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다…. 허세처럼 들릴지 모를 이 말이, 2023년 2월 27일(한국시간 기준) 미국 영화배우 조합상(SAG Awards) 무대에 오른 제임스 홍을 보면서 떠올랐다. 올해 94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최우수 출연진상을 수상한 그는 무대에 올라 당당한 수상소감으로 박수를 받았다. 1954년 데뷔 이래 700여 편의 작품(IMDb 기준 450여 편)에 출연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제임스 홍은 배우 인생 70년 만에 처음으로 SAG 후보에 올랐다. 아쉽게도 개인 자격은 아니고 팀 단위의 상 '최우수 출연진상'(Outstanding Performance by a Cast in a Motion Picture)이었지만, 그래도 수상까지 성공하며 시상식에 참석한 것을 넘어 무대에도 오를 수 있었다.
그가 무대에 오르자 현장에 참석한 배우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팀을 위한 것도 있지만, 54년부터 지금까지 배우 활동을 이어온 제임스 홍에 대한 예우에 가까웠다. 양자경은 제임스 홍을 "미국이 49개 주였을 때부터, 이 자리에 오기까지 69년 동안 활동한"이라며 제임스 홍을 소개하고 마이크를 넘겼다.
홍콩계 미국인 제임스 홍은 "첫 영화는 클라크 게이블과 함께 했다"며 "당시 동양인 캐릭터는 이렇게 눈을 찢은 테이프를 양옆에 붙이고, 입도 이런 식으로 한 채 말했다"고 옛 시절을 회상했다. 이어 "할리우드 제작자들은 동양인은 주연을 맡을 만큼 훌륭하지 않고, 박스오피스에도 오를 수 없다고 했다"고 말한 후 양팔을 벌여 팀원들을 가리키며 "지금 우리를 봐라!"라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거둔 성과를 자랑했다. 그의 말에 현장의 배우들은 박수 치고 환호하며 그의 메시지를 지지했다. 그는 또 "우리는 모두 동양인"이라고 말하다가 곁에 있는 제이미 리 커티스를 떠올리고는 "제이미 리, 리는 중국에서 쓰는 좋은 이름"이라고 농담을 덧붙이기도 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그는 에블린(양자경)의 아버지 공공 역을 맡았다(공공은 이름이 아니고 노인 남성을 이르는 호칭). 아들을 기대했다가 에블린이 태어나자 실망하고, '여자는 얌전해야 한다'고 누차 강조하는 등 동양의 남아선호사상을 가진 가부장적 아버지상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에블린의 남편이자 소심하지만 배려심이 많은 웨이먼드(키 호이 콴)와 대척점에 있는 인물인 셈. 작중에선 노령으로 휠체어를 타고 다니지만, 실제로는 배우 활동을 지속할 수 있을 만큼 (그리고 이번 SAG에 참석할 만큼) 나이에 비해 건강하다.
사실 그는 10살 때부터 미국에서 자랐기 때문에 홍콩의 광둥어보다 영어가 훨씬 익숙하다. 공공이 영어를 전혀 못해서 광둥어만 쓰는 것과 달리 제임스 홍 본인은 양자경에게 광둥어 코치를 받으면서 촬영을 해나갔다고. 배우로서는 영어를 잘하는 덕분에 이렇게 오랜 시간 할리우드에서 동양인 캐릭터를 계속 맡을 수 있었다.
그가 수상소감에서 밝혔듯, 과거 할리우드는 '보편적인 특징'을 빌미로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숨김없이 표현해왔다. 제임스 홍 또한 오리엔탈리즘이 강하게 스며든 <빅 트러블>에서 신비한 주술사 로판을 연기한 바 있다. 그럼에도 그는 드웨인 존슨이 <빅 트러블> 속편을 기획한다고 밝혔을 때, 다시 한번 로판 역으로 복귀하고 싶다며 애정을 드러냈다. <빅 트러블>의 오리엔탈리즘이 강한 건 사실이지만, 그만큼 동양인 배우들에게 비중을 주고 대거 기용한 영화이기 때문인 듯하다.
