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가고 싶다. 뉴스를 보던 나는 입버릇처럼 중얼거렸다. 헤드라인을 장식한 소식들이 하나같이 암울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 청소년들의 화합의 장이 되었어야 하는 잼버리는 나날이 악몽 같은 상황이 이어지는데, 나서서 책임지겠다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어른들은 서로의 탓을 하느라 바쁘다. 국가가 친 사고를 국민들이 십시일반 수습하는 아주 익숙한 광경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창피해서 도망가고 싶다.
도망가고 싶다. 제 삶의 불행과 사회를 향한 울분을 이유로 길거리에서 흉기 난동을 부리는 남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나 또한 흉기 난동을 하겠다”라고 예고하는 글이 온라인을 수놓았다. 사건의 원인을 사회적으로 분석해야 할 의무가 있는 언론은, 사태 해결이나 모방 범죄 예방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범죄자 신상 공개에 나섰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때다 하면서 사형제를 부활시키자는 이야기가 나온다. 흉기 난동 용의자로 추정된다는 이유로 중학생 소년이 사복경찰에게 폭행을 당했는데, 불심검문을 강화하자는 목소리에 묻혀 폭행 소식은 잘 들리지도 않는다. 절망적이어서 도망가고 싶다.
도망가고 싶다. 자폐증이 있는 아들을 키우는 모 유명 웹툰 작가의 갑질 논란이 일자, 어떤 이들은 이때다 하고 발달장애 혐오를 여과 없이 표출한다. 수십 년간 이어져 온 통합교육 논의는 ‘비장애인의 평화로운 일상을 해치는 장애인들은 격리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묻혀 후퇴한다. 갑질에 대한 정당한 분노인 양, 장애 혐오가 은근슬쩍 ‘의견’으로서의 시민권을 얻었다. 막막해서 도망가고 싶다.
도망가고 싶다. 입추가 되어도 한낮 기온이 34도를 넘나드는 불볕더위는 가시지 않는데, 대체 언제쯤 날이 선선해질지는 불분명한데, 기후 위기의 시대에는 이런 날씨가 특이한 게 아니라 일상이 될 것이라는 전망만큼은 선명하다. 남극의 빙하는 녹아내리고 있고, 가을 또한 우리가 알던 가을이 아닐 것이다. 더워서 도망가고 싶다.
하지만 대체 어디로 도망갈 것인가. 세계 어디를 가면 부끄럽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고,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가? 심지어 이 기후 위기의 시대에 어딘들 무덥지 않으랴? 입버릇처럼 도망가고 싶다고 중얼거리는 나도 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현실도피를 반복하고는 있지만, 사실 도망칠 수 있는 곳 같은 건 없다. 〈베르세르크〉의 가츠가 말한 것처럼,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는 거다.
맥스 로카탄스키(톰 하디)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들이 있는 녹색의 땅’을 찾아 임모탄의 아내들과 함께 사막을 건너온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녹색의 땅이 이미 오염되어 사라졌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기껏 목숨을 걸고 먼 길을 달려왔는데 갈 곳이 없어진 상황, 퓨리오사는 마지막 희망을 끌어모아 부발리니 전사들과 임모탄의 아내들을 데리고 소금사막을 건너기로 결심한다. 트럭을 버리고 바이크에 기름을 가득 넣으면 160일은 달릴 수 있다고, 같이 가지 않겠냐고. 맥스는 제안을 거절한다. 막연하게 도망친다고 해서 낙원 같은 게 나올 리가 없으니까. 맥스는 말한다.
“희망을 가지는 건 실수야. 이미 망가져 버린 삶을 고칠 수 없다면, 결국 미쳐버릴 거야.”
퓨리오사 일행은 맥스의 말을 듣지 않고 떠났다. 맥스도 그 길로 제 갈 길을 가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맥스는 고민 끝에 소금사막을 건너려던 퓨리오사 일행을 따라가 길을 막고 말한다. 소금사막으로 갈 게 아니라고. 당신들이 도망쳐 온 땅, 시타델로 돌아가자고. 임모탄의 아내들은 맥스의 말에 “당신 더는 안 미친 줄 알았는데”라며 냉소한다. 임모탄 조(휴 키스-번)가 워보이들을 거느린 채 엄청난 양의 물을 독점하고 군림하는 폭압의 땅 시타델로 돌아가자니, 그게 무슨 말인가? 우리가 어떻게 빠져나왔는데? 부발리니 전사들도 고개를 갸우뚱한다. “산을 돌아서 가려면 2주나 걸려.” 그러나 맥스는 계속 말한다. 임모탄 조가 당신들을 쫓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에 시타델을 접수해버리자고. 우리가 도망쳐 왔던 그 길 그대로, 전투트럭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려 협곡을 정면돌파해서 가자고.
“이봐, 쉽진 않을 거야. 하지만 내가 장담하건대 저쪽으로 160일을 달려본다 한들 소금밖에 없어. 저쪽으로 가면 최소한 우리가 함께 어떤 종류의 구원을 얻게 될지도 모르지.” 맥스의 말은 분명하다. 막연한 전망을 쫓으며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는 황야를 달리는 것은 가짜 희망이다. 언제 도달할지 모르는 희망으로 눈을 가려 현실의 고난을 감추려는 허구다. 그러나 난맥을 각오하고 애초에 문제가 있었던 곳으로 돌아간다면, 거기에서 새로운 희망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뭐가 문제이고 무엇과 싸우게 될지는 알고 있으니까. 퓨리오사는 조심스레 맥스의 손을 잡고 그가 제안한 길을 달린다. 온갖 더럽고 위태로운 싸움을 뚫고 지나가야 하는 고난의 행군 속으로.
조지 밀러 감독의 연작 〈매드 맥스〉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인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는 시리즈 중 가장 직접적으로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는 물과 기름과 총알이라는 자원을 독점한 남자들이 세상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를 노골적으로 폭로하고, 그 세계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폭력과 착취의 굴레에서 신음하던 일군의 여성들이 탈출을 기도하다가, 체제의 일부로 포섭되길 거부한 방랑자와 힘을 합쳐 체제를 전복해 민중을 구원한다는 스토리라인은 그 어떠한 복잡한 상징이나 은유 없이 직설적이다.
이토록 노골적인 혁명 서사의 메시지 중 가장 전복적인 것은, 완전한 유토피아 같은 건 없다는 것이다. 세상은 모두 한 덩어리로 망하고 있고, 거기에서 자유로운 낙원 같은 건 없다. 그러니, 괴롭고 고단하더라도 지금 여기에서 싸워야 한다. 수치심에 도망가는 게 아니라 그 감정을 인정하고 그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일, 혐오와 엄벌주의라라는 쉽고 빠른 감정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복잡하고 골치 아픈 답을 찾는 일, 분리주의라는 허구의 답이 아니라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합의를 어떻게든 모색하는 일, 망가져가는 지구라는 상수를 받아들이며 내가 할 수 있는 실천을 찾는 일. 그러니까,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싸움을 하는 일이 중요하다.
물론 여전히 도망가고 싶다. 하지만 안다. 맥스가 말한 것처럼 “이미 망가져 버린 삶을 고칠 수 없다면, 결국 미쳐버릴” 것이다. 왜냐하면 그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신기루를 쫓아 160일을 달린다 한들 결국 소금밖에 없을 테니까. 그러니 다른 도리가 있나. 이 모든 수치와 고통을 끌어안고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수밖에. 글쟁이가 세상을 만나는 도구는 끝내 글이니까, 이런 글이라도 쓰면서 말이다.
이승한 TV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