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 청년 10명 중 6명은 연애를 하지 않으며, 그중 70%는 자발적으로 연애를 멀리하고 있다(인구보건복지협회, 2022). Z세대의 4명 중 1명은 연인이 ‘삶에 없어도 되는 존재’라고 응답했다(대학내일20대연구소, 2024). ‘사랑은 결국 호르몬의 장난일 뿐’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 말이 주는 씁쓸함까지는 떨치기 어렵다.
연애가 멀어졌다고 사랑까지 함께 멀어진 걸까?
영화 <바이러스>는 이 질문에 동화적인 상상력으로 답한다. 주인공 옥택선(배두나)은 매사 무기력하고 우울한 인물이다. 가족의 성화에 억지로 나간 소개팅에서 의료재단 연구원 남수필(손석구)을 만나고, 이후 그의 삶에 서서히 변화가 찾아온다. 평소 같으면 꺼냈을 리 없는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알록달록한 원피스를 입고, 갑작스레 동창 김연우(장기하)를 찾아간다. 연우는 단체 문자만 주고받던 옛 지인의 등장에 당황하면서도, 거래 성사를 기대하지만 택선의 시선은 의외의 방향을 향해 있다. 그런 가운데, 방역복을 입은 사람들이 이들을 에워싼다. 수필이 남긴 메시지를 통해, 택선은 자신이 치사율 100%의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해당 바이러스의 권위자인 이균(김윤석)과 만나 치료를 시작한다.

영화 속 ‘톡소 바이러스’는 실제 기생충 ‘톡소플라즈마 곤디(Toxoplasma gondii)’에서 착안했다. 고양이를 숙주로 삼는 이 기생충으로 인해 발생하는 ‘톡소플라즈마증’에 감염되면 시야가 흐려지고, 발열과 호흡 곤란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극 중 이균은 이 바이러스에 대해 “감염된 쥐는 스스로 고양이에게 잡아먹히려 한다”고 설명한다. 영화는 이 설정을 확장해, 사랑이라는 감정이 쾌감을 주는 동시에 시야를 좁히고, 상대를 향한 자기희생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감염의 단계와 증상, 후유증까지의 서사는 사랑에 빠질 때의 심리적 변화와 절묘하게 겹쳐진다.
지난 28일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강이관 감독은 “바이러스를 개인적인 시선에서 풀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많은 작품이 바이러스를 재앙의 소재로 삼았다면, <바이러스>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매개로 바라본다”며, 기존 재난 서사와의 차별점을 강조했다.

배우 배두나는 “엉뚱하면서도 공감 가는 시나리오였다”고 밝혔다. “그간 <킹덤> 등 어두운 장르물에 주로 출연해 왔기에 밝은 에너지의 작품이 간절했다. 이 작품이 스스로를 환기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고 전했다.
이균 역을 맡은 김윤석은 “상업 영화가 가지는 전형에서 벗어난 특별한 시나리오였다”며 “장르적으로 치우쳐 있는 흐름에서 자유로운 이야기 구조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상업영화 데뷔작이기도 한 장기하는 “연기 경험이 전무했고 분량도 예상보다 많아 처음엔 망설였다. 그런데 김윤석 형님이 ‘우리가 다 판을 잘 깔아줄 테니, 그냥 놀다 간다는 생각으로 해보라’고 말해주셨다”며, 출연을 결심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배우들의 빛나는 순간이 담겨 있다”는 강이관 감독의 말처럼, <바이러스>는 장르적 상상력을 배우들의 연기로 설득하는 데에 집중한다.

손석구는 감염 전과 후의 변화를 명확하게 대비시키며, 작품 전체의 흐름을 끌어낸다. 그의 모습을 통해 관객은 추후 택선의 감염과 그 영향력을 수월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손석구는 짧은 등장에도 전체 서사의 핵심을 쥔 인물로 기능하며, 장르의 톤을 조율하는 데에 성공한다.
장기하는 연우라는 현실적인 인물을 통해 바이러스 사태에 대한 당황스러움을 자연스럽게 표현한다. 연우의 당혹감과 혼란, 그리고 택선과의 밀고 당기는 긴장 속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장기하의 감각이 인상적이다.

김윤석은 과장된 설정 안에서도 담백한 태도로 세계관의 중심을 잡는다. 이균이라는 인물의 진심과 논리를 관객이 신뢰할 수 있게 만드는 연기력은 극의 밸런스를 지탱하는 핵심 요소다.
무엇보다 배두나는, 감정과 신체를 모두 사용하는 연기를 통해 바이러스에 잠식되어 가는 인물의 내면을 설득력 있게 구축한다. 망설임과 들뜸, 두려움과 사랑이 오가는 얼굴의 변화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의 생물학’을 압축한 이미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