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계에서 김지운이라는 이름은 르네상스기를 이끈 대중적 작가의 한 축으로 꼽혀왔지만, 그의 작품 세계를 진지한 관심을 갖고 대면하려는 태도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탐미적 미장센의 공포를 추구한 <장화, 홍련>(2003), 우아한 한국형 누아르의 가능성을 연 <달콤한 인생>(2005) 이후, 그를 호명할 때는 ‘스타일리스트’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는데, 이러한 지적엔 시각적 표현에 치중하는 화려함의 이면에 내용의 깊이감은 없다는 식의 함의가 담겨있었음을 떠올리면 더더욱 그러하다.
김지운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킨 건 그의 필모그래피가 보이는 장르적 스펙트럼의 다양성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데뷔작 <조용한 가족>(1998)은 좀처럼 보기 드문 블랙코미디였고, <반칙왕>(2001)에서는 대중의 관심 저편으로 밀려난 프로레슬링을 소재로 끌어들이며 육체적 액션과 코미디를 애환 어린 소시민 멜로드라마의 플롯에 접목시켰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은 이만희의 <쇠사슬은 끊어라>(1971)처럼 한때의 유행이었다가 사라진 만주 웨스턴을 당대 한국영화 프로덕션의 한계를 시험하는 물적 규모로 확장한 모험이었고, <악마를 보았다>(2010)는 과격한 고어 표현이라는 암묵적 금기를 깨버린 과감한 도전이었다. 로봇의 득도(得道)라는 독특한 주제를 그린 단편 <천상의 피조물>(2011)은 지금도 장르의 외형은 이식하지만 그에 걸맞은 주제의식을 심는데 실패하는 한국형 SF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작품으로서의 성취라 할만하다.
분명 김지운은 한국영화의 장르적 영역을 개척하는 선구자적 역할을 해냈고, 이후 다수의 한국 상업영화가 표현의 자유를 얻음에 있어 감독으로서의 경력을 건 그의 모험에 크게 빚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장르의 다양성은 외견 상 일관성이 없어 보인다는 점에서 (과거 스탠리 큐브릭이 그런 대접을 받았듯) 한 사람의 작가주의 감독, 즉 ‘오테르’(Auteur, 독창적·개성적인 영화감독을 뜻하는 말-네이버 영어사전)로서 그를 바라보기 어렵도록 하는 양날의 칼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한국의 사회적 현실, 시사 이슈를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다루는 리얼리즘의 경향에서 빗겨나가 있는 작풍은 외부의 정치적 컨텍스트와 연관 지어 영화를 독해하길 선호하는 비평의 관성에서 손쉽게 설명되고 해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 성취와 위상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그를 작가주의의 언어로 다루는 걸 꺼려왔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감독은 평생 동안 단 한 편의 영화만 만든다. 단지 그걸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반복할 뿐이다.’는 저 위대한 장 르누아르(Jean Renoir : 1894~1979)의 격언에 그 역시 예외는 아니다. 각지각색의 외형을 갖고 있는 김지운의 필모그래피 이면에는 지하에 흐르는 한 줄기의 수맥(水脈)처럼 일관된 작가적 태도가 줄곧 자리 잡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성공이든 실패이든 번갈아가며 시험하길 그치지 않는 장르성의 추구, 그리고 영화의 의미가 즉각 당대의 정치현실로 치환되지 않는 ‘뉘앙스의 영화’를 지향한다는 데에 있다. 예술은 직접적으로 현실을 다루지 않더라도, 그 안에는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작가의 ‘태도’와 세상의 잠재태가 담겨 있기 마련이다. 이제 오랜 침묵을 깬 그가 <거미집>(2023)을 들고 돌아온 지금, 우리는 마침내 그동안 평가절하 되어왔던 김지운의 세계를 되돌아봐야 할 시점에 이른 것인지도 모른다.
