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 겨울, 나는> 메인 포스터. 사진 제공=(주)더쿱디스트리뷰션

스물아홉 동갑내기 커플 ‘경학’과 ‘혜진’은

내일을 위해 뜨겁게 공부하고,

오늘을 위해 열심히 사랑한다.

하지만 ‘혜진’이 먼저 취업을 하게 되자

점점 서로의 ‘내일’과 ‘오늘’이 변하기 시작한다.

설상가상 ‘경학’이 엄마의 빚을 떠안으며

공부도 사랑도 위기를 맞게 되는데…

사랑조차 피곤했던 그 겨울,

우리는 서로에게 얼마나 솔직했을까?

<그 겨울, 나는>(감독 오성호)은 내일을 위해 뜨겁게 공부하고, 오늘을 위해 열심히 사랑 중인 가난한 공시생과 취준생 커플의 애틋한 겨울나기를 통해, 지금 청춘들의 가장 현실적인 고민을 사려 깊게 응시하고 세밀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부문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상-메가박스상’과 ‘올해의 배우상’(권다함), ‘왓챠상’까지 주요 부문 3관왕을 거머쥔 화제작이기도 하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엄정화, 조진웅 배우는 “권다함 배우는 누구나 공감하는 평범한 일상으로 초대하기도 하고, 때로는 진심 어린 이입점을 만들어 철저히 인물의 심리 속에 가두어버리는 듯한 강렬함을 선사한다”라며 몰입감 넘치는 연기를 극찬하기도 했다.

또한 <그 겨울, 나는>을 첫 장편으로 데뷔한 신예 오성호 감독은 한국영화 마스터피스의 등용문이라고도 알려진 38년 역사의 한국영화아카데미(FAFA)를 졸업했다. <그 겨울, 나는>은 KAFA의 2022년 다섯 번째 장편영화로 11월 30일 개봉했다. 실제 생업으로 9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막노동을 해온 감독의 삶의 경험이 더해지며 경학과 혜진의 감정과 행동에 현실성과 진정성, 페이소스를 짙게 부여했다는 평. 오성호 감독을 만나 <그 겨울, 나는>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오성호 감독. 사진 제공=(주)더쿱디스트리뷰션

첫 장편 데뷔 축하드립니다.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단편만 만들다가 처음으로 장편 만들었는데, 드디어 감독이 되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좀 새롭네요.

영화 제목이 <그 겨울, 나는>이에요. 음, 제가 착각을 했는지 영화를 보고 나서도 <그 겨울, 우리는>이 아니었나 싶었거든요. 스물아홉 동갑내기 커플 경학(권다함 분)과 혜진(권소현 분)이 모두의 이야기인 것 같아서요. ‘나’라고 한정한 이유가 있나요?

일단은 기본적으로 제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컸어요. 경학이도 청년이고, 저도 청년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1인칭으로 이야기해야겠다고 정한 거죠. 그리고 영화에서 ‘그 겨울’은 경학이에게도, 혜진이에게도 다 ‘나’의 이야기가 되는 거니까, 제목은 <그 겨울, 나는>으로 정했습니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분투해야 하는 탓에 서로를 지켜왔던 ‘사랑’조차 마치 피곤한 ‘일’처럼 되어 버린 청춘의 현실이 시린 겨울 풍경과 중첩되어 다가옵니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끝까지 보기가 너무 괴로웠어요. 러닝타임이 더 길었다면 더 보기가 힘들었을 것 같기도 하고요. 카메라 움직임도 그렇더라고요. 이야기나 인물을 앞서가지 않고 묵묵히 따라가는 워킹이었어요. 일부러 이렇게 담담하게 보여주려고 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그냥 저는 이 영화가 사실로 느껴졌으면 좋겠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물론 카메라 워킹을 현란하게 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카메라로 멋을 부린다거나 해서 무언가 보여준다기보다는, 담담하게 사람을 따라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촬영했습니다.

