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폭력과 사이비 종교를 소재로 한 성장영화 <지옥만세>는 <거짓말>(2009)을 시작으로 일련의 단편 작업으로 주목받아온 임오정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고등학생 나미(오우리)와 선우(방효린)가 함께 자살을 하려던 중에 자기를 괴롭힌 채린(정이주)이 서울에서 잘 사는 모습을 보고 복수하기 위해 서울로 향하고, 채린이 속한 사이비 종교와 얽히게 되는 이야기. 당대 프랑스 영화계를 대표하는 알랭 기로디 감독이 작년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지옥만세>를 손꼽은 바 있다. 임오정 감독을 만나 <지옥만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 스포일러성 정보가 많습니다.


2009년 단편 <거짓말>을 공개한 후 간간이 단편들을 발표하고 13년 만에 첫 장편 <지옥만세>를 완성했습니다. 그동안 여러 이야기들이 있었을 텐데 <지옥만세>가 장편 데뷔작이 됐습니다.

<거짓말>은 (한예종 영상원) 2학년 말에 찍은 실습작이었어요. 이후에 계속 단편 작업을 했는데 장편 기회가 많지 않더라고요. 단편들은 제작비를 먼저 생각하고 찍을 수 있는 환경을 고려한 다음에 이야기를 쓰는 상황이어서 세심하거나 내밀한 관계성을 다룬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내가 찍으려고 쓰고자 하는 이야기는 상업적인 게 없나, 장편영화로서 크기가 안 되는 건가, 하는 고민을 오랫동안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추구하고자 하는 건 캐릭터와 캐릭터의 관계성이고 거기서부터 사건이 출발한다고 깨달아서 영화를 찍게 되기까지 좀 오래 걸렸던 것 같고. 주인공들을 먼저 떠올리고 그들이 펼쳐나가는 모험담 같은 걸, 그동안은 제작비나 상황들을 걱정했지만 이번엔 걱정하지 말고 써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하며 썼어요. 영화를 그만두면 너무 억울할 것 같은 심정에서. 그래서 늦게 데뷔했지만 사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영화를 찍었잖아요. 저도 만약에 이걸 안 찍었으면 영화를 그리워하거나 미워하면서 있었을 것 같기도 하고.

<지옥만세>의 시작점은 무엇인가요?

외부와의 연결이 별로 없는 상태로, 그냥 일하고 집에서 영화 준비하고 혼자서 시나리오를 계속 구상하고… 셰도복싱 하는 것 같은 완전히 고립된 시기였거든요. 되게 외로웠고, 그냥 인간으로서 어떤 삶을 유지하는 것과 동시에 영화적인 목숨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그런 고민들이 많았어요. 계속 영화를 만들고 싶은데 포기해야 하나, 그게 저한테 죽음 같은 느낌이었고. 꼭 그것만이 아니더라도 고립된 그 외로움에서 자꾸 침잠하는 마음으로 파고들 수밖에 없었던 순간들이 있었고, 그런 우울함과 고립감 사이에서 <지옥만세> 주인공들을 떠올리게 됐어요. 내가 괴로운 거 봐줘 알아줘 외치는 나미 같은 캐릭터와 그게 너무 오래돼서 아무 말조차 할 수 없는 상태인 내면에 너무 깊은 어둠을 가진 선우 두 명을 같이 만나게 해서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볼 수 있는 첫 순간으로 영화를 마무리하는 이야기를 찍고 싶다였던 게 있고, 그들이 어떤 존재보다 생생했으면 좋겠다, 느끼고 뛰어다니고 발악하고 온통 살아있는 것들을 보여주면서 그들이 죽음을 추구한다는 아이러니를 같이 보여주고 싶었어요.

학교 폭력과 사이비종교, 두 소재가 두드러지는 영화죠. 그럼 전자가 먼저였던 건가요?