통제되지 않는 세계와 소통의 불가능성
‘코믹잔혹극’을 표방한 <조용한 가족>에서 희극적 웃음은 뜻대로 풀리지 않고 꼬이기를 거듭하는 예측불허의 상황과 소통의 단절에서 온다. 산장을 운영하게 된 일가족은 평온하고 안정된 삶을 원하지만, 이들의 계획과 욕망은 산장을 찾는 가지각색의 투숙객들과 엮이면서 일그러지더니 종국엔 산산조각이 나고,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을 수습하려 하는 시도는 도리어 다른 국면의 파국으로 이끌고 갈 뿐이다. 작중 초반에 잠시 등장하고 사라지는 동네 할머니의 불길한 소리는 앞으로 가족이 마주할 파국의 운명을 점지하는 신탁이자 경고처럼 들린다.
삼촌인 창구(최민식)와 집안의 장남 영민(송강호)이 손님을 쫓아가는 장면은 소통불가능으로 인해 빚어지는 착각과 오해를 코미디의 동력으로 활용하는 연출의 예를 보여준다. 창구와 영민은 해를 입힐 생각이 없었지만, 톱과 도끼, 모종삽을 들고 있던 손, 소리가 닿지 않는 인물 간의 먼 거리가 맞물리면서 둘의 의도를 알지 못하는 커플 손님은 겁부터 먹고 달아나려 한다. 찰나의 순간처럼 웃고 지나칠 수 있겠지만 이 영화는 감독으로서 김지운이 훗날 자신의 작품 세계에서 일관되게 펼쳐낼 세계관의 전초전이다.
<반칙왕>에서 은행원 임대호는 버스 정류장에서 프로레슬링에 입문한 이후의 심경과 관장의 딸 민영(장진영)에 대한 마음을 고백하지만, 그가 중요한 얘기를 꺼내는 순간 민영은 대호가 길에서 꺾어다 준 꽃이 바람에 날려가자 이를 줍기 위해 잠시 대호의 곁에서 떠나고, 중요한 이야기가 다 흘러간 뒤에야 듣지 못한 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돌아온다. 인간은 항상 무언가를 욕망하며 타자와 세계를 향해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려 하지만, 그러한 시도는 예기치 않는 불확정성의 변수로 인해 엇갈리고 헝클어지고 실패하고 만다. 이 장면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고 야속하게 어긋나기 일쑤인 세계의 불가해(不可解, 이해할 수 없음을 뜻하는 말-네이버 국어사전)함과 소통불가능의 현실에 처한 인간의 단절되고 고립된 모습에 주의와 관심을 기울이는 김지운의 작가적 모티브를 집약해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이다.
너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 명심해
<장화, 홍련> 중 새엄마 은주(염정아)
통제되지 않는 세계 속에서 소통불가능으로 빚어지는 무대극적 상황의 라이트모티프(Leitmotiv, 되풀이해서 나타나는 어떤 주제나 말, 이미지-네이버 지식백과 드라마사전)에 주목하는 김지운의 연출은 <장화, 홍련>과 <달콤한 인생>에 이르면 희극적 웃음이 아닌, 장중한 비극의 기운을 머금으며 역전된다. <장화, 홍련>에서는 만약 수미(임수정)가 조금만 더 감정을 자제하고, 아버지의 불륜 상대인 은주(염정아)를 노골적으로 적대시하며 말다툼하지 않았더라면 수연(문근영)이 옷장에 깔려 죽어가고 있는 상황을 일찍 알아채고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달콤한 인생>에서는 만약 선우(이병헌)가 보스인 강사장(김영철)의 어린 애인인 희수(신민아)에 대한 자신의 감정, 결코 흔들릴 것 같지 않았던 마음의 균열에 정직할 수 있었더라면, 최소한 이후 마주할 파국보다는 나은 결말을 맞이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의식하지 못한 작은 일, 또는 선의로 한 일이 파국의 씨앗이 되어 돌아오는 상황의 아이러니는 <달콤한 인생>에서 선우가 살해한 총기밀매상의 