<그 겨울, 나는> 스틸컷. 사진 제공=(주)더쿱디스트리뷰션

본격적으로 영화 이야기를 해보죠. 남자주인공 경학은 경찰공무원을 준비하는 공시생이고요, 혜진은 취준생이에요. 고시촌에서 생활하고 있고요. 경학은 부모의 도움이 없고, 혜진은 지원을 받고 있죠. 취업 전이긴 하지만 경학과 혜진은 두 사람만의 공간에서 행복합니다. 이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의 시작은 무엇인가요?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일단 두 사람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다가, 경학의 어머니가 진 빚으로 모든 사건이 시작됩니다. 어머니가 경학의 이름으로 2천만 원을 대출받은 사실을 알게 되는 거죠. 2천만 원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마무시하게 큰돈도 아니에요. 하지만 당사자인 경학에게는 또 경학의 삶에는 엄청나게 큰 파장을 몰고 온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빚의 금액도 2천만 원으로 설정했습니다.

어머니가 남긴 빚이라는 설정도 좀 신선했어요. 영화나 소설을 보면 통상 아버지가 알콜중독에, 가정폭력을 행사하고, 빚을 남기고 집을 버리거나 세상을 뜨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그 겨울, 나는>에서는 집을 나가 연락 두절 상태인 어머니가 빚을 남겼어요. 어머니라고 하면 어찌 됐든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이기도 할 텐데요, 이런 설정의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말씀하신 대로 그런 선입견이 있죠. 그래서 더 상대를 바꿔보고 싶었어요. 엄마라고 설정한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요. 아빠보다는 엄마로 하면 기존의 영화들과 조금 다를 것 같아서 그렇게 설정했습니다.

스물아홉 공시생 경학이는 당장 2천만 원이 없어요. 가까운 친척에게 손을 벌려보지만, 돌아오는 건 ‘넌 사주가 안 좋다’라는 말뿐이고요. 경제활동을 하지 않으니 대출도 안 나옵니다. 그래도 경학이는 착해요. 일을 해서 돈을 갚으려고 하니까요. 그런데 파산신청을 하는 방법도 있었을 거 같은데, 시나리오 단계에서는 고려되지 않았었나요?

2천만 원이라는 액수 자체가 막 파산신청까지 해야 하는 금액이라거나, 인생을 포기할 정도의 금액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파산신청이라는 점은 시나리오 단계에서도 한 번도 고려한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공무원 시험 준비 중인데 파산하면 절대 안 되지 않을까요? 경학이 파산을 신청하기는 너무 이른 거 같았어요. 적은 액수는 아니지만, 고작 2천만 원으로 어머니와 절연한다는 것도 좀 그렇고요. 그래서 빚의 금액이 중요했어요. 너무 크지도, 적지도 않은 정도로요.

<그 겨울, 나는> 스틸컷. 사진 제공=(주)더쿱디스트리뷰션

그렇게 착한 마음을 가진 경학은 자신의 목표인 경찰공무원 시험까지 유예하면서 일을 시작합니다. 빨리 돈을 갚으려고 기술이 없어도 일하는 만큼 돈을 가져갈 수 있는 배달일을 하죠. 그런데 가장 친한 친구부터 사기를 쳐요. 중고 오토바이를 비싸게 팔면서요. 왜 착한 사람은 이렇게 당하기만 하는 걸까요? 아니, 당하면서 배워야만 하나요?

경학이 자체는 착하고 성실한데, 상황이 곤궁해지다 보니 점점 모질어지는 캐리터입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밑바닥까지 찍고 자신을 돌아보고 나서 다시 나아가는 캐릭터인 거죠. 경학이가 때가 덜 묻어서 돈과 관련해서는 경험하면서 나아가는 거 같다고 생각해요. 제가 오래 살진 않았지만, 결국 인생 많은 부분이, 아니, 거의 모든 부분이 돈 문제더라고요. 돈 때문에 마음이 상하고, 돈 문제가 아닌 것 같은 문제도 결국 돈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더라고요. 돈 때문에 사람 관계가 나빠지거나 끊어지고, 사랑이 식어가는 연인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그게 <그 겨울, 나는>이라는 영화로 나온 거죠.

