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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영화 〈해벅〉으로 돌아온 가렛 에반스의 〈레이드〉 시리즈에 대하여

주성철편집장
〈해벅〉〈레이드〉
〈해벅〉 포스터

“한 잔 마시고 또 한잔 마셔도 난 안 취해. 마시자, 마셔. 술잔을 채우고 비우는 것에 끝은 없어. 인생에서 작은 실패는 아무것도 아니야. 뜻을 잃지 마! 뜻을 잃지 마! 기회는 얼마든지 올 테니까”. 영화 <해벅>(Havoc)의 주인공 톰 하디가 거리를 휘청휘청 걸을 때 난데없이 들려온 이 중국어 노래에 눈이 번쩍 뜨였다. 바로 홍콩 누아르의 걸작,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1986)에서 주윤발이 적룡의 복수를 위해 홀로 풍림각에 쳐들어갈 때 들려온 대만 가수 진소운의 ‘면실지’(免失志)가 아닌가.

 

 

〈해벅〉〈레이드〉
‘면실지’를 부른 대만 가수 진소운(왼)과 〈영웅본색〉 풍림각 습격신

면실지(免失志)는 앞서 언급한 가사처럼 ‘뜻을 잃지 마’라는 뜻으로, 친구 송자호(적룡)의 복수에 성공하고 강호의 떨어진 의리를 다시 복원하고야 말겠다는 소마(주윤발)의 당당함을 잘 드러내는 곡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풍림각의 악당들을 남김없이 처리했다고 생각하고 여유롭게 성냥개비를 입에 문 그 순간, 상대 보스의 마지막 한 방에 다리를 잃고야 만다. 오래전부터 홍콩영화 마니아로 유명한 가렛 에반스 감독은 <해벅>의 톰 하디가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 헤매는 그 순간에, 과거를 청산하고 깨끗한 삶을 살고자 하는 그 ‘뜻’을 담아 이 곡을 삽입한 것이다.

 

 

〈해벅〉〈레이드〉
〈해벅〉

지난 4월 25일 공개되어 여전히 넷플릭스 영화 시청 순위 상위권을 지키고 있는 영화 <해벅>은 인도네시아에서 만든 <레이드> 1, 2편과 TV 시리즈 <갱스 오브 런던>으로 유명한 웨일스 출신 가렛 에반스 감독의 신작이다. <해벅>의 부패 경찰 워커(톰 하디)는 이혼하고 가족과 떨어져 지내고 있다. 다시 가족과 만나기 위해 마음을 고쳐먹고 싶지만, 그게 여간 쉽지 않다. 그의 부패한 경찰 일당이 새로운 마약 절도 사건에 휘말리고, 그로 인해 중국 삼합회 회장의 아들이 죽게 된다. 하필 선거를 앞둔 정치인 보몬트(포레스트 휘태커)의 아들도 이 사건에 연루된다. 워커는 정치인의 아들을 구해 깨끗한 경찰이 되려고 하는데, 복수를 포기하지 않는 삼합회가 뒤섞여 통제 불능의 거대한 전쟁이 벌어진다.

 

〈해벅〉〈레이드〉
〈해벅〉

주인공이 처한 ‘대혼란’이라는 뜻의 ‘Havoc’을 새삼 상기시키는 클라이맥스 액션신은 각종 무기와 맨몸 액션, 그리고 하드고어에 가까운 장면들이 이어지며 <레이드> 시리즈로부터 시작된 가렛 에반스 특유의 과잉의 액션 미학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영국에서 연출한 장편 데뷔작 <풋스텝스>(2006) 이후 인도네시아에서 만든 영화 <레이드> 시리즈, 그리고 호러 스릴러 <복수의 사도>(2018)를 지나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만든 드라마 <갱스 오브 런던>(2020) 등 가렛 에반스의 현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바로 <레이드> 1편과 2편이다.