동생, <밀정>에서 사진관에 남겨둔 사진이 증거로 입수되어 연계순(한지민)이 검거되고 혹독한 고초를 치르는 단초가 되고 마는 부분도 김지운 영화의 내밀한 성격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김지운의 세계 속 인물들은 처한 상황에서 스스로의 감정과 즉각적, 즉물적인 판단으로 어떤 행동을 하지만, 정작 그 행동이 이후에 불러올 반작용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채 그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른다. 자신의 욕망에 골몰하고 협소한 시야에 갇힌 나머지, 넓은 관점에서 전체의 국면을 바라볼 생각은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눈앞에 닥친 상황은 급작스럽고 폭력적이며 억울하게 느껴지지만, 실은 그 파국이 자신이 한 일로 인해 비롯되고 초래된 결과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또는 인정하지 못한다.) 그러한 인물들의 운명을 더욱 가속화하는 건 단편 <천상의 피조물>과 <밀정>에서 극대화되는 타인에 대한 의심과 불안의 문제이다. 분자적 존재로서의 개별자들이 가지는 저마다의 욕망과 감정은 아이러니하게도 처음에 품었던 의도와는 전혀 다른 혼란스러운 국면으로 인물들을 이끌고 수렁에 빠뜨리고 만다.
이와 같은 인간 군상의 천태만상을 영화의 카메라는 거리를 둔 관찰자의 시선으로 관조하고, 관객은 모종의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좀 더 절제하고, 좀 더 서로를 신뢰하고, 조금만 더 지혜로웠다면 영화 속 상황과 같이 돌이킬 수 없는 길을 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탄식을 하게 되는 것이다.(그러한 점에서 김지운의 모든 영화들은 일종의 교훈극적인 성격을 갖는다.) ‘세계의 비인격성‘이라는 테마를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밀어붙인 경우가 바로 <악마를 보았다>이다. 유능한 국정원 요원으로서 상대를 완전히 가지고 놀 수 있다고 확신했던 수현(이병헌)의 자신감은 도리어 그로 인해 더 큰 참상과 자신의 인간성이 망가지는 결과로 되돌아온다. 이때 걸음이 불편한 부상 입은 몸으로도 용케 곳곳에서 출몰하며 범죄를 자행하는 장경철의 다소 비현실적인 동선은 그가 일개 연쇄살인범 하나라기보다는, 결코 통제할 수 없고 설득될 수도 없는 무참한 세계의 폭력과 야만성 그 자체, 초월적이고 불가해한 악의 존재로 받아들여지게 만든다.
작중의 인물들을 바라보는, 세속(世俗)의 혼탁함을 안타깝고 씁쓸하지만 손을 쓸 수는 없다는 감독의 관조적 태도는 은연중에 불교적 모티브와 합류하며 종교적인 분위기까지 띠게 된다. <달콤한 인생>의 오프닝에서 각색되어 인용되는 중국 선불교의 조사 육조 혜능의 고사,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 잠시 뒤 총격전으로 피바람이 불어닥칠 귀시장 한가운데를 가로질러가며 사람들을 안쓰럽게 내려다보는듯한 대형의 누워있는 부처상, <밀정>에서 의열단에 위장 잠입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인 반가사유상이 처음에는 이정출의 양심을 시험하듯 그의 정면을 응시하다가, 김우진(공유)과 접선할 시점에는 옆으로 돌려져 전향을 암시하고 있고, 동지를 팔아넘긴 배신자 갑부를 척살하는 최후반부에 가서는 확고히 의열단의 일원이 된 그의 결심과 친일파의 양심을 시험하는 이중의 표현을 위해 완전히 등을 돌리게 한 연출의 디테일은 작중에 은근하게 드러나는 감독의 시선을 대변하는 아이콘이다.