모든 것을 스스로 감내하기로 마음먹었지만, 학교에서 배웠던 원칙들은 사회에 적용되지 않아요. 나이 어린 선배 배달원은 편한 배달인 이른바 ‘꿀콜’만 잡고, 경학은 온갖 뒤치다꺼리는 합니다. “누군가는 해야 하잖아”라는 영화 대사처럼 그렇게 사는 것이 사람 사이의 예의라고 배웠으니까요. 그런데 결국 세상은 그런 경학에게 호의를 베풀어주지 않아요. 결국 경학은 뾰족해져만 갑니다. “나 X나 열심히 살아, X나 열심히 산다고. 내가 얼마나 더 열심히 살아야 되는데!”라고 절규하죠. 자신이 망가지는 줄도 모르면서요. 이건 누구의 잘못인가요? 경학의 잘못인가요? 사회의 잘못인가요?

사회의 잘못으로 보이게끔 하는 게 제 의도였습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걱정했던 게 있어요. 이 이야기가 경학과 혜진 개인의 문제로 보이면 안 된다는 거였죠. 환경이 두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정말 노력했어요. ‘경학이가 지질하니 그럴 만하지’라든가 ‘혜진이가 문제가 있으니 그렇게 된 거지’와 같은 지적을 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부분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정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그 겨울, 나는> 스틸컷. 사진 제공=(주)더쿱디스트리뷰션

혜진은 서울의 유명 사립대를 졸업한 재원입니다. 비록 관광공사에는 불합격하지만, 중소기업에는 단번에 합격하죠. 신입사원 시기에도 단순노동일을 하는 투명인간, 잉여인력에서 금방 벗어나 멋지게 발표도 하면서 인정받아요. 그런데 직장생활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경학에게 모진 말들을 던지기 시작하죠. 사회생활을 하면서 점점 뾰족해져만 가는 우리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뭔가 수동적으로 보이는 캐릭터였어요. 감독님은 혜진이 어떤 인물로 보이기를 원하셨나요?

일단 혜진이도 혜진이지만 저는 사람이라는 게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처지가 업그레이드되면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만나는 사람이 달라지고, 나누는 이야기도 달라지죠. 그렇다면 사람도 격상한다고 해야 할까요? 혜진이가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바뀔 수밖에 없었다고 봐요. 직장에 취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니 환경이 바뀐 거잖아요. 그런 면에서 혜진이와 경학은 다를 수밖에 없죠. 혜진이 달라진 환경에 순응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변했기 때문에, 경학이 혜진을 바라보는 시점도 이전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두 사람이 모두 취업 전이었을 때와는 다른 거죠. 그러다 혜진이 취업하면서 경학과 신분의 차이라고 할까요, 위치의 차이를 가지면서 혜진이도 어떻게 달라져 가는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혜진의 연기가 정말 좋더라고요. 혜진은 아이돌그룹 ‘포미닛’ 출신의 권소현이 맡았습니다. 캐스팅하면서 걱정은 없었나요?

<그 겨울, 나는>이라는 영화의 구질구질함과 화려한 아이돌 출신 배우의 결합이 이상할 거라는 선입견은 저 역시도 있었어요. 그래서 오디션을 3차까지 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제가 잘못된 거 같더라고요. 권소현 배우는 정말 그 어떤 배우보다 진지했고, 연기에 대한 열정이 컸어요. 그걸 느끼면서 같이 하게 됐습니다. 촬영장에서도 똑같이 느꼈고, 결과적으로 맞는 선택이라고 확신해요.

