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동복 광고 모델로 데뷔, 아역 배우를 거친 박은빈 배우는 올해로 데뷔 30주년을 맞았다. 그는 연기에 정진해온 긴 시간 동안 사극, 로맨스, 스포츠물, 법정물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었다. 그의 30년은 다양한 장르와 인물을 소화하기 위한 노력으로 가득했다. 박은빈은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직접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위해 손가락에 굳은살이 생기도록 연습했으며, 전성기를 맞게 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는 전문적인 법률 용어가 상당한 대사를 외우기 위해 매일 A4용지에 대사를 적고 스스로 시험을 치르는 노력을 기울였다. 또 가수 지망생 역할을 맡았던 드라마 <무인도의 디바>에서는 녹음할 때마다 7시간, 10시간에 달하는 시간과 노력을 들여 직접 OST를 부르기도 했다. 박은빈은 결코 자신이 <하이퍼나이프>의 세옥과 닮지 않고 피나는 노력을 하지도 않는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작품 <하이퍼나이프>를 홍보하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기 위해 대본과 준비해 온 메모를 펼치며 진심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그와의 인터뷰는 선한 버전의 세옥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박은빈 배우를 만나 이번 작품과 인물 세옥에 관해서 들어보았다.

<하이퍼나이프>의 정세옥은 기존에 박은빈 씨가 연기한 작품 속 인물이나 은빈 씨의 선한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결의 캐릭터인데요. 어떻게 이 작품에 참여하게 됐는지, 그리고 이미지 변신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런 부분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는지 궁금해요.
저는 배우로서 앞으로도 마찬가지고, 다양한 장르와 다양한 역할에 도전하는 것이 재미인 것 같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어요. 같은 것을 반복하는 것에 염증을 느끼는 성격인 것 같기도 하고요. 저는 도전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시도라고 생각하는데요. 이 작품 역시도 ‘새로운 얼굴을 발견했다’고 평가해 주셔서 감사하긴 하지만, 이미지 탈피를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참여한 건 아니었어요. 그냥 ‘안 해본 거 해보는 건 어떨까’라는 가벼운 마음이었어요.
이 작품을 제작자분들로부터 제안을 받았어요. (세옥 역에) 저라는 배우를 떠올렸다고 해서 되게 재미있더라고요. ‘의사인 주인공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죽이기도 한다’라는 강렬한 로그라인이 붙는 이런 역할에 나를 떠올리는 제작자들이 있구나, 또 왜 나에게 제안을 했을까라는 질문을 저희 사장님을 통해서 했었어요. 근데 이 역할을 제가 해야만 신선하고 새로운 느낌을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상상이 안 가기 때문에 그런 세옥을 너무 보고 싶다는 답변을 주셨다고도 하셨어요. 저도 또한 이 대본을 재미있게 봤었기 때문에 해 볼 만하다. 어려운 도전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준비했어요.
정세옥이라는 인물의 캐릭터성이 굉장히 강한데, 연기하면서 어려웠던 점이 있을까요?
사실 저는 연기할 때 연기를 잘 수행할 수 있는 에너지를 비축해 둡니다. 저 스스로 느낌이 오잖아요. 이 이상 내가 일상생활에서 에너지를 소모해 버리면 막상 일을 잘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그런 소진되는 감정이 느껴질 땐 잘 조율을 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이 작품 역시 감정의 극단을 연기하는 때도 많았고, 쉽지 않은 표현을 해야 할 때도 있었지만, 스스로 잘 조율했고요.
오히려 (설경구) 선배님과 호흡을 주고받으면서 늘 새로운 희열을 얻는 느낌이었어서 ‘도파민 도는구나’ 했죠. 근데 또 도파민이 돌아도 되나, 내가 이 상황에 카타르시스를 느껴도 되는 것일까 늘 검열도 했어요. 나는 이렇게 하지만 시청자분들은 어떻게 받아들여 줄까 불안해하기도 하면서 돌다리를 열심히 두들겨 가며 작품에 임했던 것 같습니다.
조금 힘들었던 점은 뒤로 갈수록 물리적인 (촬영) 시간이 부족했어요. 대본으로 8화 마지막에 양 경감(장원형)을 제거하고 선배님을 만나는 장면을 봤을 때, 이 드라마는 이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서 여기까지 달려왔구나가 확 느껴지더라고요.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지 또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도대체 어떤 감정선이지 아리송한 부분도 그 장면을 보면 해결될 수 있겠다고 느꼈어요. 또 그 장면이 있어야 이 작품을 보길 잘했다고 생각하실 수 있을 것 같아서 전 그 장면을 향해 달렸고, 그 장면을 잘 표현하고 싶어서 혼신의 힘을 다했었는데 애석하게도 그날 현장 상황이 막 해가 뜨고 있고 그래서 세옥이와 함께 저도 사투를 벌였었어요. 그래도 어렵게 찍은 만큼 봐주시는 분들이 다행스럽게도 깊은 감정을 함께 공유해 주신 것 같아서 감사했습니다.


