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린 역의) 정이주 배우는 얼굴에 서늘한 데가 있어서 애처로움과 의심스러움의 경계가 잘 나타나요.
이주 배우에겐 뚜렷한 자기 고집이 느껴져요. 그 고집이 좋은 고집이면 정말 좋을 텐데, 잘못된 신념이 박혀 있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그걸 맹렬히 추구할 것 같은 느낌이 있는 거예요. 배우 본인은 선우 캐릭터를 하고 싶다고 했는데, 채린을 해주셔야 합니다 부탁하게 됐죠.
오프닝을 보면 나미는 채린의 편이었던 건데, 본격적으로 영화가 시작하면 나미와 선우는 갑작스럽게 같이 죽는 사이가 되어 있어요. 그 사이의 설명을 부러 비워놓은 것 같아요.
나미가 또래 사이에서 외톨이가 되는 과정이나 선우가 괴롭힘당하는 과정들이 보여질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어요. 출발하는 단계에서 그 설정만 보여준다고 해도 관객들한테는 너무 익숙한 풍경일 테고. 우리가 어떤 사람을 어떤 집단 안에서 스스로가 혹은 누군가를 외톨이로 만들거나 외톨이가 되는 과정을 디테일하게 묘사하는 게 그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한테는 잔인한 걸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구태여 그걸 펼치면서 2차 가해를 할 필요가 없었죠.
엄마가 선우를 쳐다볼 때 그 건조한 태도가 영화 통틀어 가장 잔인하다고 느껴졌어요. 선우의 동생 선주도 방효린 배우가 연기한 거죠?
네, 선우와 선주는 쌍둥이예요. 쌍둥이니까 같은 환경에서 자랐는데 한 명은 사고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됐고, 한 명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지만 오랫동안 학폭의 피해자로 외롭게 지냈고요. 선주는 멀쩡한 애가 답답하게 그러고 다니냐는 식으로 언니에게 본인의 불행을 덧씌웠을 것 같아요. 가족 안에서는 아프고 예민한 선주를 집중하니까 그게 또 기묘한 권력이 돼서 선우는 가정 안에서도 투명인간이 되었을 것 같아요. 아 갑자기 소름 끼치네요, 선우가 가여워서.
한편, 나미 엄마가 “나 송성희야, 이것들아. 얻다 대고 까불어”하는 대사가 있어요. 나미랑 같은 성을 가진 이름이라 그게 좀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성이 같다는 것만 알고도 관객들이 미혼모로 아이를 키운 어머니라는 걸 알겠다고 생각했어요. 꿋꿋하게 아이를 혼자 키운 건데 그동안 얼마나 부침이 많았겠어요. 아마 살면서 씩씩하고 굳세고 지독하게 버텨야 해 더 강해져야 돼 이런 가치관을 갖고 살아왔을 것 같은데, 엄마가 자기한테 계속 그렇게 얘기하는 것 때문에 나미는 슬프고 외로웠을 것 같아요.
정말 반성은 한 건지, 죗값을 치렀다고 믿고 있긴 한 건지, 채린의 속은 정확히 알 수가 없어요. 정이주 배우한테는 어떻게 디렉션 하셨어요?
진짜로 본인은 정말 회개했다고 믿어야 한다고 얘기했어요. 지금 하는 행동을 나미와 선우나 관객들이나 진짜가 아니라고 보겠지만 본인은 무조건 진짜라고 믿어야 한다고. 채린이 같은 영악한 아이가 그 공간에서 어떻게 사이비를 믿고 버티겠어요, 생각하면 좀 이상한 일이잖아요. 그런데 채린이는 그걸 믿을 수밖에 없거든요. 믿어야만 지금과 다른 것들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니까. 낙원에 갈 수 있는 것들을 점하려면 믿어야 하고 회개하는 것만이 이 사람한텐 유일한 방법이에요. 그런 척하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속이는 거죠. 동시에 본인이 몰락했기 때문에 약간은 뒤돌아본 것도 조금은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런 걸 크게 포장해서 자신은 깨끗하게 회개했다고 믿는 상황인데,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 건 만만한 나미한테만 미안하다고 하는 걸로 가장 표가 나죠. 정말 미안하고 회개했다면 선우한테 미안하다고 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