 

 

〈해벅〉〈레이드〉
〈레이드〉

아드레날린이 솟구친다는 표현으로도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랄까. 각각 2011년과 2014년에 만들어진 가렛 에반스의 <레이드> 연작은 과잉의 매혹으로 점철된 아날로그 액션영화의 결정판이다. 부서지고 찢기며 몸과 몸이 맞부딪히는 극한의 액션은 스턴트와 실제 격투의 경계를 초월하여 두 눈을 의심하게 할 뿐만 아니라, 폭주기관차처럼 질주하는 그 리듬은 보는 이를 기진맥진하게 만든다. 그야말로 영화 속 인물도 그걸 보는 관객도 하나가 되어 산화할 것 같은 느낌이다. 단지 토니 자의 <옹박: 무에타이의 후예>(2003)로 촉발된 동남아시아 액션영화의 지난 20여 년의 시간을 집대성한 것을 넘어(물론 거기에는 홍콩 액션영화가 구축한 오랜 전통의 흡수와 더불어 수평트래킹의 인상적인 장도리 액션신으로 기억되는 한국영화 <올드보이>까지 포함될 것이다), 타란티노의 <킬빌> 연작(2003, 2004)으로부터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드라이브>(2011)에 이르는, 아시아 액션영화의 스타일과 감성을 수혈받은 백인 남성 감독의 액션에 대한 욕망을 극대화한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해벅〉〈레이드〉
〈레이드〉

<레이드: 첫 번째 습격>(2011, 이하 <레이드>)은 마약 거래로 악명 높은 갱단 보스 타마(레이 사헤타피)를 제거하라는 비밀작전 수행에 나선 SWAT(특수기동대) 정예요원들의 이야기다. 그 요원들 중에는 임신한 아내를 두고 떠나온 라마(이코 우웨이스)가 있다. 그런데 그들이 침투해야 할 타마의 거처는 지난 10년간 경찰을 포함해 외부인의 습격을 단 한 차례도 받아본 적 없는 난공불락의 낡은 30층짜리 아파트다. 1층부터 한 층씩 올라갈 때마다 삼엄해지는 경계를 뚫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순식간에 외부와 연결된 모든 출입문은 완벽하게 봉쇄되고, 설상가상으로 경찰 당국의 지원도 끊기면서 그들은 건물 내에 철저히 고립된다. 그들은 임무 수행이 아니라 오직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한다. 한편, 타마에게는 살인을 오락처럼 즐기는 매드독(야얀 루히안)과 조직 전반의 ‘브레인’ 앤디(도니 알람시야)라는 두 심복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운명의 장난처럼 앤디는 라마의 친형이다. 앤디는 고립된 동생의 탈출을 돕기 위해 몰래 아파트 안을 누빈다.

 

 

 

〈해벅〉〈레이드〉
〈레이드〉

아시아 액션영화의 열혈 팬임을 인증한 가렛 에반스의 두 번째 장편 극영화이자, 인도네시아에 처음 촬영한 전작 <메란타우>(2009)가 자카르타의 도심 곳곳을 누볐다면, <레이드>의 모든 액션은 오직 아파트 안에서만 벌어진다. 중요한 것은 비슷한 소재와 설정이라 하더라도, 이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조율하는 가렛 에반스의 재능이다. 먼저 한정된 공간으로 인해 단조로울 수 있는 패턴을 다채롭고 영리하게 변주하고 있다. 경찰의 침투를 알게 된 타마가 “세입자 여러분, 바퀴벌레들이 집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해충 박멸에 나섭시다”라고 방송으로 알린 뒤 등장하는, 각기 다른 개성의 적들은 인상적이다. 경찰에 체포당해 뒤로 팔이 묶여 있던 한 남자가, 마치 서커스를 하는 것처럼 그 양 팔을 유연하게 360도로 회전시켜 뺀 다음 테이블 밑의 칼을 꺼내 공격하는 장면이 첫 번째다. 마치 총기 액션이 주가 되는 것처럼 진행되던 영화에, 많은 팬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기존 태국풍의 무에타이 액션영화 리듬을 선사하는 순간이다. 맨손 격투의 거친 박력과 함께 그때부터 전세는 역전된다.