<그 겨울, 나는> 스틸컷. 사진 제공=(주)더쿱디스트리뷰션

실제 현장에서 두 배우에게 가장 많이 하셨던 말씀은 무엇인지, 가장 많이 주셨던 연기 디렉션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잘못된 디력션했을 때 언제든 반론과 지적을 해달라고 요청했어요. 저는 단편을 8개 정도 찍었어요. 현장을 경험하면서 적어도 제가 지금까지 만났던 배우들은 감독이라는 존재를 너무 어려워하는 게 보이더라고요. 존중하지만 너무 어려우면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감독의 눈치만 보게 돼요. 그런데 저는 연기는 결국 배우가 하는 거고, 그 캐릭터에 대해서는 감독보다 배우가 더 고민하니까 그걸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배우들과 더 솔직하게 소통하게 됐어요.

캐릭터적으로는 경학이 나빠 보이면 안 된다고, 기본적으로 열심히 그리고 건실히 살아가는 청년으로 보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그래서 경학이 아무리 나쁜 말을 해도 그 수위 조절이 안 되면 영화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본 거죠. 혜진도 마찬가지였어요. 경학에게 뭐라고 지적할 때도 나름의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거니까요. 너무 닦달하거나 드잡이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도록, 두 배우가 그런 밸런스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많이 대화했습니다.

현장에서 두 배우의 케미스트리는 어땠나요?

너무 잘 맞았어요. 저를 포함해 셋 다 장편이 처음이라 초심자의 마음으로 ‘의쌰의쌰’ 한 것도 있죠. 음, 권소현 배우는 항상 일정하게 안정적인 연기를 하는 편이었어요. 권다함 배우는 기복이 심한 대신 한 번씩 엄청난 연기를 하는 스타일이었고요. 성향 차이가 있는 거죠. 권다함 배우는 자신감도 있고 이런저런 연기를 많이 시도했어요. 그러다 보니 새로운 장면들이 튀어나오고, 그 테이크를 골라 쓸 수 있었죠.

권소현 배우는 어린 시절부터 오래 아이돌 생활을 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강해서 자기 마음대로 시도하기보다는 감독의 디렉션 안에서 충실히 이행하려는 편이었어요. 아이돌을 할 때도 그룹에서 자신이 튀지 않고,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연기에서도 스며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는데, 이번 영화를 통해서 ‘자신도 좀 드러나는 연기를 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한 단계 성장하고 있다고 할까요?

<그 겨울, 나는> 스틸컷. 사진 제공=(주)더쿱디스트리뷰션

두 연인은 서로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했던 때를 잊어요. 나란히 누운 좁은 침대에서조차 아득한 거리감을 느끼게 됩니다. 경학의 열등감, 미안함, 책임감 그리고 혜진의 모진 말, 이해와 안정을 바라는 마음, 남자친구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마음이 뒤섞이면서요. 그렇게 동거는 끝이 납니다. 두 사람은 결국 헤어졌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함께 이 고통의 시간, 겨울을 견뎌낼 수는 없었을까요?

그만큼 제가 시니컬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는 거 같아요. 제가 아직 어려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요. 정말 돈이란 건 어마무시하고 두려운 존재인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이 꿋꿋이 버텨나가는 것도 선택지가 될 수 있었겠죠. 애쓰고 노력하면서 이겨내려고요. 하지만 결국 좌절해야지만 제가 생각했던 것들을 보여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두 사람에게 경제적인 문제가 닥치지 않았더라면 헤어지지 않았겠죠. 안타깝게도 그런 문제가 생기면서 헤어진 거예요.

‘경제적 자립을 하지 못한 청춘에게는 사랑조차 사치’라는 것을 은연중에 계속해서 보여주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이 둘은 만나지 말았어야 하는 건가요? 청춘들에게는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닌가 느껴집니다.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니까요. 일단 좋아서 만났지만, 20대 중후반이 되면서부터는 경제적 사건이 생기기 마련이잖아요. 통과의례 같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나요? 20대 후반, 30대 초반이 넘으면 사람이 현실적으로 변해가는 것처럼요.