처음 머릿속으로 떠올렸던 말은 “종말을 꿈꾸는 소녀가 종말을 믿는 소녀를 만난다”였어요. 개인의 종말이 죽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그 개인의 종말을 꿈꾸는 나미나 선우 같은 아이가 세상의 종말을 믿고 있는 채린이 같은 아이를 만나는 이야기를 떠올렸어요. 나미의 경우에는 이 삶이 너무 괴로워서 그걸 끊어내고 싶어 죽음을 안식처로 추구하는데 그걸 실행하기엔 자신이 없고 겁나서 외부의 우연을 바라고, 채린이 같은 경우는 본인이 원래 계급의 꼭대기에 있었기 때문에 그게 몰락한 후에는 얘 나름의 아포칼립스 상태고 그 상태에서 자기 계급의 꼭대기를 점할 수 있는 또 다른 식민지를 찾아서 그걸 낙원이라고 믿으면서 계속 이동해요. 주인공들이 죽음을 계속 안식처로 찾는데 결국 고군분투하면서 자기들이 얼마나 살고 싶은지를 다시 깨닫게 돼요. 다시 살고 싶다기보다는 오늘은 죽지 말까 내일로 미뤄볼까 정도의 출발선상으로 돌아가는 이야기. 채린이한테는 이제 드디어 제대로 몰락한 상태에서 영화가 끝나고요. 목숨은 건졌지만 업신여기던 애들한테 구원받았고, 정말 믿고 열심히 일했던 종교단체가 허상이고 낙원으로 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고 돌아갈 데도 없이 아무것도 없이 길바닥에 서 있는 상태일 거예요.

나미와 선우가 사는 곳을 충주 수안보로 설정했어요.

이곳이 아닌 더 좋은 곳은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주인공들이 사는 곳은 부곡 하와이, 수안보 와이키키 같은 붐이 일었던 90년대 초중반 활성화됐던 유원지였어요. 저도 충청도 출신이라 어릴 때 아버지와 함께 놀러간 기억이 나는데, 문득 그곳이 어떻게 됐지 하며 검색해봤는데 폐허가 돼 있더라고요. 허상의 가치 같은 것들이 총집합된 가짜 이미지의 공간에서 고통받는 아이들의 모습이 펼쳐진다는 게 대한민국을 은유한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다른 곳을 계속 추구하고 떠나려고 하지만 결국 계속 똑같은 지옥의 지옥의 지옥의… 저마다의 지옥 속에 있는 것들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와이키키 랜드나 나미와 선우가 자살을 시도하는 목욕탕도 실제 거기 있는 건가요?

네, 전부 수안보에서 찾은 공간이에요. 시나리오엔 자살하는 곳을 숲속을 공간으로 설정해서 써놓았는데, 수안보가 헌팅할 장소로 확정되면서 목욕탕도 알아보게 됐어요. 뜨거운 물이 나오는 도시인데, 아이들이 자살하려는 목욕탕은 아무것도 없이 생명력이 다 말라버린 차가운 느낌이 들었고, 영화에서 계속 등장하는 건 화산이나 불지옥 나중엔 불까지 지르는 것까지 이렇게 대비되는 이미지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재미있었어요. 그리고 실제로 목욕탕 천장에 구멍이 있었어요. 마치 목매다는 거 만들라고 세팅해준 것처럼.

나미와 선우가 죽음을 목격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걸 봤어요. 그래서 그 죽음의 형상도 굉장히 중요했을 것 같아요. 그들이 자살을 시도하는 방식과 나중에 목격하게 되는 죽음이 대구를 이루기도 합니다.

주인공들은 죽음을 안식처라고 생각하면서 추구하는 거잖아요. 근데 실제로 죽음이라는 건 얼마나 차갑고, 아무것도 없는 공허함 그 자체인지 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그 죽음이 아무런 묘사조차 덧붙여지지 않은 죽음이라, 그걸 보며 저게 우리의 모습이었을 수도 있겠구나 느끼고 다시 거기에서 바닥을 치고 다시 생각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봤어요.

임오정 감독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오키 오키”가 각인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후킹한 대사를 노린 의도도 있나요?