 

 

〈해벅〉〈레이드〉
〈레이드〉 촬영현장의 가렛 에반스 감독

당시 난데없이 찾아온 인도네시아 액션영화 <레이드>를 완성하는 것은, 무에타이 혹은 실랏(Silat)에 기반을 둔 동남아 액션영화라는 큰 그림 위에서 토니 자(1976년생)를 잇는 새로운 액션스타, 1983년생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출신의 이코 우웨이스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인도네시아 전통 무술 실랏을 익힌 그는 2005년 ‘펜칵 실랏’(Pencak Silat) 축제에서 1위를 차지한 실제 유단자다. 가렛 에반스는 지난 2007년 인도네시아의 문화유산을 소개하는 <인도네시아의 비술: 펜칵 실랏>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실랏에 매료됐고, 이를 통해 알게 된 이코 우웨이스를 주연으로 내세워 인도네시아에서 이코 우웨이스의 영화배우 데뷔작이기도 한 <메란타우>를 만들었다. 말하자면 가렛 에반스는 실랏을 접하게 되면서 전혀 다른 영화 인생을 살게 된 셈이다. 실랏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필리핀 남부 등 주로 남동아시아 일대에 퍼져 있는 무술로서 특히 인도네시아에서 많이 수련되는 스타일을 펜칵 실랏이라 부른다.

 

 

〈해벅〉〈레이드〉
〈메란타우〉

실랏은 <본 아이덴티티>(2002)를 기점으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여러 히어로들에 이르기까지, 이후 세계 격투 액션영화의 흐름에서 무척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가령 <본 아이덴티티> 시리즈에서 무술을 맡은 제프 이마다는 제이슨 본(맷 데이먼)이 구사하는 무술에 대해 필리핀 무술 ‘칼리’(Kali)를 중점적으로 사용했다고 얘기한 적 있다. 제프 이마다는 <사망유희>(1978)에 등장하는 건물의 3층에서 이소룡을 기다리던 필리핀 출신 고수 댄 이노산토의 제자이기도 하다. 또한 <아저씨>(2010)에서 원빈이 구사한 무술은, 제작진에 따르면 실랏과 칼리를 장면에 맞게 결합한 형태다. <레이드> 개봉에 앞서 실랏이 국내에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 또한 <아저씨>를 통해서였다.

 

 

〈해벅〉〈레이드〉
〈본 얼티메이텀〉(왼)과 〈아저씨〉

이코 우웨이스와 야얀 루히안은 <메란타우>에서도 호흡을 맞춘 바 있는데, 전편보다 강력한 액션을 요구한 가렛 에반스의 요구로 그들은 거의 공동 무술감독처럼 3개월에 걸쳐 각종 무술 동작들을 구상했다. 동작 하나하나 마무리될 때까지 비디오 스토리보드를 만들어 활용했고, 실내에서의 근접 격투가 많은 만큼 실랏 외에도 상체의 힘을 집중적으로 이용하는 유도와 암바 등 관절을 무지막지하게 다루는 MMA(종합격투기) 기술도 끌어들였다. 현장에서의 안전은 중요했다. <레이드> 엔드 크레딧에는 무려 12명의 의사 이름이 뜨는데, 그들은 보통 2-3명씩 번갈아가며 촬영장에 대기하며 만약의 사고에 대비했다.

 

 

〈해벅〉〈레이드〉
〈레이드〉

그렇게 <레이드>는 단순히 공권력과 갱의 대결을 넘어 ‘원초적’인 것을 향한 공포와 매혹으로 나아간다. 마약제조실에 들이닥치면 거기서 더 나아간다. 카메라가 중력을 잊은 것처럼 회전하고 몸과 몸이 제멋대로 꺾이고 날아간다. 그때쯤 라마의 체력은 고갈되어야 정상일 텐데 오히려 더 야수처럼 질주하여 킥을 날린다. 이제 드디어 나타난 매드독은 “총질은 재미가 없어. 마치 패스트푸드를 먹는 것 같지. 맨주먹, 이게 진짜야. 심장이 박동치고 쾌감이 솟구쳐”라고 말한다. 이른바 ‘육체미’의 향연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최신작 <해벅>에 이르기까지, 가렛 에반스가 던지는 <레이드>의 주된 콘셉트이자 핵심 테마이기도 하다.

