다면 댓글로 공유해주시길.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2012년 개봉한 대만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가 2025년 2월 21일, 한국판 리메이크로 우리 곁에 돌아왔다. 원작은 1990년대 후반, 대만의 한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장난기 많고 공부에는 관심이 없는 소년, 커징텅(가진동)은 친구들과 항상 몰려다니며 말썽을 피우고, 가장 모범적인 여학생 션자이(천옌시)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듯하다. 그러던 어느 날, 교과서를 두고 온 션자이에게 커징텅이 자신의 것을 내어주고 본인은 복도에서 벌을 받게 되면서 두 사람은 조금씩 서로를 인지해가며 서로를 자신의 세계에 편입시킨다. 하지만 영화는 첫사랑의 달콤함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바로 그 ‘불완전함’에 있다. 커징텅과 션자이에는 언제나 미묘한 선이 있다. 장난과 진심, 우정과 사랑, 그리고 함께하는 시간과 홀로 남는 순간들. 그 선을 넘고 싶지만, 쉽게 넘지 못하는 이들의 관계는 어쩌면 누구나 경험해 본 감정일 것이다. 청춘은 어른이 되는 연습이다. 커징텅은 션자이를 좋아하지만 말을 하지 않는다. 대신 유치한 장난을 치고, 괜한 자존심을 세운다. 션자이 역시 그를 좋아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둘 사이에는 언제나 ‘한 걸음’의 거리가 있다.

시간이 지나도 우리는 가끔 그 시절을 떠올린다. 크레딧 올라가면 문득 궁금해진다. “그때 조금 더 용기를 냈다면, 우리는 달라졌을까?” 하지만 영화는 ‘만약’을 남겨둔 채, 우리를 현실에 데려온다. 그리고 이번에 개봉한 동명 한국 리메이크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는 원작의 1994년 대만을 2002년 춘천으로 옮겨왔다. 2002 월드컵이 한창이던 여름을 배경으로 영화는 원작의 본질을 크게 훼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각색이 되었다. 한국판은 장난기 넘치는 고등학생 진우(진영)가 대학을 가고, 군대를 가는 동안 첫사랑 선아(다현)에 대한 마음의 궤도에 집중한다. 진우의 내레이션으로 그의 감정선을 짚어주며 관객이 감정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게 만든다. 원작이 애틋한 느낌이라면 한국판은 풋풋하다. 장난의 정도도 줄어들고 착한 맛이 추가되었다. 자극적인 콘텐츠로 입이 텁텁하다면 슴슴하고 풋풋한 한국판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는 어떠신지.
<청설>

2010년에 개봉한 원작 <청설>은 관계의 섬세한 결을 포착한다. 제목의 “청설”의 의미를 멋대로 청춘의 푸를 청 따위라 단정 지었으나 청설은 “들을 청”과 “이야기 설”을 합친 단어였다. 그리고 영화는 아주 정직하게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 집중한다. 주인공인 티엔커(펑위옌)는 도시락집 아들로 수영장에 도시락 배달을 갔다가 수화로 수영선수 언니를 응원하고 있는 양양(진의함)을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수화와 문자를 섞어가며 조금씩 사랑을 키워간다. 영화가 재밌는 점은 장애와 같은 큰 요소에선 갈등 없이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지만, 동전 하나 때문에 서로를 오해하고 자존심을 세우며 싸운다는 점이다. 양양은 수영선수인 언니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일을 한다. 경제적으로 풍요롭진 않았으나 양양은 성실했고 수영선수인 언니를 열심히 보조하는 건 당당한 일이었다. 그러던 중, 티엔커와 데이트를 할 때 양양은 동전으로 데이트 비용을 내려고 한다. 티엔커는 동전을 뒤적거리는 양양에게 자신이 내겠다며 지폐를 내밀었고, 당당했던 양양은 초라함을 필연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자신을 초라하게 만든 사람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그리고 속으로 이 사람은 나쁜 의도가 없었다는 걸 알지언정) 자신의 세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사람을 기피한다. 두 사람 마음 모두 이해가 되기에 더 현실적이고 애틋하다.