실제로 주변에서 많이 듣던 말이에요. 그 말이 약간 위악적이라고 느꼈어요. 말 자체가 귀엽고 긍정성을 과장해서 표현한달까. 그런데 그 말을 가장 어두운 친구가 계속 내뱉는다는 게 슬펐어요. 선우는 뭔가를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말을 평소 잘 못했을 것 같아요. 눈치 보면서 억지로 웃거나 긍정어를 내뱉는 게 익숙한 선우가 내뱉는 “오키 오키”가 정말로 깨끗하게 긍정하는 마음이었을까 라고 한다면 초반의 “오키 오키”는 그런 것 같지 않아요. 그래서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오키 오키”의 느낌은 달라졌으면 좋겠다는 의지가 생겼어요.

방효린 배우 특유의 톤이 “오키 오키”의 기묘한 맛을 더 잘 살리고 있어요. 배우의 목소리를 듣고 쓴 대사는 아니죠?

처음부터 있었는데 그걸 잘하는 배우를 찾았어요. 선우 역 배우를 찾는 데에도 아주 중요한 요소였고요. “오키 오키”가 들어간 신을 연기하게 부탁드리고, “다 좋긴 한데 오키 오키가 안 좋아” 하면서 오디션을 봤어요. 효린 배우는 선우와 채린 두 캐릭터 오디션에 참여했어요. 두 역할 모두 저희를 감동시켰던 배우였는데, 결정적으로 선우 역할을 부탁드리게 된 것도 그 “오키 오키”였어요. 애처롭기도 하고 어떤 순간엔 약간 꿍꿍이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 미묘한 선을 잘 표현해줬어요.

오디션 당시 방효린 배우가 연기한 신은 각각 무엇인가요?

선우는 옥상에서 가게 악플 내가 달았다고 고백하는 신이었고, 채린은 명호가 죽었다는 걸 알게 되는 신이었어요. 여전히 둘 다 잘했다고 생각하는데 채린 역할을 할 때는 진짜 애처로웠어요. 고집과 패악질의 감정과 동시에 모든 걸 잃어버린 여자의 느낌을 잘 보여줬거든요. 그리고 효린 배우도 사실 채린 역할을 하고 싶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런데 정말 선우를 대체할 수는 없더라고요. 선우가 가지고 있는 깊숙한 어둠이나 잔인함,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혐오의 감정이 동시에 드러나야 하는데 그걸 효린 배우가 문장마다 결마다 다 연결해줘서 그 감정의 파도를 같이 느낄 수 있었어요.

(채린 역의) 정이주 배우는 얼굴에 서늘한 데가 있어서 애처로움과 의심스러움의 경계가 잘 나타나요.

이주 배우에겐 뚜렷한 자기 고집이 느껴져요. 그 고집이 좋은 고집이면 정말 좋을 텐데, 잘못된 신념이 박혀 있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그걸 맹렬히 추구할 것 같은 느낌이 있는 거예요. 배우 본인은 선우 캐릭터를 하고 싶다고 했는데, 채린을 해주셔야 합니다 부탁하게 됐죠.

오프닝을 보면 나미는 채린의 편이었던 건데, 본격적으로 영화가 시작하면 나미와 선우는 갑작스럽게 같이 죽는 사이가 되어 있어요. 그 사이의 설명을 부러 비워놓은 것 같아요.

나미가 또래 사이에서 외톨이가 되는 과정이나 선우가 괴롭힘당하는 과정들이 보여질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어요. 출발하는 단계에서 그 설정만 보여준다고 해도 관객들한테는 너무 익숙한 풍경일 테고. 우리가 어떤 사람을 어떤 집단 안에서 스스로가 혹은 누군가를 외톨이로 만들거나 외톨이가 되는 과정을 디테일하게 묘사하는 게 그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한테는 잔인한 걸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구태여 그걸 펼치면서 2차 가해를 할 필요가 없었죠.

엄마가 선우를 쳐다볼 때 그 건조한 태도가 영화 통틀어 가장 잔인하다고 느껴졌어요. 선우의 동생 선주도 방효린 배우가 연기한 거죠?