 

 

 

〈레이드〉
〈레이드〉

‘격투 액션의 결정판’을 꿈꿨던 가렛 에반스의 야심은 록밴드 린킨 파크의 멤버이자 프로듀서인 마이크 시노다가 참여한 영화음악으로도 확장됐다. 그 폭발적인 사운드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풍기는 폐소공포증과 딱 맞아떨어졌다. 당시 마이크 시노다는 SNS를 통해 “작업을 끝내고 싶지 않은 스릴이 있는 영화”였다며 <레이드> 사운드트랙 작업에 참여한 흥분을 표하기도 했다. 완성된 영화에 대한 서구 언론의 반응 또한 인상적이었다. 이제 고인이 된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액션에 대한 접근법이 보기 드물게 시니컬하고 야수적이며, 이코 우웨이스가 연기하는 라마는 관객들의 아바타나 다름없다”며 거의 비디오게임을 보는 것 같은 1인칭 시점의 액션 플롯에 대해 언급했다. ‘빌리지 보이스’의 어네스트 하디는 “지난 몇 년간 본 액션영화들 중 가장 독특한 분위기를 보여준다”며 “전체적으로 할리우드 저예산 액션영화를 떠올릴지 모르겠지만, 그보다 더 아이디어가 넘치는 정직하고 직선적인 영화”라고 했다.

 

 

이코 우웨이스(왼)와 가렛 에반스. 원근법으로 인한 차이가 아니라 가렛 에반스는 실제로 2미터 키의 거구다.
이코 우웨이스(왼)와 가렛 에반스. 원근법으로 인한 차이가 아니라 가렛 에반스는 실제로 2미터 키의 거구다.

<레이드>의 혜성과도 같은 등장은, <옹박> 3편인 <옹박: 마지막 미션>(2010)으로 토니 자의 <옹박> 시리즈가 마무리된 것과 묘하게 겹친다. 토니 자는 <옹박>을 함께 했던 프라챠 핀카엡 감독과 다시 만나 <똠양꿍2>(2013, 국내엔 <옹박: 리턴즈 오브 레전드>로 개봉했다)로 돌아오기까지 무려 3년을 쉬었다. 뤽 베송 감독이 이연걸을 캐스팅하여 <키스 오브 드래곤>(2001), <더 독>(2005) 등을 제작한 것처럼 토니 자 역시 뤽 베송 사단 영화에 출연하며 해외에 진출할 것이란 소문이 무성했으나 결국 성사되지 못한 것이다. 이코 우웨이스의 <레이드>의 등장과 함께 동남아 액션스타의 세대교체가 이뤄졌다는 이슈가 그리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더구나 <옹박>의 인기에 힘입은 수많은 무에타이 소재 영화들이 더 이상 해외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국 영화시장에만 머무를 때, 인도네시아에서 웨일스 출신의 한 백인 감독이 만든 ‘실랏’ 소재 액션영화 <레이드>의 성공은 기적과도 같았다. 이른바 ‘동남아 액션영화’의 파괴력과 생명력이 ‘10년 천하’로 끝나간다고 여겨질 때쯤, 소니 픽쳐스 클래식(Sony Pictures Classics)의 배급으로 북미 시장 진출에도 성공하며 새로운 불을 지핀 것이다. 특히 2008년 설립된 저예산 B무비 제작사인 ‘XYZ 필름’은 <레이드>를 통해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후 <레이드 2>를 지나 최신작 <해벅>에 이르기까지 가렛 에반스와, 어느덧 넷플릭스의 효자 제작사가 된 XYZ의 인연은 계속되고 있다. 성룡과 존 시나가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된 넷플릭스의 액션 코미디 영화 <스내푸>(Hidden Strike, 2023)의 제작사도 XYZ다.

 

 

〈레이드 2〉
〈레이드 2〉

<레이드 2>는 경찰 라마(이코 우웨이스)와 갱의 일원인 앤디(도니 알람시야) 형제의 우애를 그린 1편으로부터 이어지는 이야기다. 조직을 배신한 형은 잔인하게 살해당하고 힘겹게 몇몇 동료와 살아남은 동생에게는 더 힘들고 고된 새 임무가 떨어진다. 자카르타는 정부 고위층과 손잡고 마약 거래 등을 통해 권력을 키운 두 개의 범죄 조직 ‘반군’과 일본인들로 이뤄진 ‘고토’ 세력, 그리고 이들에게 매수된 경찰들로 인해 범죄의 소굴로 변했다. 경찰국의 내사반 반장은 두 범죄 조직과 부패 경찰들을 척결하기 위해 1편의 작전에서 살아남은 라마를 교도소에 잠입시키기로 한 것이다. 가족관계와 경력 등 자신의 이전 기록들은 모두 지워진 채 언더커버가 되어 죄수 행세를 하게 된 것. 반군 가문의 후계자 우초(아리핀 푸트라)가 복역 중인 교도소로 들어가 그에게 접근한 뒤, 출소 후 그의 조직에 들어가게 된다. 한편, 우초는 새로운 범죄 조직인 베조(알렉스 아바드) 일당과 함께 아버지를 배신하고 새로운 보스가 되려는 야심을 품는다. 우초의 계획을 눈치챈 라마는 경찰들조차 적으로 돌아선 상황에서 홀로 범죄 조직 모두와 전쟁을 시작한다.

