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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시리즈온④]지극히 평범한 인간으로 세상과 맞서기, 〈노 베어스〉

이진주기자

1920년대 일제 강점기, 1960~70년대 군사정권기 등 100여 년의 역사 속 한국 영화는 수차례 억압에 맞서며 오늘날과 같이 빛나는 발전을 이루어냈다. 이제는 ‘검열’, ‘탄압’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가 낯설게도 느껴지지만 최근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이 불과 7년 전 수면 위로 드러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그리 먼 이야기도 아닌 것이다. 

 

이란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아스가르 파르하디 등 걸출한 거장 감독을 배출한 영화 강국임에도 여전히 영화계에 강력한 제재를 가한다. 올해 초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영화 <내가 좋아하는 케이크>의 감독 마리암 모그하담과 베흐타시 사나에하에게 출국금지 명령을 내렸고 비슷한 시기 여배우에게 히잡을 씌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실형을 선고받은 영화 <신성한 무화과 씨앗>의 감독 모하메드 라술로프가 이란을 탈출해 유럽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지난 1월 개봉한 영화 <노 베어스>의 감독 자파르 파나히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노 베어스>가 제79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는 영광을 누릴 때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반정부 활동으로 수감된 동료 감독의 출소를 촉구하는 시위에 참석했다 구금되어 있었다. 

〈노 베어스〉
〈노 베어스〉

 

자파르 파나히는 제48회 칸국제영화제 황금카메라상(신인감독상) 수상작인 <하얀 풍선>(1995)으로 데뷔해 <서클>(2000)로 제57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은 후 이어 <오프사이드>(2006)로 제56호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하며 세계 3대 영화제를 섭력해 거장의 반열에 오른 감독이다.

 

이렇게 서두부터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이야기를 진득하게 펼쳐놓는 것은 영화 <노 베어스>가 본격적인 이란 정부의 통제가 있었던 2009년 이후 확연히 달라진 그의 영화 세계의 정점에 있기 때문이다. 케이크 속에 숨겨 밀반출한 필름을 영화제에 출품하고(<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자택 구금 상태에서 촬영을 하는(<닫힌 커튼>) 등 그는 한순간도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2011년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를 시작으로 2022년 <노 베어스>까지 약 11년 동안 정부의 통제를 받으며 자파르 파나히는 다큐멘터리와 픽션, 진실과 거짓을 넘나들었다. <노 베어스>는 이 과정에서 그가 경험한 이질감을 내포하는 영화이다.

 

영화에는 두 연인의 모습이 등장한다. 자파르 파나히가 원격으로 연출 중인 작품 속 바흐티아르(바흐티아르 판지에이)와 자라(미나 카바니) 그리고 자파르 파나히가 머무는 국경 근처 작은 마을에서 만난 솔두즈(아미라 다바리)와 고잘(다리야 알레이)이다. 

〈노 베어스〉
〈노 베어스〉

바흐티아르와 자라는 터키에서 난민 생활을 하며 유럽으로 망명을 시도하는 커플이다. 영화는 바흐티아르가 자라를 먼저 유럽에 보내기 위해 위조 여권을 전하지만 자라가 ‘혼자 떠날 수 없다’며 이를 거절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카메라는 자라가 떠나는 뒷모습을 따라가고 이어 ‘컷’ 사인이 들린다. 그리곤 카메라 앞에 불쑥 등장하는 영화의 조감독 레자(레자 헤이다). 앵글은 천천히 물러나 화면을 사이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자파르 파나히를 비춘다. 

〈노 베어스〉
〈노 베어스〉

이 난민 커플은 배우이자 실제 망명을 시도하는 인물들이다. 이 작품의 엔딩은 망명에 성공해 더 나은 삶을 누리는 것이겠지만 이들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여기에서 자파르 파나히의 첫 번째 아이러니를 엿볼 수 있다. 감독은 그간 자신의 현실과 허구를 중첩시키며 다큐멘터리적 성격을 띠는 작품을 선보여왔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를 잘 담아낸다 하더라도 극영화는 어디까지나 픽션에 기반한다. 본분에 충실한 감독으로서 자파르 파나히는 완벽한 가상의 세계를 구성한다. 카메라 너머 자라는 이런 감독에게 일침을 날린다. “모든 것이 가짜다”라고 말이다. 박티아르와 함께 유럽으로 떠나는 줄 알았던 자라가 사실 박티아르의 여권이 가짜임을 알게 된 것이다. 어쩌면 애초부터 자파르 파나히는 그들이 안전하게 망명에 성공하는 것보다 영화를 완성시키는 것이 더욱 중요했을지 모른다. 자라의 반발로 결국 촬영은 실패로 돌아간다.

〈노 베어스〉
〈노 베어스〉

 

솔두즈와 고잘은 출국 금지를 당한 자파르 파나히가 이란의 국경 마을에서 머물며 만난 연인이다. 이 마을은 통신이 잘되지 않는 열악한 환경이지만 그는 촬영장과 최대한 가까운 곳에 있고 싶다는 마음에 이곳에 묵기로 한다. 습관적으로 사진과 영상을 찍는 자파르 파나히에게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솔두즈와 고잘이 함께 있는 사진을 내놓으라고 압박한다. 여성은 태어날 때부터 짝이 정해져있는 이 마을의 문화에 의해 고잘은 동네 청년 야곱(자바드 시야히)과 약혼이 되어 있는 상태였던 것. 이어 솔두즈와 고잘은 곧 국경을 넘을 것이라며 절대 사진을 넘기지 말 것을 부탁한다. 이에 자파르 파나히는 줄곧 ‘사진을 찍은 적이 없다’고 항변한다. 그를 의심하는 마을 사람들은 전통에 따라 맹세식에서 선서를 할 것을 권유하고 자파르 파나히는 코란 대신 카메라 앞에서 맹세의 말을 뱉어낸다.

 

자파르 파나히는 진실할까? 영화는 커플의 사진이 존재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맹세식에 가는 길, 자파르 파나히를 불러 세우는 마을 사람의 말을 통해 영화의 의중을 짐작할 수 있다. “곰이 있으니 함께 길을 가자”며 감독과 마주한 남자는 “당신이 사진을 찍었든 아니든 상관없다.  평화를 위해서 사진은 없다고 맹세하라”고 당부한다.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사진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국경을 넘던 솔두즈와 고잘이 총에 맞은 채 발견되며 마을은 시끄러워지고 마을을 떠나는 중이던 자파르 파나히는 고민 끝에 차를 멈춘다. 감독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진실보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결국 그는 외부인이자 관찰자일 뿐 비극을 막지는 못했다. 이것의 그의 두 번째 아이러니이다.

〈노 베어스〉
〈노 베어스〉

 

 

자파르 파나히는 <노 베어스>를 통해 스스로의 모순에 대해 고백한다. 그는 국경선 앞에서 뒷걸음질 치고 죽음 앞에서 목 놓아 울지도 않는 자신의 나약함과 비겁함을 마주한다.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 그가 차를 멈추어 세우는 것은 11년간 수많은 탄압에도 카메라를 놓지 않았던 것처럼 끝까지 자신의 몫을 하겠다는 외침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