정세옥과 최덕희(설경구)의 갈등과 대립이 주로 다뤄지는 데, 두 인물을 맡은 두 배우분의 연기도 대조적이었어요. 박은빈 배우가 발산하는 연기라면, 설경구 배우는 안으로 수렴하는 듯한데요. 동시에 두 인물은 데칼코마니처럼 비슷한 모습도 보였거든요. 두 분이 연기 방식에 대해서 논의하신 부분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 작품은 선배님이랑 대화를 많이 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어요. 특히 7, 8부 대본이 조금 늦게 나오는 상황이었어서, 이 시리즈가 결국 어떤 내용을 전달하는지에 대한 방향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 과제라고 느꼈던 순간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런 부분에서도 그렇고, 어떤 마음으로 이 작품에 참여를 했는지부터 이 작품의 어떤 감각을 시청자분들께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설경구) 선배님과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근데 애초에 관계성 설정 자체가 평범하지 않은 관계니까 우리의 역동하는 감정들도 상식적으로 흐르면 안 된다는 부분에 대한 방향은 같았어요. 또 그렇다고 사람들이 어렵게 느껴지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어요.

세옥은 광기 어린 인물이긴 하지만요. 서 실장(윤찬영) 캐릭터가 세옥의 인간적인 면을 보충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옥이 전적으로 믿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한 것 같아서 서 실장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리하고 연기하셨는지 궁금해요.
사실 저희 작품은 주변 인물뿐만 아니라 세옥이도 마찬가지예요. 어린 시절의 서사에 대해서 깊게 설명을 해주지는 않잖아요. 그러니까 여타의 작품에서 이런 성향을 보이게 된 인물은 부모로부터 어떤 학대를 받았다든지 그런 전사들이 설정된 경우도 있잖아요. 근데 이 작품은 그런 것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관계성으로 이끌어가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 실장과의 관계는 둘의 과거 장면을 보면, 세옥이 수술하고 싶어서 서 실장을 “죽일까. 살릴까” 이런 대사를 하면서 거래를 걸잖아요. 근데 그 장면에서 영상으로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대본의) 지문에는 있었는데요. 한현호(박병은) 선생님이 땀에 젖은 서 실장의 옷을 보고 “선생님 저기 내복 좀 꺼내 주세요” 했을 때, 제가 그 옷들을 봐요. 근데 지문에 ‘빨랫감이 굉장히 가지런히 개어져 있다’라고 쓰여 있었어요. 그래서 그것을 보고 ‘아 이 친구 깔끔하고 정리를 너무 잘하는 친구구나’라고 판단하고, 세옥의 입장에서는 이미 그 찰나에 이 사람의 효용에 대해서 생각했던 것 같아요. 쓸모에 대해서요.

세옥이 수술에 집착하고 천재적이지만 일반 사람들은 따라잡지 못할 만큼 집요한 인물인데, 그런 세옥에게서 본인과 닮은 점을 발견하기도 하셨는지 궁금해요. 박은빈 배우님도 작품 들어가기 전에 굉장히 집요하게 준비하시잖아요.
글쎄요. 세옥과 저의 닮은 점을 찾으려는 노력한 적은 없었습니다. 저는 세옥뿐만 아니라 다른 캐릭터들도 저와는 별개의 인물로 생각해야 연기에 몰입할 수 있더라고요. 왜냐하면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이 캐릭터는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라는 생각을 하면 그 친구와 굉장히 멀어질 것 같더라고요. 완벽하게 타자화하는 것이 저에게는 더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이에요. 그냥 제가 맡은 캐릭터를 세상에 잘 소개하려고 합니다.

수술 장면 촬영은 어떻게 촬영하셨는지 궁금해요. 대역 배우를 쓰기도 했겠지만, 박은빈 배우라면 직접 하고 싶었을 것 같은데, 어느 정도로 조율해서 하셨는지 궁금해요.
제가 4명 살렸거든요. 3화에서 이치다 여사랑 얘기하면서 나석진 (수술 영상) 자료 화면이 나가는데, 그것만 대역분이 했어요. 어차피 손만 보여서 그 부분은 대역 분이 하셨고, 나머지 부분은 다 저한테 하라고 하셔서 제가 했습니다. 그래서 이대목동병원의 교수님께서 휴가를 내시고 현장에 상주해 주셨어요. 수술 장면이 있는 날, 교수님이 실제 수술을 실습하듯이 어떤 거를 하면 된다고 저한테 알려주셨고, 다행히도 신경외과는 세밀하게 작업을 해야 돼서 손의 움직임이 크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한 가지 신경을 썼던 것은 의사마다 수술 스타일이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되게 조심스럽게 하나하나 안전제일로 정돈하고 제거하면서 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최대한 빠르게 하시는 분들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수술 스타일이 성격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고 해서 그렇다면 이왕 천재 역할을 맡은 거 저는 과감하게 하겠다고 했어요. 나름대로 그런 세심한 설정들을 했습니다.