그렇다면 감독님은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의해서 변화를 받는 존재라고 생각하세요?

그렇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중심이 되는 거 아닐까요. 제가 살아온 과정도 그랬고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죠. 그런데 그 과정에서,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살면서 문득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았죠. 그걸 영화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돈이 사랑하는 연인의 관계를 해체하는 과정을, 그 상관관계를 보여주고 싶었던 거죠. 대한민국 현실이 뭐 같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헬조선’ 이야기도 아니고요. 그냥 돈과 사람의 상관관계, 그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 겨울, 나는> 스틸컷. 사진 제공=(주)더쿱디스트리뷰션

인생의 엄혹한 겨울을 보내는 두 청년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보여주셨어요. 영화 말미에서는 눈빛이 달라진 경학이 다시 경찰공무원 시험에 도전하죠. 위안이 될 수 있을 수도 있지만, 결국 해답은 공무원 시험뿐인가 하는 아쉬움도 있었어요.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뭔가 다른 걸 선택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죠.

처음에는 엔딩에 대한 고민을 정말 많이 했고, 여러 버전이 나왔어요. 저 역시 다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건 도돌이표처럼 느껴져서, 제3의 길을 찾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게 거짓말처럼 느껴지더라고요. 대부분 청년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도돌이표처럼 보이지만, 결국 ‘고작 선택하는 게 공무원 시험이야?’ 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의도한 부분입니다. 엔딩 장면을 보면 음악도 잔잔하고, 기계 앞에서 꿋꿋이 작업을 하는 경학의 모습을 보면서 희망적인 엔딩으로 느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정말 안타깝다, 고작 공무원 시험이라니 하는 그런 씁쓸하고 처연한 모습으로 보이길 원했습니다.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청춘, 계급, 돈 같아요. 언제부터, 왜 이런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제가 형편이 안 좋아서 막노동을 9년 정도 했어요. 재작년까지 했네요. 막일하면서 그걸로 생계를 유지한 거죠. 가면 항상 현금으로 일당을 받으니까요. 아마 그때부터였던 거 같아요. 자꾸 돈돈 하는 이야기를 들었던 때가요. ‘만 원 더 주세요’, ‘시간 외 했잖아요’ 이러면서 돈 때문에 일어나는 이해관계들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거예요. 막일을 하면, 밥값이 얼마인지 신경 쓰고, 참은 주는지, 물은 주는지 안 주는지, 옆 사람은 만 원을 더 받았는데 나는 왜 안 주는지 이런 것들로 서운해하고 삐치고 하거든요. 정말 친했던 아저씨랑도 돈 때문에 싸우고 짜증을 냈는데, 만 원 더 준다고 하면 신나요. 그 만 원으로 하루 기분이 왔다 갔다 하고 사람 관계도 달라지더라고요. 저도 그렇더라고요. 돈이란 게 그래서 무섭더라고요. 지금도 저는 밥 사주는 친구가 더 좋고, 밥 안 사주면 아무리 잘해줘도 싫어요(웃음).

영화 말미에 경학이 공장에서 만난 착한 사수는 감독님이 막노동 현장에서 만난 인물에서 영향을 받은 건가요?

그렇죠. 공장에서 일하다 보면 드물게 실제로 그런 인물도 있긴 하거든요. 제가 실제로 위안을 얻기도 했고요. 이름도 기억나요. 아무리 일이 힘들어도 그럴 때는 훈훈해지죠. 세상이 아직은 따뜻하구나 싶고요. 영화에서 경학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다 차갑고, 경학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래도 공장에 가서는 한없이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을 만나서, 지금까지 쌓아온 찌꺼기를 게워내고 토해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런 인물을 만나게 했습니다.

