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만에 정상화를 선언한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가 화려한 관심과 반응 속에 모든 일정을 마무리했다. 10월 14일, 배우 권율과 한선화의 사회로 진행된 폐막식은 베니스영화제 오리종티 초청작 이시카와 케이의 신작 <한 남자>를 상영하며 대미를 장식했다. 이번 부산영화제는 양조위의 내한과 수많은 국내 톱배우들의 액터스 하우스, 화려한 개폐막식과 거장들의 마스터 클래스 및 gv, 야외 상영 등 우리가 알던 성대한 부산으로 돌아온 모습이었다. 나 역시 부산에 체류하며 그 열기가 얼마나 뜨거운지 체감했다.
나는 지난 10월 6일부터 14일까지 개막일을 제외한 모든 기간 부산에 머물렀다. 감상한 영화는 총 36편이었다. 어쩌면 같은 기간 대비 가장 많은 영화를 본 관객일지 모른다. 이 글을 읽는 당신, 혹시 올해 부산에 가보지 못했나? 아쉬워할 당신을 위해 화려했던 부산의 풍경을 조금이나마 전해주려 한다. 내년엔 더 큰 스케일로 찾아올 부산에 당신도 함께하길 바라며 올해는 이 기사로나마 대신 즐겼으면 하는 마음이다.
10월 6일(목), 새벽 5시 45분 기차를 사수하다!
10:00 - 11:45 <스칼렛> 13:30 - 15:38 <R.M.N>
17:30 - 19:04 <사랑의 불꽃> 20:00 - 22:07 <여덟개의 산>
첫날은 새벽부터 서둘렀다. 수서역에서 새벽 5시 45분 SRT 열차를 타야만 장안의 화제작 <스칼렛>을 볼 수 있었으니까. 도착 시간은 아침 8시 반. 부산은 이미 수많은 인파로 가득했다. 개막식 이후 첫 정식 상영인 6일 1회차 상영부터 화제작을 보러 온 관객들로 CGV 센텀시티는 활기가 넘쳤다. 피에트로 마르첼로의 <스칼렛> 상영 전 서승희 프로그래머가 마이크를 잡고 짧은 설명을 건넸다. 부산영화제에 온 사실이 처음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스칼렛>은 부산에서도 수많은 관객 입에 오르내린 작품이다. 동화 같은 프레임 안에서 영화가 부릴 수 있는 마법을 최대한 담아낸 이 작품이 선사한 감동을 나도 기사에 꾹꾹 눌러 쓴 뒤에 송고를 마쳤다.
점심으로 해운대 숙소 근처에서 밀면을 먹었다. 부산하면 또 '밀면' 아니겠는가. 밀면은 부산의 오래된 향토 음식으로 얼핏 냉면과 비슷하지만, 밀가루와 전분으로 반죽된 면발이 특징이다. 국물은 보통 돼지고기 육수를 쓴다. 요기를 한 뒤에는 또다시 영화를 봤다. 크리스티안 문쥬의 <R.M.N>이었다. 상영 전, 감독이 인사말에서 강조했듯 17분 간 롱테이크로 촬영한 시민 회의 장면이 백미였다.
세 번째 영화를 관람하기 전 잠깐 시간이 남아 '영화의 전당'을 한 바퀴 산책했다. 예술적인 건물이 주는 웅장함은 매년 부산을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절경이다. 세 번째로 본 영화는 <사랑의 불꽃>이었다. 사라 도라의 <사랑의 불꽃>은 화산학자 부부가 담아낸 강렬한 에너지, 화산과 용암에 이미지에 매료되는 작품이다. 조만간 디즈니 플러스로도 공개된다니 감상해보시길 추천한다.
어느덧 저녁 8시. 사방은 이미 어스름이 깔렸지만, 아무도 시키지 않은 나만의 영화 릴레이는 끝나지 않았다. 첫날을 마무리한 작품은 <여덟 개의 산>이었다. 펠릭스 반 그뢰닝엔과 샤를로트 반더미르히가 공동 연출한 작품이다. 해안도시 부산에서 즐기는 알프스와 카트만두의 절경이 가장 큰 매력이었다. 웅장한 산의 이미지를 뒤로 한 채 부산에서 첫날이 저물었다.
