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하고 싶거나 혹은 취해야만 하는 삶
우리의 삶은 고되고, 잠시 술에 취하면 삶의 고통을 잊을 수 있다. 에탄올과 급속 항우울제 약물은 같은 뇌 경로를 활성화시키며 신경계에서 같은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알콜에 취한 쥐는 단기적으로 우울 증세가 줄어들며, 생존 의지가 더 강하고, 취하지 않은 쥐에 비해 스스로를 가꾸려는 행동을 3.5배 더 많이 한다고 한다. 우울한 쥐는 쉽게 포기하고, 그루밍을 덜 한다.
지난 8월 30일 개봉한 영화 <거룩한 술꾼의 전설>(1988)의 주인공 안드레아스(룻거 하우어)는 폴란드 출신으로 탄광의 광부로 일하다 사건에 휘말려 추방된 인물이다. 오갈 곳이 없는 그는 파리 곳곳을 떠돈다. 지하철역을 떠돌며 신문을 모아 이불 삼아 덮고 자고,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다 다리 밑에서 잠을 청한다. 어느 날 익명의 부유한 사람(앤서니 퀘일)을 만나게 되고, 그는 안드레아스가 겪고 있는 상황을 단숨에 이해하며 성당의 소화 테레사에 기부해 최대한 빨리 갚는다는 조건으로 200프랑을 선뜻 쥐여준다. 그 한 주 동안 미사를 기다리며, 안드레아스는 돈을 갚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점점 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는 흘러간다.
영화는 조셉 로스의 1939년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이탈리아 작가 겸 감독인 에르마노 올미가 툴리오 케지치와 공동 각본을 맡았다. 원작은 약간 노골적인 퍼포먼스와 거의 순진무구한 느낌을 주는 인물의 서사를 따라가며 고조되는 작품이다. 우연한 행운으로 큰돈이 생긴 주인공이 그 돈을 소비하고 갚아나가는 과정이라는 궁극적으로 매우 단순한 줄거리 구조를 올미 감독은 2시간 동안 여유롭게 따라간다. 중간중간 다소 느려지는 리듬 덕분에 인물의 말투, 감정, 상황에 충분히 몰입할 수 있으며 단테 스피노티 촬영 감독의 화려하고도 아름다운 촬영으로 매 시퀀스마다 충분히 호흡을 늦추게 만든다.
1980년대 특유의 선명한 파란색과 주황색 대비가 돋보이는 와중에 적절한 조명의 사용으로 영화는 곳곳에 상징과 시각적 은유로 가득 찬 미술적 성취와 이탈리안 시네마 특유의 소동극스러운 미학을 입증한다. 200프랑으로 시작된 안드레아스의 여정이 펼쳐지면서 그는 떠나온 폴란드의 집, 일터, 옛 인연들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그 앞에 쌓여가는 빈 와인잔이 늘어가며 술에 취해 프랑스로 망명하게 된 비극적인 사건도 그를 스쳐 지나간다. 플래시백은 안드레아스의 성격을 보여주고, 한 에피소드에서 다른 에피소드로 넘어가면서 현재의 장면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와중에 전문 배우와 비전문 배우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뛰어난 조연 연기로 영화의 밀도는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단순한 플래시백으로 제시되던 과거는 점차 환각-현재 속에서 과거를 말 그대로 섞어버리는-으로 바뀌어간다.
에르마노 올미라는 거장의 품격
에르마노 올미 감독은 1978년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인 <나막신 나무>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오스트리아 작가 조셉 로스의 1939년 동명 소설을 각색한 <거룩한 술꾼의 전설>으로 10년 후 베니스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낯선 사람이 200프랑을 선뜻 쥐여준 은혜를 갚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안드레아스의 모험적 여정 -담론적이고 성서적인 파리 오디세이-을 다룬 올미의 영화는 당시 급진적이고도 획기적인 성취로 인정받았던 아트하우스 영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에 빚진 확고한 휴머니스트로서의 올미의 명성과는 상반되는 매혹적인 영화로 남아 있다. 올미가 타계한 후 세르지오 마타렐라 대통령은 “소박한 사람들의 감정과 자연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를 존중하면서 그 기원으로 돌아가 농민 문명에 목소리를 냈다”는 찬사로 애도를 표했다. 대부분의 대중들이 올미 감독을 기억하는 영역에서 그의 명성을 요약한 한 마디였다. 역사가이자 학자인 P. 애덤스 시트니가 올미를 “아마추어 배우들과 광범위하게 작업하고, 단순화된 자연주의적 설정을 선택했으며, 정교한 인공물이나 조명을 피하고, 금욕적인 카메라 스타일을 사용했다”고 평가한 것이 더욱 흥미롭다.