 

 

 

〈레이드 2〉
〈레이드 2〉

<레이드 2>는 1편과 정반대의 콘셉트로 시작하기에 흥미롭다. <레이드>가 보여준 실내의 폐소공포증을 외부 로케이션의 열려진 해방감으로 인도하는 것. 세상 모든 속편은 전개의 효율성을 위해 지난 1편의 설정과 캐릭터들을 그대로 가져오는 일이 흔한데, 1편의 모든 것을 뒤집어버리며 시작하는 <레이드 2>는 그야말로 정반대다. 게다가 상영시간은 거의 1시간 가까이 늘어난 2시간 30분이다. 아무리 1편의 성공의 단꿈에 취했다지만 이런 무모한 시도가 또 있을까. 거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도입부에서 앤디를 처단하는 베조는 그의 잘못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야심’의 문제가 아니라 ‘한계’의 문제”라고. 세상에 없던 액션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야심과 어쩔 수 없는 한계 사이의 딜레마랄까. 가렛 에반스 감독은 <레이드2>를 통해 감히 그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보겠노라며 시작하는 것이다.

 

 

 

〈레이드 2〉
〈레이드 2〉

<레이드 2>는 자카르타의 이곳저곳을 누비며 특유의 극사실주의 액션 스타일을 극한의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첫 번째 대규모 격투신은 온통 진흙탕인 교도소 앞마당에서 벌어진다. 마치 1편의 수위를 비웃기라도 하듯 강도 높은 장면들이 이어진다. 격투의 아이디어 그 자체보다 마치 감각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 같은 장면들의 연속이다. 얼굴을 벽에 박는 것도 모자라 날카로운 모서리에 처박고, 무릎이나 관절을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꺾어 부러트리며, 돌로 머리를 내려찍는 것도 별것 아니게 느껴진다. 그저 ‘하드코어 액션영화’라는 이름의 잔인하고 끔찍하다는 표현 그 이상의 무엇을 찾게 된다. <해벅>의 잔인한 액션 묘사에 어느 정도 쾌감을 느꼈다면, <레이드2>에 분명 만족할 것이다.

 

 

 

〈레이드 2〉 배트보이(왼)와 해머걸
〈레이드 2〉 배트보이(왼)와 해머걸

이후 늘어난 상영시간을 야심적으로 채우는 것은, 초현실적인 악당들인 해머걸(줄리 에스텔)과 배트보이(베리 트리 율리스만)다. 선글라스를 쓴 채 말없이 임무를 수행하는 해머걸은 평소 <올드보이>(2003)의 팬이라고 밝혀온 가렛 에반스 감독의 취향을 드러내듯 가공할 장도리 액션신을 펼친다. 특히 지하철 안에서 명품 백에서 조용히 2개의 장도리를 꺼내 수십 명의 남자들과 대결을 벌이는 유혈이 낭자한 액션신은 단연 압권이다. 그와 짝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 배트보이는 야구공과 배트를 이용해 파괴적인 액션을 선보인다. 이미 극도의 초감각적 경험을 한 상태라 그들의 액션은 오히려 만화적으로 느껴진다.

 

 

〈레이드 2〉
〈레이드 2〉

후반부 카체이스신도 단연 압권이다. 마치 카메라의 위치를 눈치챌 수 없을 만큼 차선을 제멋대로 넘나들며 동작과 사건에 밀착한다. 차와 오토바이가 쫓고 쫓기는 가운데 총격이 끊이지 않고, 사람들은 쉴 새 없이 떨어지고 부딪히면서 카메라 앵글에 들어갔다 빠졌다 반복한다. 그런 속도전 속에서 총을 장전하기까지 기다리며 숨을 고르는 장면은 단연 백미다. 최근 전 세계 액션영화들을 통틀어도 이처럼 격투와 카 체이스를 결합한 사례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가히 어디서도 보지 못한 믿기 힘든 장면들이 속출한다. 지나친 극사실주의가 만들어내는 초현실적 풍경, 아마도 <레이드> 연작이 보여주는 액션 연출의 핵심은 바로 거기 있을 것이다.