2024년 11월에 개봉한 한국판 <청설>은 원작과 줄기를 같이 한다. 철학과를 나와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던 용준(홍경)이 수영장에 도시락 배달을 갔다 수영하고 있는 동생과 수화로 이야기하고 있는 여자 여름(노윤서)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원작에선 언니 뒷바라지였으나 한국판에선 동생으로 바뀐 점 빼고는 큰 줄기를 같이 한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면서도 수영선수인 동생 가을(김민주)을 뒷바라지하는 게 우선이라 생각했던 성실한 여름은 용준과 구태여 거리를 둔다. 영화는 거의 모든 대사를 수화로 표현하며 “청설”의 의미를 느린 박자로 쌓아나간다. 원작의 마지막 반전까지 충실히 따르되, 눅눅한 여름은 덜어내고 보다 싱그럽고 푸릇한 여름을 그려내는 데 집중한다. 용준과 여름이 로맨스를 확실히 쌓아나가는 시간 동안 로맨스와 상관없던 가을은 착실히 자신만의 성장 서사를 쌓아가는 점도 흥미로운 지점. 원작 <청설>을 사랑하던 팬이라면 리메이크도 꽤 즐겁게 볼 수 있지 않을까. 다만 시대에 맞게 각색하길 기대한 사람이라면 아쉬울지도.
<말할 수 없는 비밀>

2008년에 개봉한 원작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영화를 보지 않았어도 ‘피아노 배틀 씬’으로 이미 한 번쯤은 다들 접했을 테다. 원작은 주걸륜이 감독, 각본, 주연까지 맡았는데 피아노 천재인 주인공 샹룬(주걸륜)이 예술학교에 전학을 오면서 시작된다. 그는 학교의 오래된 음악실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는 소녀, 샤오위(계륜미)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호감으로 급속도로 친해지지만 샤오위는 늘 어딘가로 사라진다. 아무리 물어도 “비밀이니까 묻지 마”라고만 답하는 샤오위지만 결국 비밀은 밝혀지고 그가 20년 전 과거에서 온 사람이며 연주가 끝나면 다시 그의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는 게 밝혀진다. 스토리는 식상하다. 시공간을 초월한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 숱한 클리셰로 터무니없다고 느낄 정도로 영화의 스토리라인은 뻔하게 흘러간다. “아, 다음엔 이렇게 되겠네”를 맞출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아직도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입에서 오르내리는 이유는 심플하다. 유치할 정도로 식상한 이야기를 계륜미는 청순한 모습과 아련하고 귀여운 모습으로 관객을 속수무책 빠져들게 만든다. 거기에 피아노 배틀까지 더해지니 관객들이 영화와 사랑에 빠진 건 어쩌면 당연한 일. 대만 영화 인지도가 매우 낮았던 2008년 당시 15만 관객을 동원한 점을 생각하면 계륜미와 피아노 배틀 파워가 대단했음을 실감할 수 있다.

한국판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처음엔 부진했으나 개봉 3주 차에 입소문을 타 역주행을 시작했고 누적 관객 수 71만 4천 명을 달성하며 한국 영화 박스오피스 1위에 등극했다(2월 20일 기준). 위 영화들과 달리, <말할 수 없는 비밀>은 로컬라이징 하면서 배경과 캐릭터성도 꽤나 달라진 편인데, 고등학생은 대학생으로, 시대는 99년도와 현재로 세팅이 되었다. 수동적이고 아련한 감수성을 지녔던 원작 캐릭터와 달리, 한국판의 김유준(도경수)과 유정아(원진아)는 보다 솔직하고 능동적이다. 유준은 정아를 찾으려고 ‘움직이고’, 정아는 사라질듯한 청순함보다는 밝고 건강하다. 지병이었던 천식도 빠졌다. 시그니처였던 피아노 곡도 오리지널로 변경되었으며, 긴장감을 주던 요소들도 많이 걷어냈다. 원작의 명성을 타고 안전하게 가기보단 이 시대에 맞춰 로컬라이징하고자 했던 감독의 도전과 노력이 곳곳에 엿보인다. 가장 큰 차이는 역시 결말. 만약 아직 원작을 보지 않았다면 한국판을 먼저 보길 추천한다. 비교하면서 보기보단 원작만의 맛을 먼저 즐겨보길.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한국판 <소울메이트>)