욕망을 모두 드러내는 <거룩한 술꾼의 전설>을 고려하면, 우리는 후자가 특히 궁금해진다. 영화의 제목은 환상적인 비유를 암시하는데, 올미는 이를 그대로 표현하여 마치 반쪽짜리 기억을 불태우는 것처럼 장면을 구성한다. 오프닝만으로도 마치 꿈속에서 나온 것 같은 연출이다. 안드레아스는 자신이 ‘회심의 기적’을 경험했다고 믿는 한 낯선 사람으로부터 절실히 필요한 200프랑을 선물받은 후, 센 강변을 따라 초저녁의 호박빛이 비치고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이 드리워진 익숙한 아치형 통로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간다. 자신의 마지막 유품인 소박한 소지품 상자를 열고 회중시계를 꺼내어 살펴보고, 뿌연 연기에 가려진 두 가지 기억, 즉 과속하는 기차와 노부부가 그를 배웅하는 고향의 기차역 플랫폼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영화는 안드레아스가 다시 스스로를 돌보며, 돈을 모아 주일 미사 전에 술로 탕진하지 않으려는 시도를 따라가지만, 과거 회상, 스타카토처럼 솟아오르는 이미지들의 폭발적 움직임, 흐릿한 반쪽짜리 기억에서 출발한 빛의 놀이로 가득 차 있다.
연기, 연출, 음악의 성스러운 삼위일체, 신성함 그 너머
미로 같은 파리의 거리를 카택과 함께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영화의 신중한 속도감과 사색적인 연출에 깊은 감동을 받는다. 에르마노 올미의 능숙한 스토리텔링 덕분에 관객은 안드레아스의 내면세계 속에 들어가 그의 기쁨과 슬픔을 심오한 친밀감으로 체험할 수 있다. 촬영감독 단테 스피노티의 렌즈를 통해 포착된 파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캐릭터로 등장하며, 비밀을 속삭이고 그 안에서 펼쳐지는 인간 드라마를 목격하는 도시로 기능한다. 기막히게 활용된 자연광 덕분에 몽환적인 느낌이 더해졌으며, 영화의 정서적 울림은 더욱 깊어졌다.
룻거 하우어가 연기한 안드레아스는 한마디로 압권의 연기를 보여준다. 연약함, 절망, 희미한 희망 등 다양한 감정이 교향곡처럼 어우러진 그의 연기는 인물의 내적 투쟁의 복잡성을 섬세하고 진정성 있게 전달해준다. 이 영화의 대사는 거의 무성영화에 가까울 정도로 드물고, 올미의 연출은 그 긴 침묵의 틈을 이용해 안드레아스의 술에 취해 엉망인 얼굴에 다양한 감정 상태와 반응을 조용히 표현한다. 술에 취한 눈동자와 홍채까지 완벽히 전달되는 와중에 하우어는 부드러운 강렬함이 가득한 강렬한 푸른 눈동자를 충분히 활용한다. 비전문 배우가 섞인 수수께끼 같은 다른 캐릭터와의 케미는 영화의 내러티브를 놀라운 수준으로 끌어올리며 미스터리와 예측 불가의 분위기를 불어넣는다.
무성영화처럼 대사가 절제된 가운데 가장 빛나는 요소는 음악이며, 이고르 스트라빈스키가 작곡한, 호흡과도 같은 섬세한 선율들은 즉각적으로 우리를 감싸며 미묘한 아름다움과 정서적 깊이의 세계로 이동하게 해준다. 목관을 주로 활용한 배경음악은 영화의 주제적 풍요로움을 강조하고 모든 프레임에 초월적인 느낌을 불어넣어 준다. 생동감 있는 스트라빈스키의 리듬이 침묵으로 일관하는 영화의 심장박동이 되어준다.
<거룩한 술꾼의 전설>은 인간의 조건에 대한 심오한 명상이며, 죄책감, 용서, 신앙의 지속적 힘의 복잡성을 깊이 파고들며 질문을 던진다. 이 영화는 거룩함과 구원에 대한 기존의 관념에 도전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인생의 가장 큰 질문에 대해 심사숙고하도록 영화적 공간으로 초대한다.
에르마노 올미의 연출, 룻거 하우어의 탁월한 연기,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생동감 넘치는 리듬이 어우러져 잊을 수 없는 영화적 경험을 선사한다. 영화 애호가라면 반드시 봐야 할 영화이자 실버 스크린의 무한한 예술성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다소 느슨하고 때때로 지루하지만 언제나 가벼운 경이로움과 끝없는 즐거움으로 가득 찬 정신 나간 소동극이 주는 영화적 여정을 떠날 때, 와인 한 잔이 그리워지지 않을까. 살아가며 어쩌다 술에 취해 크게 휘청거리더라도, 누군가 곁에서 든든한 팔을 내밀어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준다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걸작을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김나희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