 

 

 

〈레이드 2〉
〈레이드 2〉

<레이드2>가 반가운 것은 가렛 에반스 감독이 연출자로서 계속 진화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지나친 감상주의라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조직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인 코소(야얀 루히안)의 죽음에 겹치는 사운드트랙은 잊을 수 없는 순간을 선사한다. 나이트클럽에서 홀로 수십 명과 싸우는 그는 계단을 이용해 상하좌우 종횡무진 액션을 펼치는데, 이어 벽으로 튀어나와 눈 쌓인 골목에서도 싸운다. 하얀 눈밭을 새빨간 피로 물들이며 계속 상대의 머리를 찧고 칼로 찌르며 싸운다. 그러다 새롭게 등장한 다른 킬러에 의해 코소 또한 세상과 작별한다. 그때 흘러나오는 음악이 바로 헨델의 ‘사라방드’다. 스탠리 큐브릭의 <배리 린든>(1975)에도 쓰였던 이 곡은 귀족사회의 근엄한 분위기를 장중하게 드러내는 음악으로 반군 조직으로부터 내침을 당하는 코소의 처연한 운명을 보여준다.

 

 

〈레이드 2〉
〈레이드 2〉

그 모든 것을 넘어, 결국 가장 거대하게 휘몰아치는 클라이맥스는 마지막 20분에 집중된다. 코소를 제거한 킬러(세셉 아리프 라만)와 라마의 기나긴 일대일 대결은, 더 이상 아날로그 액션영화들의 설 자리가 사라지고 있는 현실에서 비장한 선언 같은 의미도 있다. 덩치는 작지만 날렵한 동작으로 인도네시아 전통 무기인 카람빗을 들고 싸우는 세셉 아리프 라만은, 야얀 루히안처럼 펜칵 실랏 지도자로 활동하며 유럽 전역으로 투어를 다니기도 했던 실력자다. 휘어진 모양새가 인상적인 카람빗은 <아저씨>(2010)에서 원빈이 사용했던 무기로, 비록 크기는 작지만 손가락을 끼울 수 있는 링이 있어서 단단히 고정해 미끄러지지 않은 채 상대를 급소를 단숨에 노릴 수 있다. ‘빌리지 보이스’의 에이미 니콜슨은 이 마지막 대결에 대해 ‘Hyper-violent ballet’(초폭력적 발레)라는 표현과 함께 “그야말로 두 남자의 ‘소멸’에 이르는 극한의 대결, 앞으로도 이처럼 멋진 대결신을 볼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고 썼다.

 

〈레이드 2〉 촬영현장의 가렛 에반스(맨 오른쪽)
〈레이드 2〉 촬영현장의 가렛 에반스(맨 오른쪽)

실랏에 기반을 둔 세 편의 영화 <메란타우>와 <레이드> 연작을 통해 가렛 에반스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공교롭게도 그 세 편이 흘러온 과정은 인도네시아의 한 작은 마을에서 시작해 자카르타라는 자본의 공간으로 내던져진 한 소년의 성장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 주제는 바로 ‘부끄럽지 않은 남자가 되어라’라는 것이다. <메란타우>에서 유다(이코 우웨이스)가 집을 떠나 자카르타로 향할 때, 어머니는 이렇게 얘기했다.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라, 너 자신을 믿어라, 그리고 당당한 남자가 되어라”. 마을의 실랏 전수자로 임명됐던 그는 전통에 따라 ‘메란타우’라는 의식을 수행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마을을 떠나 다른 지역을 돌며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아를 발견하는 일종의 수행과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레이드>를 거쳐 <레이드2>를 통해 가렛 에반스와 이코 우웨이스는 그 힘겨운 메란타우를 완성했다. 가렛 에반스 감독은 단지 동남아 액션에 매혹된 액션 영화광 감독이 아니라, 그 장구한 ‘메란타우 3부작’을 통해 최선의 예의를 갖춰 신성한 의식을 치른 것이다. 그래서 갑자기 궁금해진다. 소문만 무성하던 <레이드> 3편은 과연 언제 만들어지는 걸까. 이코 우웨이스도 이제 마흔이 넘었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