<그 겨울, 나는> 스틸컷. 사진 제공=(주)더쿱디스트리뷰션

감독님이 생각하시기에 경학, 혜진 같은 청년들도 마음껏 아니 돈 걱정 없이 사랑할 수 있으려면, 한국 사회가 어떻게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거창하게 사회적으로는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네요. 잘해야 하지 않을까요? 조심스럽네요. 그래도 전 혜택을 많이 받은 편이에요. 이번에 <그 겨울, 나는>을 찍으면서도 한국영화아카데미의 도움을 받았죠. 나라의 각종 지원사업으로도 도움을 받은 사람이니까요. 이건 쉽게 말하기가 어렵네요.

2022년을 살고 있는 한국 청년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신다면요.

저도 터널을 통과하는 중이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힘들고, 고민이고, 불안해요. 우리 존재 파이팅! 다 같이 의싸의쌰 합시다(웃음).

영화 촬영 몇 회차로 끝냈나요?

23회차였어요. 리딩을 엄청 많이 했죠. 열 번은 만났을 거예요. 정말 이야기를 많이 나눴죠. PD가 영화 속 장소가 상업영화보다 많은 편이더라고 하더라고요. 회차가 많을수록 제작비도 많이 드는데, 왜 이렇게 장소가 많은 시나리오를 썼느냐고 한 소리 들었어요(웃음).

혹시, 재촬영도 하셨어요?

네(웃음). 엄밀하게 말하면 추가촬영인데요. 경학이 아버지랑 통화하는 장면을 나중에 찍었어요. 엄마가 대출을 받아 빚이 있다는 이야기를 아버지랑 하는 장면이었죠. 그전 영화에서는 경학이 바로 집에 들어가서 혜진에게 돈 벌어야 한다고 말하는 거였어요. 그런데 보니 너무 급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혜진이 이해하고 설득되는 시간도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그 장면을 추가했습니다.

<그 겨울, 나는> 스틸컷. 사진 제공=(주)더쿱디스트리뷰션

첫 장편영화인데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요.

일단 주변에서 ‘단편과 장편은 다르다’라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하셨어요.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로 들었죠. 찍다 보니 그 이야기가 너무 신경 쓰일 정도로요. 그런데 하다 보니 다르지 않더라고요. 단편 네 편 찍는 기분? 잘못된 인식이었어요. 괜히 겁먹었잖아요(웃음). 8편이나 단편을 찍어봤는데 말이죠. 그 심리적인 것 말고는 힘든 게 없었어요.

서울예대 졸업 후 한국영화아카데미(KAFA)에서 연출을 전공하셨죠. 영화 감독의 꿈은 언제부터 가지셨던 거예요?

중2 때부터예요. 그때 MBC에서 <네 먹대로 해라>라는 드라마를 했어요. 이나영, 양동근 배우가 나오는 드라마였는데요. 방송을 본 날은 심장이 콩닥콩닥 뛰어서 잠이 안 올 정도였어요. 그때부터 막연하게 꿈을 꿨던 거 같아요. 드라마 피디가 되면 연출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요. 시간이 지나면서 영화 감독이 되면 더 많은 걸 할 수 있단 걸 알게 됐죠. 드라마는 아무래도 작가의 영향력이 더 크고, 그런 면에서 영화감독은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무엇인가요? 이유도 궁금해요.

홍상수 감독 영화를 정말 좋아해서, 개봉할 때마다 극장에 가서 봅니다. 홍상수 영화는 홍상수 감독만 찍을 수 있는, 세상에 하나뿐인 영화니까 매번 신선해요. 기대도 되고요. 사람들이 요즘 홍상수 감독 영화가 비슷해진다고 하지만, 전 세계에 홍상수 감독은 한 명뿐이잖아요. 그러니 선물처럼 봐요.

의외네요. 켄 로치 감독을 좋아할 거라 예상했거든요.

켄 로치 감독은 좋아하지 않아요(웃음). 다만 영화를 참고는 했습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나 <미안해요. 리키> 같은 영화들요.

그러면 어떤 감독에게 영향을 받으셨는지도 궁금해요.

