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촬영 후 무려 6년 동안 세상에 나오지 못한 영화 <바이러스>가 오는 7일 개봉한다. 영화 <바이러스>는 이유 없이 사랑에 빠지는 치사율 100% 바이러스에 감염된 택선(배두나)의 예기치 못한 여정을 담은 영화다. 이 작품이 오랜 기간 공개되지 못한 이유는 지난 2020년부터 약 3년간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 팬데믹. 진짜 바이러스가 찾아온 것이다. 영화는 그렇게 촬영이 끝나자마자 끝을 알 수 없는 기다림의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지난 30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만난 영화 <바이러스>의 배우 배두나를 만나 당시의 심정을 물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 한국 오셨더라고요. (씨네큐브 개관 25주년 특별전 참석차 내한한 일본의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배우 배두나와 2010년 영화 <공기인형>으로 첫 인연을 맺어 끈끈한 우정을 쌓아오고 있다.)
어제 한국에 왔다고 문자가 왔어요. 제가 오늘 인터뷰 일정이 있다고 했더니 ‘잠깐 가겠다’고 하시더니 진짜 와주신 거예요. 딱 10분 정도 인사 잠깐 했어요.
<바이러스>를 촬영한 게 2019년이에요. 무려 5년 전인데요. 5년 전의 자신을 보니까 어떤가요?
신선하고 풋풋하고 젊더라고요. (웃음) 좋았어요. ‘되게 귀여웠구나’ 생각했어요.
<바이러스> 촬영을 마치자마자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휩쓸었죠. 참 공교로운 타이밍인데요. <바이러스> 팀이 그 누구보다 당황스러웠을 것 같아요.
이 작품이 한 연구소에서 시작된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감염시키는 이야기잖아요. 핫핑크색 방역복을 선택한 것도 이게 ‘판타지’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도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이게 더 이상 판타지가 아닌 게 되어버리니까 당황스러웠죠.

‘배두나’하면 절제된 연기에 특화된 배우라는 인상이 있어요. 그런데 이번에 <바이러스>의 택선을 맡아서 과장된 감성을 담은 연기를 보여주셨더라고요.
제가 20대 초반에는 엄청 발랄한 연기를 많이 했어요. MBC 드라마 <위풍당당 그녀>라고 아세요? 강동원, 신성우, 김유미 씨랑 같이 한 작품이요. 요즘 친구들은 절대 알 수 없는 저의 모습이 담겨있죠. (웃음) 저는 사실 발랄한 연기를 상당히 즐겨 하던 배우이기도 해서 이번 작품이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오랜만에 나사 풀려서 연기했어요. 특히나 감염된 상태를 연기하는 것이니까 어떤 걸 해도 이해가 되잖아요.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웃음)
맞아요. 데뷔 초에는 밝고 통통 튀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셨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연기 스타일이 많이 달라지셨어요. 그 이유가 있나요?
감정을 어느 정도 절제하느냐, 드러내느냐는 사실 감독님이 결정하시는 거예요. 저는 감독님의 의도대로 수위를 조절하는 편이죠. 저에게 있어 연기의 사이즈를 결정하는 것은 스크린의 크기예요. 극장의 거대한 스크린에 담길 때에는 절제하는 편이에요. 배우의 눈만 봐도 뭘 느끼는지 다 보이니까요. TV 드라마로 가면 조금 더 친절하게 연기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관객들이 설거지를 하면서 볼 수도 있잖아요. 이제 제가 연구해야 하는 지점은 핸드폰. (웃음) 작은 화면에서 보시는 분들을 위해서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는 제가 고민해야 하는 지점이죠.
*이하 영화 <바이러스>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연기하신 옥택선은 꿈도, 사랑도 이루지 못하고 방황하는 인물이에요. 엄마와 동생의 등쌀에 못 이겨 소개팅을 나가면서도 상처받을까 봐 숨어버리곤 하죠. 캐릭터 구성을 할 때 전사를 촘촘히 만든다고 알고 있는데 배우님은 택선이 어떠한 과거를 가졌다고 생각하세요?
옥택선이 감염 후 ‘감염 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하잖아요. 지금이 너무 좋다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요. 택선은 ‘왜 과거의 삶이 싫었을까’를 고민했어요. 혼자만의 상상인데요. 아빠의 부재에서 오는 문제가 있었을 것 같아요. 실제로 아빠와 관련된 장면이 있기도 했거든요.
연애는 많이 해봤을까요?
거의 못해봤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썸까지는 있어도 연애로 잘 진행이 안되었던 사람이요. ‘한 번 상처받으면 80일 동안 집 밖을 안 나갈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하잖아요. 그런 사람이라면 연애를 하는 게 정말 힘들 것 같거든요. 겁나서.



택선은 성의료재단 연구원 수필(손석구), 자동차 딜러가 된 동창 연우(장기하), 톡소 바이러스 연구 권위자 균(김윤석)을 차례로 만나요. 각자 다른 매력의 남자들이라 재미있었어요. 세 명의 남자 배우들이 이 지점을 잘 메워준 것 같더라고요. 손석구, 장기하, 김윤석 세 배우와 함께 호흡을 맞추어 본 입장에서 각 배우가 지닌 특징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손)석구 씨는 드라마 <센스 8>, <최고의 이혼>을 이미 같이한 배우예요. 그 친구는 반짝하는 설정을 잘 하는 것 같아요. 캐릭터가 돋보일 수 있는 설정을 잘 녹여내요.
(장)기하 씨는 너무 신기한 지점인데 연기 경험이 짧으신데도 연기하는 것 같지가 않아요. 노래할 때와 마찬가지로 말하는 것 같아요. 또 다른 역할을 맡았을 때 어떨지 궁금한 배우예요.
(김)윤석 선배는 존재만으로 현장 공기가 달라져요. 예전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이 하신 말씀인데요. 유능한 축구 선수는 공을 마치 하늘에 드론을 띄우고 보는 것처럼 바라본대요. 윤석 선배가 그런 느낌이에요. 영화를 관통해서 전체를 아우르는 통찰력이 있어요.