덕희나 세옥이나 둘 다 최고의 의사인데, 테이블 데스(환자가 수술대 위에서 사망함)를 바라면서까지 최덕희가 세옥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던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테이블 데스를 하겠다는 선생님(최덕희)의 아집은 보통의 마음으로는 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 드라마의 엔딩이 두 사람의 승리를 다룬 엔딩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니까 덕희는 본인이 실패한 적이 없어서 다음 단계로 올라가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누군가를 살리고자 하는 마음을 품어본 적도 없을 거 아니에요. 왜냐하면 덕희와 세옥 두 사람은 실력 있는 의사지 좋은 의사는 아니잖아요. 그래서 실력을 넘어서는 감정을 통제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해 그랬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울어봐야지. 통곡을 해봐야지”라고 했던 대사의 맥락이 세옥이 실패를 통해서 그런 두려움을 알았으면 좋겠다 싶어서 그런 것 같아요.
근데 그런 덕희의 아집이 성공한 부분은 저한테 진짜 눈물을 나게 했잖아요. 무릎 꿇게 하기도 했고요. 결국 선생님이 원하는 대로 일정 부분 이루셨으니 두 사람의 승리인 것 같아요. 대본 시작 부분에 작가님께서 아예 써 놓으셨어요.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의 ‘나를 울게 하소서’가 시작된다”고요. 첫 음악을 지정해 주셨어요. “수술실로 가는데 이 음악이 나오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작가님께 여쭤봤었는데, “이 이야기는 결국 덕희가 세옥을 울리는 이야기가 될 거예요”라는 말에 감명을 받았었거든요. 그래서 결국 그 방향성을 생각하고 가면 되겠다고 생각했죠. 아쉽게도 실제 본편에서는 이 음악은 쓰이지 않았어요.
세옥에게는 뇌에 대한 호기심, 수술에 대한 열망이 이 사람의 동력이라면 박은빈 배우에게 연기에 대한 동력은 무엇인지 궁금해요.
저의 연기 동력은요. 전 인간을 이해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인간을 이해하려고 시도를 했을 때 어떤 깨달음을 얻는 순간들이 있잖아요.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구나 이렇게 발견해 나가는 순간들이 재밌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의 캐릭터들도 친구라고 생각해요. 제 마음속에 있는 여러 방 안에 살고 있는 캐릭터들이 늘 저와 함께하는 거죠. 왜냐하면 그 캐릭터들이 저의 성장도 이루어냈기 때문에 그런 애틋함이 있는 것 같아요.
캐릭터는 작가님이 써주셨지만, 사실 그 캐릭터를 해석하고 이해해서 시청자분들께 보여드리는 건 배우의 몫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세옥이도 제가 만난 세옥이는 이랬다고 소개를 해드린 거잖아요. 그런 소개가 늘어날 때마다 나뿐만 아니라 같이 사랑해 주시는 분들이 있다는 것이 큰 힘이 되는 것 같아요.

박은빈 배우에게 있어 연기는 세옥처럼 천부적인 재능인지 아니면 피나는 노력인지 궁금해요.
둘 다 아닌 것 같아요.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그렇다고 제가 피나는 노력을 하는 인물은 아니거든요. 사람마다 기준점이 다를 거라고 생각해요. 근데 제가 성실하게, 엄청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 주시는 분들이 많은데, 저는 저의 나태함을 알잖아요. 저의 게으른 부분도 분명히 알고 있고 해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만은 아닌데, 오해하시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해요. 저도 저의 안녕도 지키면서 또 직업적으로 맡은 임무를 위해 잘 표현하면서 조율하고 있어요. 또 (시청자분들을) 재미있게 해드리고 싶은 욕심도 분명히 있고요. 저도 시행착오도 겪으면서 성장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장할 때는 어떤 방식을 선호하세요? 덕희와 같이 절벽에서 떨어뜨리는 사자처럼 강하게 키우려고 할 수도 있잖아요.
계단식 성장이요. 물론 갑자기 급격하게 실력이 올라가는 때가 있잖아요. 확 깨달음을 얻을 때도 있고요. 하지만 그게 언제나 상향 곡선을 그리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뚜벅뚜벅 길을 걷다 보면 이게 계단이었구나 생각할 수 있게. 당장의 진전은 없더라도 언젠가를 위해 비축을 해 둬야 제 것이 되는 거니까 그 순간을 기다리면서 살아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