10월 7일(금), 하루에 영화 6편 보는 '지옥의 일정'
09:00 - 10:39 <노바디즈 히어로> 11:00 - 12:43 <라인> 13:00 - 14:16 <믿거나 말거나, 진짜야>
14:30 - 15:53 <내가 꿈꾸는 나라> 16:30 - 18:01 <돌거북이> 19:00 - 21:33 <유코의 평형추>
둘째날은 그야말로 '지옥의 일정'이었다. 영화를 6편 봤다. 점심마저 건너뛴 채 4편의 영화를 연달아 봐야 했다.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영화의 전당'을 지나치는데, 아침부터 양조위를 보려고 늘어선 팬들의 행렬이 건물을 에워싸는 진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오전 9시부터 상영한 알랭 기로디의 <노바디즈 히어로>는 기이한 인물들이 자아내는 우스꽝스러운 상황들로 폭소가 만발한 작품이었다. 영화가 끝나자 우레 같은 박수가 상영관을 가득 메웠다. 오후 1시부터 본 쿠엔틴 듀피유의 <믿거나 말거나, 진짜야> 역시 파안대소가 가득한 블랙코미디였다. 웃음 가득한 두 작품 사이에 본 우르슬라 마이어의 <라인>은 스크린을 칼로 찢는 에너지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3편의 영화를 연달아 본 뒤에 곧바로 4번째 영화를 관람했다. 오후 2시 반부터 상영한 <내가 꿈꾸는 나라>였다. 칠레의 거장 파트리시오 구즈만이 감독한 영화다. 파트리시오 구즈만은 칠레 혁명을 두 번이나 겪은 인물이다. <내가 꿈꾸는 나라>는 그런 그가 지금의 칠레를 이끄는 젊은 세대를 희망으로 바라보는 영화로, 영화를 보는 내내 나 같은 지구 반대편 관객도 간절한 자유의 염원을 느낄 수 있었다.
4번째 영화를 보고 나서야 찾아온 여유시간 30분. 근처 카페에 간신히 들를 정도로 짧은 시간이었다. 커피 한 잔으로 허기진 배를 채운 채 5번째 영화 관람을 시작했다. 오후 4시 반부터 상영한 <돌거북이>였다. 말레이시아 감독 우밍진의 작품이다. 침입자를 처단하려는 복수극에 타임 루프라는 소재를 신선하게 결합한 뒤 말레이시아의 이국적인 분위기를 담아낸 <돌거북이>는 광기의 에너지로 가득했다.
이날 마지막 영화로는 특별 섹션 ‘일본 영화의 새로운 물결’에서 화제가 된 하루모토 유지로의 <유코의 평형추>를 보았다. 150분이 넘는 긴 러닝타임에도 복잡한 윤리적인 문제를 끈질기게 탐구한 작품은 관객과의 대화에서도 질문 세례를 받았다. ‘진실의 문제’, ‘카메라 연출’ 등 다양한 주제를 아우르는 GV에 하루모토 유지로 역시 끈질기게 답변해주었다.
드디어 6편의 마라톤 상영회가 끝난 시각. 배가 고프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찾은 곳은 숙소 근처에 있는 현지인들만 아는 숨은 맛집이었다. 해운대 아파트 단지 사이에 있는 그 허름한 횟집은 정말 아는 사람들만 아는 집이다. 혹시나 노포에 거부감이 있다면 조금 어렵겠지만, 끝내주는 모듬회와 포슬포슬한 아나고를 정말 넉넉하게 썰어내어 준다. 근처에 있는 주당들은 죄다 이 집에서 모여 있는 듯하다. 싱싱한 회에 소주를 마시곤 다리가 풀려 다들 택시를 타고 떠나는 광경이 익숙한 횟집. 내년 부산에 오는 분이라면 이 집을 꼭 한번 수소문해 보시길.