배두나는 ‘세 남성 캐릭터 중 어떤 남성에게 끌리느냐’는 질문에 ‘이균’을 꼽으며 MBTI 이야기를 꺼냈다. “이균은 T인척하지만 굉장히 F라고 생각하거든요. 우울증 치료제를 개발하는 이유가 동생 때문이라는 것만 봐도 그래요.”
배우님도 굉장히 F인 것 같아요. (배두나의 MBTI는 ‘INFP’이다.)
저는 대놓고 F예요. (웃음) 한 번쯤은 T로도 살아봤으면 하는데… 그런데 제가 F여서 먹고사는 것에 있어서 도움이 돼요.
다른 MBTI로 살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어떤 MBTI가 되고 싶으세요?
ENTJ요. 저는 내일 여행 가도 오늘 밤에 대충 짐을 싸는 스타일이라 계획적으로도 살아보고 싶고 외향적으로도 살아보고 싶어요.
다 반대인데 N은 그대로네요.
N은 포기하고 싶지 않아. (웃음)
상상력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나 봐요?
제 직업에 큰 도움이 되고요. 상상력이 없으면 삶이 건조할 거 같기도 하고…. 이러다가 S형 안티 생기는 거 아니에요?(웃음)
S들은 현생을 사느라 관심이 없지 않을까요?
아, 그렇구나. (웃음)

주로 어떤 상상을 하세요?
글이나 책, 영화에 몰입하는 건 당연하고 길을 가다가 길이 꺼지거나, 다리가 무너지거나 하는 상상이요.
왜 그렇게 무서운 상상을 하는 걸까요?
제가 학생 때 성수대교 붕괴 사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났었거든요. 그게 트라우마로 남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런 상상을 많이 해요. 그래서 높은데 올라가는 것도 잘 못하고…
극 중에서 ‘꿈’이야기를 하잖아요. 배우님의 어릴 적 꿈은 뭐였어요?
저는 엄마가 되고 싶었어요. 이제는 아니지만요. 사실 저는 배우로서 정말 럭키비키한 사람이잖아요.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상도 많이 타고 정말 저만큼 운이 좋은 사람이 없잖아요. 그런데 사실 제 꿈은 엄마이긴 했어요. 저는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매우 아름다워 보여요.
사진, 영상, 일본어, 영어 등 다양한 분야를 독학한 걸로 잘 알려져 있어요. 무언가를 끊임없이 배우는 것을 즐기는 편인 듯해요.
제가 스스로 발견하고 파고드는 것을 좋아해요. 언어는 정말 운이 좋게도 언어를 배우기 전에 이미 그 나라에 가서 일을 하는 상황이 왔어요. 보통은 언어를 배워야 일을 할 수 있잖아요. <린다린다린다>(2005)에서는 일본어를 못하는 한국 유학생 역할이었어요. <공기인형>도 대사가 그렇게 많지 않았거든요. (웃음) 그런데 작업을 하다 보니까 말이 들리더라고요. 영어 같은 경우에는 <클라우드 아틀라스>(2012) 찍고 영어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한 3년 정도 영국에 갔어요. 거기에서 과외를 받았죠. 많은 분들이 이때의 공백을 잘 모르세요. 제가 틈틈이 화보 촬영이나 홍보 차 한국에 왔거든요.

<린다린다린다>가 곧 재개봉해요. (이 작품은 배두나의 일본 진출작이다. 오는 8월 4K 리마스터링으로 재개봉 예정이다.)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아요.
너무 특별해요. 벌써 20년 전이잖아요. 그 사이 저를 좋아해 주시는 팬들이 생겼는데 그 작품을 못 분 분들이 많아서 안타까웠거든요. 더 뿌듯한 건 지금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고 작품이 회자가 된다는 거예요. 역시 내 안목이 좋았다. (웃음)
최근에 차기작을 천천히 정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는데 다음 작품은 아직도 미정인가요?
아직도 못 정했어요. 차기작을 고르는 데에 신중해져야 할 것 같아요. 제가 회복 탄력성이 예전보다 떨어진 것 같아요. 예전에는 하나 끝나면 바로 다음 작품, 다음 작품 계속 그렇게 찍어도 괜찮았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그러면 회복이 안되더라고요. 제가 작품을 하면서 스스로를 달달 볶나 봐요.
다음 작품이 더 기대가 되는데요. 배두나의 긴 커리어 여정에서 <바이러스>라는 작품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관객분들에게 배두나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특히 드라마 <비밀의 숲>으로 저를 처음 보신 분들이라면 새로운 모습이라고 생각하실 것 같아요.
팬의 세대를 가르는 기점이 <비밀의 숲> 인가 봐요.
얼마 전에 옆에 있던 친구가 <비밀의 숲>으로 저를 알았다고 하길래 봉준호 감독님의 영화 <괴물>(2006) 봤냐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못 봤다는 거예요. 저희 세대는 <괴물> 안 본 사람이 거의 없잖아요. 그래서 '몇 년생이에요?' 그랬더니 2005년생이라고 하더라고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