네, 선우와 선주는 쌍둥이예요. 쌍둥이니까 같은 환경에서 자랐는데 한 명은 사고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됐고, 한 명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지만 오랫동안 학폭의 피해자로 외롭게 지냈고요. 선주는 멀쩡한 애가 답답하게 그러고 다니냐는 식으로 언니에게 본인의 불행을 덧씌웠을 것 같아요. 가족 안에서는 아프고 예민한 선주를 집중하니까 그게 또 기묘한 권력이 돼서 선우는 가정 안에서도 투명인간이 되었을 것 같아요. 아 갑자기 소름 끼치네요, 선우가 가여워서.

한편, 나미 엄마가 “나 송성희야, 이것들아. 얻다 대고 까불어”하는 대사가 있어요. 나미랑 같은 성을 가진 이름이라 그게 좀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성이 같다는 것만 알고도 관객들이 미혼모로 아이를 키운 어머니라는 걸 알겠다고 생각했어요. 꿋꿋하게 아이를 혼자 키운 건데 그동안 얼마나 부침이 많았겠어요. 아마 살면서 씩씩하고 굳세고 지독하게 버텨야 해 더 강해져야 돼 이런 가치관을 갖고 살아왔을 것 같은데, 엄마가 자기한테 계속 그렇게 얘기하는 것 때문에 나미는 슬프고 외로웠을 것 같아요.

정말 반성은 한 건지, 죗값을 치렀다고 믿고 있긴 한 건지, 채린의 속은 정확히 알 수가 없어요. 정이주 배우한테는 어떻게 디렉션 하셨어요?

진짜로 본인은 정말 회개했다고 믿어야 한다고 얘기했어요. 지금 하는 행동을 나미와 선우나 관객들이나 진짜가 아니라고 보겠지만 본인은 무조건 진짜라고 믿어야 한다고. 채린이 같은 영악한 아이가 그 공간에서 어떻게 사이비를 믿고 버티겠어요, 생각하면 좀 이상한 일이잖아요. 그런데 채린이는 그걸 믿을 수밖에 없거든요. 믿어야만 지금과 다른 것들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니까. 낙원에 갈 수 있는 것들을 점하려면 믿어야 하고 회개하는 것만이 이 사람한텐 유일한 방법이에요. 그런 척하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속이는 거죠. 동시에 본인이 몰락했기 때문에 약간은 뒤돌아본 것도 조금은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런 걸 크게 포장해서 자신은 깨끗하게 회개했다고 믿는 상황인데,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 건 만만한 나미한테만 미안하다고 하는 걸로 가장 표가 나죠. 정말 미안하고 회개했다면 선우한테 미안하다고 했을 거예요.

선우가 채린이 아직 여왕벌 노릇을 하고 있다는 걸 간파하는 방울토마토 비닐하우스 신은 어떤가요?

어린 남자애가 일부러 엎은 건데, 자기 딴에는 채린이를 위해서 알아서 봉사하는 아이인 거예요. 나쁜 짓을 한다는 가치관이 아니라, 혜진이 누나가 맨날 이기적으로 굴고 우리를 방해하고 채린이 누나가 낙원 가는 길을 막으니 내가 어쩔 수 없이 이걸 한다는 식으로 그런 행동을 한 거고. 채린이가 직접 시키지 않은 것이냐 라고 한다면, 사실 엄청난 가스라이팅을 아이들한테 하고 있었다는 게 제 설정이었죠.

개인적으로 혜진 역의 이은솔 배우가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다른 배우들은 얼굴 자체가 주는 드라마가 아주 큰데, 이은솔 배우는 드라마가 잘 안 보이는 얼굴 같아요. 그래서 더 역할과 잘 어울리기도 하고요.