10월 8일(토), 양조위 덕에 열기 폭발한 주말
09:00 - 10:20 <우리집> 11:00 - 12:05 <와서 직접 봐봐> 14:30 - 16:04 <레트로 그레이드>
17:00 - 18:21 <나의 위니펙> 20:00 - 21:40 <어느 짧은 연애의 기록>
양조위의 등장으로 뜨거웠던 부산의 열기는 주말이 되자 본격적으로 폭발했다. 아침 1회차 상영부터 작품 대부분이 매진 행렬이었다. 기요하라 유이의 <우리 집>은 빼어난 공간 활용으로 서로 다른 두 이야기를 엮어내는 솜씨가 훌륭한 작품이었다. 호나스 트루에바의 <와서 직접 봐봐>는 코로나라는 현재와 맞닿아 있으면서도, 앞으로의 찬란한 미래를 예찬하기에 관객들도 동시대 감각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점심이 되니 센텀 주변 식당과 푸드코트는 만석이었고, 어디를 가나 웨이팅은 필수였다. 어쩔 수 없이 가장 줄이 적은 식당에서 급하게 점심을 먹었다. 피로에 지쳐서였을까? 2시 반에 본 <레트로그레이드>는 잠에 허덕이며 몇몇 아프간 파병에 나갔던 미군들의 이미지만이 남았다.
급하게 커피 수혈에 나선 오후 4시, 커피를 사는 데만 15분이 걸렸다. ‘21세기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시선’이라는 특별 기획 부문에서 가장 화제가 된 가이 메딘의 <나의 위니펙>만큼은 카페인의 힘을 빌려 끝까지 보았다. 감독의 고향인 소도시 위니펙에 대한 애증을 가감 없이 드러낸 <나의 위니펙>은 전에 우리가 접해온 다큐멘터리의 형식과 완벽하게 다른 형태였다.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센텀시티에서 조금 걸어 벡스코 역 근처에 작은 전통 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간이 테이블을 펼쳐 놓은 채 영업하는 일본식 라멘집이 시장 안에 있었다. 가라아게와 소유라멘을 주력으로 하는 이곳에서 시티팝을 들으며 식사하다 보면 어느새 부산이 일본으로 바뀌는 느낌이 들었다.
8일의 마지막 밤은 BIFF의 시그니처인 야외 상영으로 마무리했다. 평년의 부산보다 조금 더 매서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수많은 인파와 함께 한 작품은 엠마누엘 무레 감독의 <어느 짧은 연애의 기록>이다. 연애 없이 사랑하는 파트너라는 관계를 세밀하게 묘사하며 위트를 곁들인 작품에 관객들은 웃고 공감하며 영화에 점차 이입했다. 상영 직후 엠마누엘 무레 감독이 직접 무대에 올라 관객들과 인사했다. 무대인사와 더불어 객석에서 귤이나 나초 같은 다과를 먹는 정겨운 풍경을 보니, 3년 만의 정상화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10월 9일(일), 강행군 끝에 마침내 체력이 바닥나다
09:00 - 11:46 <퍼시픽션> 12:00 - 14:33 <빛의 노래> 19:00 - 21:33 <세 자매>
3일 간 영화 15편을 보는 강행군 끝에 드디어 체력이 바닥나 버렸다. 알베르 세라의 <퍼시픽션>은 상영 소식이 들린 이후 꾸준히 영화 팬들 사이에서 기대작으로 꼽혔지만, 166분이라는 압도적인 러닝타임에 체력적 한계가 겹치며 상영관 여기저기서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나 역시 비축한 체력이 모두 소진되어 제대로 영화를 관람하지 못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퍼시픽션>에서 충분히 잔 뒤 스기타 교시의 <빛의 노래>는 졸지 않고 보게 되었다. 느슨하게 이어진 네 여성의 삶을 단가라는 일본의 문학 장르로 풀어낸 <빛의 노래>는 만남과 헤어짐에 허덕이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와 공감을 주는 작품이었다.
<빛과 노래>를 보자마자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히 세 번째 영화를 취소하고는 부산의 자랑 '돼지국밥'을 먹으며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돼지국밥'하면 원톱으로 꼽히는 해운대역 근처 맛집에서 식사를 한 뒤에 근처 해리단길을 걸었다. 바다도 물론 좋지만, 다양한 카페와 먹거리가 즐비한 해리단길은 영화제 열기 사이에서 숨을 돌리며 휴식을 갖기에 적격인 장소다. 센텀시티와도 지하철로 세 정거장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접근성도 훌륭하다. 카페와 맛집을 돌아다니며 충분한 에너지를 비축하고는 왕 빙 감독의 다큐멘터리 <세 자매>를 보았다. 중국의 빈곤을 온몸으로 감당하는 세 어린 소녀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바로 근처에 산재한 생존의 문제를 돌아볼 수 있었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나서는 중동역 부근 유명 맛집 ‘OOO 하얀 오징어 집’을 방문했다. 최근 서울에서도 오징어회를 맛보긴 했지만, 부산의 오징어회는 확실히 더 달고 신선했다. 자리를 함께한 일행도 입을 모아 이렇게 단 오징어회는 처음 먹는다며 감탄했다. 회뿐 아니라 오징어 통찜도 훌륭하다. 매우 추천한다. 보다 오래 연휴의 밤을 지새우고 싶었지만, 평균 150분을 넘어가는 초 장편만 3편을 관람하며 피곤함에 지쳐 귀가를 선택했다. 추후 영화제를 방문할 여러분은 반드시 러닝타임을 잘 고려하셔서 지나치게 긴 영화를 하루에 몰아보는 실수를 하지 않기 바란다.