대답하기가 참 애매하네요. 제 단편에 모두 홍상수 감독 느낌이 없거든요. 딱 집어서 말하기는 어려워요. 너무 복잡다단해서요. 음, 개인적으로는 나루세 미키오 감독을 좋아하고요, 지아장커 감독도 좋아해요. 너무 많아요. 전 잡종이거든요(웃음).

<그 겨울, 나는> 스틸컷. 사진 제공=(주)더쿱디스트리뷰션

아까 잠깐 말씀하셨는데, 9년간 막노동을 하셨다고 했잖아요. 어떻게 일을 시작하게 된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대학교 졸업하고는 막연하게 제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모든 걸 제가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죠. 그래서 집 근처에 있는 인력사무소를 직접 찾아갔어요. 첫날부터 개 사육장에 가서 개똥 치우는 일부터 했고요. 공사판에서 벽 깨고, 사우나 철거하는 일도 했죠. 그러다가 샷시팀에 합류하면서 신축아파트에 거실창 다는 일도 했죠. 안 해본 일 없을 정도로 이일 저일 다 해봤습니다.

왜 굳이 9년 동안이나 계속하신 건가요?

단가가 제일 세고 스케줄 맞출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제가 나가고 싶은 날만 가서 일하면 돼요. 일주일에 3일만 일해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 중에서는 가장 일당이 세기도 했고요. 가진 기술이 없었으니까요. 그래도 나중에는 팀장까지 달았어요(웃음). 샷시하다가 팀장까지 돼서 아저씨들을 통솔하면서 ‘밥 먹고 합시다’라고 지시도 하고 그랬어요.

영화에서처럼 배달일은 안 해보셨어요?

저희 때만 해도 가게마다 배달부가 있던 시기고, 배달일이 따로 있는 건 아니었어요. 신기했던 게 <그 겨울, 나느>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 대부분이 배달일을 많이 하더라고요. 경학 역의 권다함 배우는 물론이고, 라이더 역할로 나온 조연들도 다 배달일을 해봤다고 하더라고요. 배달일 아니면 대리운전이요. 배우들은 언제든 오디션에 갈 수 있으면서도 일당이 나오니까 배달일이나 대리운전을 많이 한다더라고요.

어떤 감독이 되고 싶으세요?

부족하긴 하지만 저만 만들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오성호의 색깔이 있는 영화라고 할까요? 감독 이름을 지우고 보더라도 ‘아, 이 영화는 오성호가 만든 거 같아’라고 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게 소망입니다.

감독님에게 영화란 무엇입니까?

진짜 어려운데요(웃음). 좋아하는 거고, 잘하고 싶은 거죠.

<그 겨울, 나는> 스틸컷. 사진 제공=(주)더쿱디스트리뷰션

<그 겨울, 나는>을 보고 나니 정말 다음 영화가 궁금해져요. 차기작은 어떤 걸로 준비하고 있나요?

액션 장르 시나리오 쓰고 있어요. 다음 달이면 초고가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젊은 아이들이 기성세대의 권위 의식과 억압에 맞서 그들의 판을 다 전복하는 이야기에요.

<13구역>(감독 피에르 모렐, 2006) 같은 영화일까요?

테마는 비슷한데, 깡패 영화예요. 어릴 때부터 주먹세계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저는 늘 쭈구리(?)로 살았지만 말이에요(웃음). 나쁜 사람들이긴 한데 저는 깡패가 좋아요. 영화로 깡패를 만나는 게 너무 기대됩니다.

깡패 영화를 만들고 싶은 감독인데, 제일 좋아하는 감독은 홍상수네요(웃음). 마지막으로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그 겨울, 나는>을 보고 펑펑 우신 분들이 참 많아요. 과거의 연인이 생각났다거나, 예전 여자친구, 남자친구 생각이 난 거 같아요. 이 영화가 보편의 경험과 감정을 다룬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어요. 어떤 분이 봐도 충분히 몰입해서 볼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부담 갖지 말고 극장에서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윤상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