혜진이가 가장 어려운 캐릭터였어요. 어쩌면 과거 선우의 모습일 수도 있는, 완전히 고립된 상태를 혼자서 계속 헤쳐가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그 사이비 종교 단체에서 제일 구하고 싶었던 인물이 혜진이에요. 혜진 역도 많은 여러 배우를 오디션 봤는데 은솔이는 실제로 굉장히 밝아요. 그런데 연기할 때는 확 달라지는 모습을 보이더라고요. 순수하고 처연한 것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과 조금만 달라지면 밝아질 수 있는 가능성이 같이 느껴지는 아이의 모습이었어요. 밝음을 잠재하고 있는 아이라는 것이 은솔이를 캐스팅하게 된 이유였죠.

혜진이가 아버지한테 혼나고 밤에 눈치 보면서 우는 모습 바로 다음으로 명호와 채린이 안는 실루엣이 붙어요. 잔인한 연결이에요. 두 신이 이어서 붙는다는 건 시나리오부터 있었던 건가요?

사이비종교에서 권력 구도로 계속 가다보면 가장 끝에는 돈이나 성적인 폭력 관계가 있어요. 저는 채린이나 명호나 서로를 이용하고는 있지만, 딴에는 아가페적인 사랑을 한다고 믿는다고 생각했어요. 그 신은 원래는 혜진이가 우는 대목 바로 전이었어요. 혜진이를 혼내고 아버지가 밖에서 담배를 피우면 그 연기 너머로 두 사람의 실루엣이 보인다는 설정. 저한테는 재미있는 쇼트 구성이긴 했는데, 혜진이 아버지한테 시간을 주는 게 불필요하게 느껴졌고 괜한 트릭을 쓰는 것 같기도 했어요. 혜진이가 울고 있고 나미가 고개를 돌리면 채린의 자리가 비어 있다, 그렇다면 그다음에 그 실루엣이 오는 게 순서상 맞다고 생각했어요.

학교 폭력이나 사이비 종교에 대해 리서치를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파고들어 보면서 새롭게 깨닫게 된 면들이 있다면.

학폭 관련해선 피해자분들이 쓴 수기들이 있어요. 그 상황을 극복해나가는 데에 너무나 오랜 세월이 걸리더라고요. 그런데 제 영화에서는 피해자가 그 가해자를 직면하게 만들잖아요.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그게 제일 무섭고 어려웠어요. 아무리 죽음을 감수하고 갔다더라도 저라면 도망치고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요. 그런 상황에서 인물들한테 무언가를 하게 만드는 게 어려웠고, 피해자분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게 하려고 많이 애를 썼어요. 주인공들이 자신을 괴롭힌 사건을 극복하는 걸, 단순히 어른들이 시간이 도와줄 거야 이런 게 아니라, 계속 곱씹어 생각하고 마주하고 상상으로 도전하면서 느끼게 되는 아무렇지도 않아지는 상태가 내 옆에서 계속 밥 먹었어? 뭐 했어? 이렇게 종알종알 물어봐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좀 가능해질 수도 있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선우와 나미를 만나게 했어요.

영화 속 효천선교회는 “하늘의 효를 다한다”며 나름 K스럽게 만든 거예요. 사이비 종교가 생각보다 다양한 종교들을 차용해와요. 유교도 있고 무속도 있고 온갖 것들이 다 뒤섞여 있는 게 정말 한국스럽다, 기복신앙의 정점이다 싶었어요. 종교적인 논리로는 내세를 꿈꾸는데 사실 굉장히 세속적인 걸 개인한테 요구해요. 헌금은 물론이고, 그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에 개인을 희생시켜요. 한국의 수많은 사이비 종교가 남태평양에 있는 섬들에 자기 산업체를 만들고 교인을 집단 농장으로 이주시키거든요. 그 작은 섬들에 알알이 다 있어요. 개발도상국 같은 나라에 텃밭을 일구듯이 계속 식민지를 착취하려고 이동하는 걸 보면서 결국 다 계급이구나 싶었어요.

가장 어렵게 찍은 장면은 무엇인가요?