주동우와 마사순이라는 걸출한 젊은 배우 두 명을 앞세워, 여성 간의 관계를 그려낸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굳이 ‘우정’이라는 단어를 붙이지 않은 건 이 단어를 붙여버렸을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이미지들 때문이다. 서로 친했다가, 잠시 멀어졌다가 하는 과정을 납작하게 ‘친구랑 멀어짐’으로 표현하고 싶지 않아 조금 더 포괄적인 ‘관계’라는 단어를 붙여보았다. 한국에 들여올 땐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라는 이름으로, 한국판 리메이크도 <소울메이트>라는 제목으로 ‘소울메이트’란 단어를 꼭 집어넣었는데 원작 소설 제목인 「칠월과 안생」이 조금 더 적합해보인다. 끈끈하면서도 너무 가까워 오히려 파열음을 내는 두 여자의 성장담은 낭만적이거나 동화 같은 우정 이상으로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자 숙명이 된 관계다. 칠월(마사순)은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모범생 스타일로, 안정된 미래와 평범한 행복을 추구한다. 평온하고 부드러운 성격처럼 보이지만, 내면에는 늘 자신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반면 안생(주동우)은 자유분방하고 거침없어 보이지만, 가족의 결핍 속에서 스스로를 지켜야만 했기에 어느 곳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고독을 안고 있다. 그럼에도 타고난 생동감과 개성으로 주변 사람을 매료시키는 능력을 갖췄다. 두 사람은 13살에 만나 우정을 쌓아간다. 함께 도망치고, 웃고, 울며 세상에 둘도 없는 친밀함을 나눈다. 하지만 칠월의 남자친구 가명(이정빈)이 등장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미묘한 금이 간다. 많은 청춘 영화가 첫사랑을 중심축으로 삼지만,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는 안생과 칠월의 관계에 방점을 둔다. 질투와 열등감, 복잡한 애증이 얽혀 우정은 사랑 못지않게 치열한 감정으로 그려진다. 죽고 못 살던 사이는 교복을 벗고 서로가 다른 환경에 있을 때 등을 돌린다. 성장은 꿈을 좇고 새로운 기회를 얻는 과정이지만, 동시에 우정과 어린 시절을 뒤로해야 하는 상실의 순간이기도 한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에게 등을 돌린 채 성장한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서로의 삶에 남긴 흔적은 멀어져도, 혹은 재회해도 인생에서 지울 수 없는 존재로 남는다.