도달 불가능한 욕망과 삶의 환상에 관한 열정적 탐구
일개 영화 학도이던 시절.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 환호했던 필자는 그 영화를 두고 ‘히치콕적인 웨스턴’이라며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에 빗대는 내용의 메일을 흥분된 어조로 휘갈겨 어찌해서 알아낸 감독의 메일 주소로 보낸 기억이 있다.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매드 맥스 2 – 로드 워리어>(1981)와 같은 아날로그 액션 활극의 박력을 펼쳐내고 싶었던, 장르적 흥분이 임계점까지 치솟은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대추격전 시퀀스를 몇 번이고 DVD와 Blu-ray로 돌려보면서 눈물짓곤 했는데, 강렬한 시각적 어트랙션의 이면엔 어딘가 모를 깊은 슬픔의 정조가 깔려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장면의 기묘한 점은 일본군을 제외하면 작중 어느 누구도 지도에 표시된 목적지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적지에 있는 것이 저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리라 믿고 필사적으로 말을 달린다는 지독한 역설에 있다. 마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와 <말타의 매>(1941)에서 그토록 인물들이 갈망하고 추적하던 대상이 실은 원래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르거나 내용을 전혀 알 수 없듯,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쫓아가는 기이한 여정의 플롯을 취한다.
예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기다리고 있음에도, 거의 종교적 신념에 가까운 환상을 품고 촛불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 마냥 달려가는 마적들. 총에 맞아떨어지고 말발굽에 짓이겨지며, 포화에 휘말리고, 그럼에도 이 대혼란상을 뚫고 달려가는 그들의 모습에는 끝끝내 이해될 수 없는 세계의 불가해(不可解)함과 비인격성, 그럼에도 세계의 진실을 파악하지 못한 채 맹목적인 믿음으로 달려들며 초개처럼 스러지는 눈먼 인간 군상에 대한 연민이라는, 김지운 감독이 이전과 이후의 영화를 통해 평생 관철해왔고, 또 하게 될 작가적 태도와 정서가 블록버스터의 스펙터클이라는 겉모습의 이면에 깃들어있었다.
세상은 통제될 수 없고, 삶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심지어 나 자신의 주변과 감정마저도 마찬가지이며, 내가 한 행동은 원하든 원치 않든 예기치 않은 결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희극이 되었든 비극이 되었든, 이러한 인생의 바닥을 들여다보는 심리의 심연에는 짙은 우수(憂愁)와 슬픔이 깔려있다. 분명 김지운의 영화는 현실의 풍경을 바로 조준하고 직격하는 즉물적 리얼리즘을 추구하지 않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메타(meta)의 차원에서, 특정한 시기와 공간에 제약되지 않는 보편적인 인간 현실에 대한 정서적 리얼리티를 추구하며 인간과 세계의 내적, 외적 혼돈, 모호성의 영역을 탐구하려는 자세를 장르를 바꾸어가면서도 꾸준히 견지해왔다. 종종 여러 인터뷰에서 자주 코엔 형제의 작품들에 대한 애정을 표시해왔던 점도 삶의 심층에 깔린 불가사의에 대한 열정 어린 종교적 탐구라는 점에서 공통된 지점을 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할 따름이다. 그리고 이런 영화는 시대가 지나고 세대가 바뀌어도 낡지 않는다.
<거미집>은 영화 현장에서 벌어지는 아수라장과 그에 처하면서 끝내 걸작을 만들고자 하는 감독의 고군분투기라고 한다. 영화계의 현실을 다룬 메타시네마였던 프랑수아 트뤼포의 <아메리카의 밤>(1973) 그리고 장 뤽 고다르의 <경멸>(1963)이 영화와 현실의 상호침투성, 그리고 촬영현장의 인간 군상이 엇갈리며 빚어내는 혼란상을 그렸던 것을 상기하자면, 이 또한 김지운 본유의 작가적 관점을 투사하기에 더없이 적절한 무대 설정과 이야기임은 분명해 보인다. ‘뜻대로 통제되지 않는 세상의 불가해함과 소통의 불가능성‘이라는 테마의 일관성. 김지운이라는 정육면체 주사위가 이번에는 어떤 식으로 또 다른 면을 펼쳐 보일지 기대를 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조재휘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