10월 10일(월),
11:00 - 12:47 <노 베어스> 13:00 - 14:39 <썬 오브 람세스>
16:30 - 18:03 <천둥> 19:00 - 20:43 <시골 경찰 지지의 한 여름 모험>
연휴 마지막날이자 대체휴일, 부산을 떠나기 싫어하는 이들의 미련이 드러난 물건은 다름 아닌 캐리어였다. 캐리어가 영화제 바닥 군데군데 놓여 있었다. 1편이라도 영화를 더 보려는 이들은 자원봉사자들과 캐리어 반입을 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1회차 상영은 이란에 현재 정치범으로 억울하게 구금되어 탄압받는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신작 <노 베어스>. 6년 형을 받은 터라 한동안 그의 신작을 볼 수 없어서인지 많은 관객이 그의 영화를 보러 왔다. 이란의 탄압적인 현실과 망명을 위해 떠나려는 이들의 간절함이 영화 사이를 교차하며, 현재 뜨거운 이란의 시위 현장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었다. 클레망 코지토르의 <썬 오브 람세스>는 부산에서 발견한 의외의 작품이었는데, 프랑스의 이민자들이 가득한 거리에서 끊임없이 헤매는 주인공을 다룬다. 언뜻 샤프디 형제의 <굿 타임>이 생각나기도 하는 영화는 장르적인 흥미와 정치적인 담론을 모두 잡은 올해의 발견이었다.
늦은 점심은 해운대 인근 맛집으로 떠오른 라멘집 ‘토리킨’에서 먹기로 했다. 닭 베이스 육수를 사용하는 토리파이탄을 판매하는 이 식당은 하얀 닭육수 폼을 위에 올려주어, 국물의 질감이 매우 독특하다. 포만감 있는 식사를 마치고 뒤를 돌아섰는데, 7일 관람했던 <돌거북이>의 주연 배우 아스마라 애비게일과 감독 우밍진 역시 그곳에서 식사중이었다. 영화 내내 강렬한 눈빛으로 인상을 주었기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영화에 관한 짧은 대화를 나누고, 카르멘 자키에르의 <천둥>을 관람했다. 시대는 다르지만, 폴 버호벤의 문제작 <베네데타>가 일부 생각나는 작품이었다. 여성 혐오와 가톨릭 사회, 미지로의 자연같은 테마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큰 문제 의식을 던진다.
10일 저녁 <시골 경찰 지지의 한 여름 모험>은 '영화의 전당' 중극장에서 상영되었다. 이번에는 영화보다 중극장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데, 이곳은 CGV 센텀시티 스타리움 관과 더불어 영화를 관람하기에 가장 좋은 상영관일 것이다. 넓은 스크린과 가로로 긴 좌석은 어느 자리에 앉아도 충분히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 내년에 영화제를 방문한다면, 반드시 중극장에서 상영하는 작품을 1편 이상 관람하기를 추천드린다.
나는 이후에도 꽤 긴 시간 부산에서 체류했지만, 연휴를 축으로 가장 많은 이들이 몰린 부산의 풍광을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일부 기간을 제한해 소개했다. 사실, 부산국제영화제는 단순히 미개봉 상영작들이나 GV뿐 아니라, 마스터 클래스나 오픈 토크 등 여러분이 즐길 거리가 무수히 많은 축제다. 아직 부산국제영화제를 방문해보지 못한 분들이 있다면 한 번쯤 꼭 경험해보시길 바란다. 내년에 부산에서 볼 수 있기를!
글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
사진 제공 부산국제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