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열했던 올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도 쟁쟁한 후보들이 여럿 몰리면서 접전을 벌였다. 레이스 초반에는 <브루탈리스트>의 애드리언 브로디가 받을 거란 예측이 우세하면서 그의 수상이 거의 확실시되었지만, AI 연기 논란이 터지면서 그의 순항은 잠시나마 주춤했다. <컴플리트 언노운>의 티모시 샬라메는 미국배우조합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으면서 애드리언 브로디의 적수로 떠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사실상 원톱 주연인 <콘클라베>의 랄프 파인즈가 우수한 연기력으로 극을 이끌어 나가면서 호평을 받아 오스카 남우주연상 레이스는 삼파전으로 흘러갔다. 결과적으로는 애드리언 브로디가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이 끝나면서 남우주연상 후보와 관련해 마냥 웃을 수는 없는 일이 일어났다. ‘버라이어티’에 의하면 랄프 파인즈가 이미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고 믿은 익명의 유권자가 나타난 것이다. 랄프 파인즈에게 투표하지 않은 두 명의 유권자는 “그가 전에 수상했기 때문에” 그에게 투표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익명의 두 사람은 모두 랄프 파인즈가 남우조연상 후보로 올랐던 <쉰들러 리스트>로 오스카상을 수상했다고 믿고 있었다. 출중한 연기력으로 말미암아 유명세를 치르는 것이라 봐야 할까. 이번에도 수상이 불발에 그치면서 랄프 파인즈는 자신의 이름을 “Rafe”(레이프, 북유럽식 발음)로 불리기를 선호하지만, 수상하지 못하면 “Ralph”(랄프, 영어식 발음)로 부르겠다는 코난 오브라이언의 농담에 의해 졸지에 ‘랄프’가 되어 버렸다. 아직도 올해의 랄프 파인즈처럼 이미 오스카상을 받은 것처럼 의심(?) 되는 배우들이 여럿 있다. 각자 마음속에 떠오르는 배우들이 다 다를 것이라 생각해 몇 명만 추려서 소개한다. 물론 반드시 한 번 이상은 아카데미 주연상 후보로 선정된 적이 있는 배우에 한했다.
랄프 파인즈

영국 출신의 ‘믿고 보는’ 명배우 랄프 파인즈는 1994년 <쉰들러 리스트>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르면서 처음 아카데미와 인연이 닿았다. <쉰들러 리스트>에서 그는 잔혹한 나치 장교 아몬 괴트 역을 맡아 인간의 어두운 심연을 드러내는 연기를 선보였다. 이후 1997년 <잉글리쉬 페이션트>로 남우주연상 후보에도 지명되었다. <잉글리쉬 페이션트>에서 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극심한 화상을 입고 기억을 잃은 채 발견된 환자 알마시 역을 맡아 기억과 정체성을 찾아가는 인물의 복잡한 내면 연기를 선보였다. 두 영화에서 모두 훌륭한 연기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두 차례 모두 수상에 실패했다.

랄프 파인즈는 30년 가까이 지난 2025년, <콘클라베>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다시 오르면서 숙원을 푸는 듯했으나 이번에도 불발에 그쳤다. 그럼에도 그는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의 다툼과 음모, 배신으로 가득한 이번 영화에서 겉으로는 평온하지만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소용돌이치고 있는 인물을 원숙한 연기로 잘 표현해 냈다.

조니 뎁

독특한 캐릭터 연기로 유명한 배우 조니 뎁은 무려 세 차례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2004년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펄의 저주>의 잭 스패로우 선장, 2005년 <네버랜드를 찾아서>의 J.M. 배리, 그리고 2008년 <스위니 토드: 어느 잔혹한 이발사 이야기>의 스위니 토드 역으로 후보에 올랐지만 모두 수상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의 잭 스패로우 선장 연기는 특유의 과장된 몸짓과 말투로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캐릭터를 탄생시켰지만, 그해의 트로피는 <미스틱 리버>의 숀 펜에게 돌아갔다. <네버랜드를 찾아서>에서 조니 뎁은 평소의 과장된 연기 스타일과 달리 절제되어 있고 화려하지 않은 연기를 선보인다. 하지만 그해 남우주연상은 <레이>의 제이미 폭스가 받았다. 2008년에는 <데어 윌 비 블러드>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명불허전의 연기를 선보여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캐리 멀리건


캐리 멀리건은 영화 <언 에듀케이션>으로 2010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당시 그녀는 1960년대 옥스포드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런던의 10대 소녀 제니 역을 맡아 순수함과 성숙함이 공존하는 연기를 선보였다. 극 중 제니는 매력적이고 나이가 많은 남자 데이빗(피터 사스가드)을 만나면서 상류 사회를 엿본다. 그 과정에서 혼란스러운 제니는 새로운 가능성과 위험을 동시에 경험하면서 자신의 가치관을 재정립한다. 멀리건의 연기는 인물의 변화를 담은 여정을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2010년에는 <블라인드 사이드>의 산드라 블록이 여우주연상을 가져갔다. 멀리건은 비록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이 작품으로 할리우드의 주목받는 신예로 떠올랐다. 또 2021년 <프라미싱 영 우먼>으로, 2024년 넷플릭스 영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으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으나 모두 수상에는 실패했다. 2021년에는 <노매드랜드>의 프랜시스 맥도먼드, 2024년에는 <가여운 것들>의 엠마 스톤이 받았다.
시얼샤 로넌

아일랜드 출신의 배우 시얼샤 로넌은 <어톤먼트>에서 13세의 어린 나이에 의심과 자아도취로 여러 인물의 삶을 주무르는 복잡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어톤먼트>에서의 연기를 인정받아 로넌은 14살에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르며 모두를 놀라게 했다. 이후 그레타 거윅 감독의 페르소나로 영화 <레이디 버드>와 <작은 아씨들>에 모두 출연했다. 그녀는 각 작품에서 성장기 소녀의 복잡한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하며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모두 받았다. 두 영화로 모두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아쉽게도 수상에는 이르지 못했다. 또 2016년 <브루클린>으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것까지 더하면 시얼샤 로넌은 아직 젊은 나이에 3번이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셈이다. <브루클린>으로 오른 2016년에는 <룸>의 브리 라슨, <레이디 버드>로 오른 2018년에는 <쓰리 빌보드>의 프랜시스 맥도먼드, <작은 아씨들>로 오른 2020년에는 <주디>의 르네 젤위거가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