한국판 리메이크 <소울메이트>는 원작의 흐름을 가져오되, 원작에서 보여주었던 중국이라는 지형의 특성을 최대한 로컬라이징하는 데 집중했다. 원작에서 두 사람은 중국 남부의 소도시에서 살고 있었으며, 안생은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베이징으로 떠나는 바람에 두 사람이 오랜 시간 만나지 못했다는 설정이 있는데 한국에서는 서울 - 제주도 비행기 타면 1시간이면 가니 하은이 고소공포증이 있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외에도 안생의 전국 유랑은 서울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것으로 바뀌는 등 세심하게 로컬라이징을 진행했다. 원작에서 주동우의 연기가 워낙 독보적이었기 때문에 한국판 리메이크에 우려의 목소리를 표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김다미는 자유분방하고 직관적인 연기로 자신만의 ‘미소’를 구축해냈다. 삼각관계의 비중은 줄어들고, 두 사람의 관계에 좀 더 초점을 맞춘 민용근 감독은 미소와 하은의 관계에 대해 “미소와 하은이 가진 감정이 굉장히 깊잖아요. 그 깊이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없을 것 같아요. 그냥 내 인생의 단 한 사람,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 사람,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사람. 그런 관계가 아닐까 생각해요”라고 답했다. 그의 말처럼, 영화를 보고 나면 잠깐 연락이 끊긴 그 친구에게 오랜만에 문자를 하고 싶다는 충동이 든다. 보는 내내 이젠 친구라 하기 어려운, 하지만 분명 친구였던 얼굴들이 스쳐지나간다. 혹시 그런 인연이 있는지. 만날 수 없는 유년 시절을 다시 보고 싶다면, <소울메이트>를 추천한다.
<먼 훗날 우리>

마지막은 2025년에 개봉 예정인 <먼 훗날 우리>로 마무리 짓고자 한다. 구교환의 첫 멜로 영화 도전으로 주목을 모으고 있는데, 원작과는 다른 결의 캐스팅이라 기대 반 궁금증 반이다. 2018년에 개봉한 원작 <먼 훗날 우리>는 서로 사랑했으나, 결국 함께하지 못했던 두 사람이 먼 훗날 다시 마주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무엇을 과거에 남겨두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는 한때 사랑했던 두 사람, 린젠칭(정백연)과 팡샤오샤오(주동우)가 고향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우연히 재회하면서 시작된다. 현실의 무게를 몸소 겪으며 각자 다른 길을 걸어온 두 사람은 지금, 애써 외면해온 옛 기억을 다시 끄집어낸다. 현재는 흑백으로, 빛을 잃어버렸지만 그들의 과거는 색이 아주 선명하다. 대도시 베이징에서 성공을 꿈꾸며 고군분투하던 소년 소녀들은 연고도, 배경도, 크게 뛰어난 재능도 없지만 막연한 희망과 패기를 품고 있다. 허름한 원룸에 얹혀 살기도 하고, 각종 아르바이트에 매달리며 오늘 하루를 살아내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더 나은 미래를 꿈꾸었던 과거. 화사한 색채로 표현된 과거는 젊음의 생동감과 패기를, 무채색인 현재는 잃어버린 시간과 미완의 감정을 은유한다.

무턱대고 더 나은 내일을 희망했던 두 사람.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팡샤오샤오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생업에 뛰어들었고, 목표는 ‘베이징에 집 있는 남자’와 결혼하는 걸 목표로 산다. 린젠칭은 IT업계에서 성공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지만 결국 거리에서 소프트웨어 불법 복제본을 파는 신세가 된다. 고향에 내려가보니 다들 저마다 제자리를 찾은 것 같다. 서로가 은근히 지고 싶지 않아하며 무의미한 기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성공하지 못한 두 사람은 철저한 약자다. 친구들의 말 한마디와 나의 비굴함, 그리고 이를 외면하고 싶은 마음 하나까지 비수가 되어 돌아온다. 그렇게 모든 의욕을 잃은 린젠칭은 모든 걸 포기한 채 게임만 한다. 그런 그를 볼 수 없었던 팡샤오샤오는 그를 떠난다. 가난 때문에 동질감을 느끼며, 서로를 채워주었던 관계는 지긋지긋한 가난으로 인해 끝이 난다. 그리고 다시 만난 두 사람. 게임 개발로 성공한 린젠칭은 과거 팡샤오샤오가 원하던 베이징에 번듯한 집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다시 하하호호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까. 서로가 원하던 걸 모두 가진 지금, 서로만이 없는 현재는 빛을 잃었다. 현실에 발버둥치다 소중한 사람까지 차진 않았는지. 그런 인연이 있었다면 <먼 훗날 우리>를 보기 전 꼭 휴지를 잔뜩 챙겨놓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