그외에도 그가 출연한 수많은 영화 중 유명한 것을 뽑자면, <블레이드 러너>와 <차이나타운>(1974)이 있다. <블레이드 러너>에선 레플리칸트의 눈을 디자인한 과학자 한니발 츄를 연기했다. 저온 실험실에서 지내며 레플리칸트의 신체를 연구하는 와중에, 삶을 연장하고 싶은 레플리칸트 로이(룻거 하우어) 일당에게 심문을 받게 된다. <차이나타운>에선 에블린 멀레이(페이 더너웨이)의 집사 칸을 연기했다. 과묵하면서도 에블린과 캐서린을 위해 움직이는 캐릭터다.
이렇게 오랜 세월 다양한 작품, 다양한 캐릭터를 선보인 제임스 홍은 많은 영화인들의 추천을 받아 2019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Walk Of Fame)에 입성했다. 입성 당시 기준, 역대 최고령 배우로 기록됐으며 19번째 아시아계 스타로 헌액됐다. 그의 헌액 현장엔 한국계 할리우드 배우 대니얼 대 킴과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도 만난 제이미 리 커티스가 자리했다.
여타 할리우드 배우들과 달리 배우 활동에 집중한 편이지만, 그래도 각본과 감독에 도전한 적이 있다. 1989년 영화 <더 빈야드>는 와인 메이커 엘슨 포가 자신이 투자하는 영화의 배우들을 저택에 부르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다소 섬뜩한 포스터가 암시하듯 엘슨 포는 노화를 막기 위해 사람의 피로 와인을 제조하는 비밀을 품고 있었고, 이 사실을 안 배우들은 탈출을 도모한다. 제임스 홍이 각본과 연출(윌리엄 라이스와 공동 연출)을 하면서 직접 엘슨 포를 맡아 의뭉스럽고 괴팍한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2019년 4K로 복원되면서 소소하게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제임스 홍의 '영어에 능숙한 노년의 동양인'이란 장점은 애니메이션계에도 활로를 펴줬다.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의 대표 시리즈 <쿵푸 팬더>에서 제임스 홍은 포(잭 블랙)의 아빠 핑을 맡아 꾸준히 출연하고 있다. 제임스 홍이라고 알고 들어도 그의 얼굴이 연상되지 않을 만큼 포를 무척 아끼는 다정다감한 핑을 정확하게 표현한, 훌륭한 목소리 연기를 펼쳤다. <뮬란>은 황제의 보좌관 츠푸를 맛깔나게 연기해 그를 한층 더 얄밉게 만들었고, <메이의 새빨간 비밀>에서도 가오 할아버지를 맡아 씬스틸러로 활약했다. 배우 활동만큼 왕성한 성우 활동으로 <셜록 놈즈> <스노우 몬스터> <틴 타이탄즈 고!> <트롤헌터: 라이즈 오브 타이탄> 등 TV 시리즈, 극장용 애니메이션 가리지 않고 출연하고 있다.
이제 제임스 홍의 '넥스트 스텝'은 무엇일까. 가장 눈에 띄는 차기작은 <팻시 리 & 더 키퍼스 오브 더 파이브 킹덤스>(Patsy Lee & The Keepers of the 5 Kingdoms)이다. 이 영화는 골동품 가게 주인과 손녀가 포탈 스톤으로 신비한 땅에 떨어지고, 함께 모험을 떠나는 스토리를 다루는데 제임스 홍이 스토리 원안을 썼다고 한다. 물론 골동품 가게 주인 '척 리' 역까지 소화한다. 최근 포스터를 공개하면서 개봉에 불씨를 붙였지만, 개봉일은 아직 미정이다. 이외에도 쿵푸 액션 영화 <김미 마이 머니>,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아메리칸 본 차이니즈>에서 얼굴을 비출 예정이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