감정적으로 제일 어려웠던 신은 나미와 선우가 채린이를 처음 만나는 대목이었어요. 배우들도 인물에 몰입한 상태여서 피해자 입장에서 가해자를 마주한다는 공포심에 어쩔 줄 몰라 했어요. 채린 역의 배우도 본인이 이 정도까지 뻔뻔해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좀 어려워했고요. 관객들이 영화 시작하고 30분이 지나서 얘를 보러 왔기 때문에 저한테는 그 장면이 이 사람이 한순간 아주 파워풀하게 느껴질 수 있는 방법을 묘사하는 순간이었어요. 19회차 만에 촬영한 영화라 빠듯한 상황임에도 그 장면은 아쉬운 점이 있어서 재촬영을 했어요. 물리적으로 어려운 건 불꽃놀이 신. 비닐로 이뤄진 창고라 붙을 붙이면 몇 초 안에 탈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어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찍었는데 생각한 것보다 훨씬 짧게 다 타버렸어요. 10초 안에 타는 바람에 스태프들이 방호복 입고 다시 기름천을 감아서 한 번 더 찍었어요. 소방차도 출동하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단편들에 이어 <지옥만세>에서도 묶인 개가 나와요. 혹시 임오정 유니버스..? (웃음)

동물을 좋아해요.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2018)에서는 주인공 우희(이우정)가 자기를 대입할 수 있는 처연한 존재로서 넣었던 것 같고, <지옥만세>에서는 구조해준 강아지에게서 얻은 목걸이로 자신을 죽게 하려고 한다는 느낌으로 썼어요. 실은 엔딩에도 강아지가 나왔어요, 편집하긴 했지만. 근데 강아지 연출 잘했죠? (웃음) 목적이 그게 아니었더라도 결국엔 선하게 되는 행위를 선우한테 주고 싶었어요.

<거짓말>에도 묶인 강아지 나오는데!

오 맞다. 묶인 강아지에 연민이 많나 보네요. 항상 묶인 진돗개잖아요. 정말 몰랐어요. 진짜 무의식이 있네.

2차 가해의 위험성 때문에 버린 장면들도 있었을 것 같아요.

애초에 찍는 거 자체를 안 했어요. 채린이를 퇴마하면서 막 흔드는 것도 굉장히 폭력적이라서 어떻게 찍어야 하나 찍지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 찍었고, 내용상으론 얼굴이 그어지는 것까지 보여져야 관객들의 이해가 쉬웠을 텐데 그걸 보여주는 게 정말 괴롭더라고요. 목매다는 장면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어요. 오히려 이야기 상 설명적인 부분들을 많이 뺐던 거 같은데, 개인적으로 빼서 아쉬운 두 신을 얘기해도 될까요?

그럼요. 실은 그거 듣고 싶어서 여쭤본 건데요!

나미와 선우가 서울로 출발하기 전에 버스에서 아직은 좀 뗀뗀한 상태거든요. 약간 토라진 선우를 풀어주기 위해서 지금쯤 캠프파이어 하고 있겠구만 하고 괜히 말 걸어도 여전히 토라져 있으니까 별 거 없어 하면서 춤추면서 흉내내고, 그때 선우가 처음 피식 웃어요. 두 사람의 마음이 살짝 링크 되는 걸로 그리고 싶었어요. 유치하다는 의견도 있었는데, 저한테는 되게 애틋한 순간이었거든요. 또 다른 건 남은 혜진이와 교회 아이들에 대한 후일담이에요. 선우의 핸드폰을 혜진이가 받았나요? 라는 관객들의 질문이 꽤 있어요. 나미와 선우가 서울 갈 땐 따로 앉아서 가지만 집으로 돌아올 땐 서로 옆에 앉아서 오잖아요. 바로 그다음에 “한편 교회에서는…” 처럼 혜진이가 선우의 핸드폰으로 오핑의 노래를 들으면서 사이비를 검색하고, 주변 아이들도 와서 사이비가 뭐야 하면서 기사를 같이 보는 장면이 있었어요. 아이들한테 바깥 세계와의 연결성을 보여줘서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고 싶었어요.

아까 마지막 장편이라고 생각하면서 만들었다고 하셨는데, 다음 영화도 볼 수 있겠죠?

물론이죠!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