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다큐멘터리 <킴스 비디오>는 1990년대 미국 뉴욕에서 쿠엔틴 타란티노, 코엔 형제 등 수많은 영화 마니아들을 사로잡은 비디오 대여점 '킴스 비디오'를 기록한 작품이다. 킴스 비디오의 전설적인 활약상은 물론, 폐점 이후 매장의 컬렉션이 기증된 이탈리아 살레미로 찾아가 그 자료들이 모두 방치돼 있는 걸 발견하고 그걸 다시 되돌려 오려는 두 감독의 고군분투까지 담겨 있다. 80년대 중반부터 킴스 비디오를 운영해온 용만 킴 사장을 만났다.
멋진 어른에게 옛날이야기를 듣는 마음으로 왔습니다. 킴스 비디오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1985년에 운영하던 세탁소 ‘킴스 클리너’가 상당히 컸어요. 공간이 워낙 크다보니 이걸 활용할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저도 간간이 영화를 공부하고 있었고 비디오 대여점도 운영해보고 싶었어서 세탁소 한켠에 시작했어요. 기왕 할 거면 학교에서 책으로 배우지만 비디오로는 도저히 구해 볼 수 없는 테이프들을 많이 확보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선반을 채웠고 그게 상당히 반응이 좋았어요. 85년에 그렇게 시작해서 6개월 만에, 86년 2~3월 정도엔 그 공간을 더 이상 채울 수가 없어서 세탁소 자리 한 블록 밑에 상당히 큰 비디오 가게를 연 게 ‘킴스 비디오’의 효시입니다.
사업과 영화 공부를 병행하셨다는 것부터 흥미로워요.
제 처지가 가만히 공부만 할 수는 없었어요. 밑에 동생이 둘인데, 그 둘이 다 대학에 다니고 있었거든요. 누군가는 돈을 벌어야 하는데, 제일 맏이인 제가 그 역할을 했어야 했죠. 청년 시절에 꽤 잘 벌었어요. ‘킴스 마켓’이나 ‘킴스 클리너’에서 나오는 수익이 동생들 교육이나 생활하는 데엔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로 잘 됐기 때문에 비디오 대여점을 할 땐 거기에서 수익이 창출되지 않아도 좋다, 손님이 안 오더라도 내가 해보고 싶은 스타일로 하겠다, 이런 생각이 강했어요. 그런데 오히려 그게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 거죠. 1982년부터 NYU(뉴욕 대학교)에서 필름 앤 TV 프로덕션 공부를 했어요. 그런데 일이 바쁘니까 학기 등록할 때마다 이 학기를 제대로 마칠 수 있을까 이런 불안이 항상 있었고, 실제로 드랍아웃을 몇 번 했어요. 한 학기에 6~7학점 정도 하는데, 마켓이 24시간 오픈하니까 직원이 많긴 해도 주인으로서 역할이 있고, 마켓이 돈이 잘 벌리면 공부하는 걸 등한시하고, 이런 과정을 계속 겪었어요. 그러다가 학교를 SVA(스쿨 오브 비주얼 아츠)로 옮기면서 86년부터 3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그런 와중에 비디오점이 3개로 늘어나서 마켓과 세탁소 전부 팔거나 닫고 비디오점으로 완전히 넘어갔죠.
킴스 비디오가 마켓과 세탁소 매출까지 뛰어넘은 건가요?
매출적으로는 오히려 마켓이나 세탁소가 훨씬 컸죠. 그런데 우리 킴스 비디오의 스페셜티가 니치마켓(틈새시장)으로서 상당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구나 느꼈기 때문에 큰 포텐셜이 여기에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가게부터는 다른 사업은 다 접고 비디오에만 집중했고, 매년 로케이션을 하나나 둘을 계속 오픈했어요.
처음 “킴스 비디오 하길 잘했다” 생각했던 순간 기억하세요?
86년에 클리너에서 독립을 하자마자 그 생각을 했어요. 그때만 해도 여기에서 돈 벌겠다는 생각은 별로 안 했어요. 내가 정말 해보고 싶고, 손님들이 와서 좋아하고, 이런 분위기만 연출되면 즐기면서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컸는데, 오히려 상당히 잘 된 거죠. 타이틀을 1700개 갖고 첫해에 시작했는데, 6개월이 지나서 매장을 따로 열었을 때는 5000개가 넘었고, 1년도 채 안 돼서 거의 8000개가 됐어요. 그중에 2~30%는 학생들이나 교수들 입장에서 굉장히 보고 싶어 하는 타이틀을 많이 발굴했죠.
대표님이기에 가능했던 킴스 비디오의 강점은 무엇일까요?
학창시절부터 교복 입는 걸 싫어했어요. 동네 형이 하는 양복점에서 가서 교복 안에 천을 대서 색깔을 넣고 학교만 나오면 교복을 뒤집어 입고 다녔어요. 어렸을 때부터 제도나 평범한 걸 싫어했던 편이죠. 23살에 미국에 가서 생활하면서도 뭔가 달라야 여기서 살겠구나, 내가 어떻게 하면 다르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참 많이 했어요. 저니까 다르게 시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1991년까지만 해도 우리가 이 학교에서 배우던 동구권 감독들의 영화는 중국까지 포함해서 거의 구해 볼 수가 없었어요. 그걸 찾아내면 큰 호응을 받겠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래서 프랑스 문화원부터 갔고, 거기 가니까 부분적인 동구권 영화들이 꽤 많더라고요. 뉴욕이니까 가능한 거예요. 거기 직원들한테 묻고 묻고 하니까 그 외의 타이틀들은 체코슬로바키아 대사관에 가면 있을 거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하나 다니기 시작했죠. 그래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등 문화원을 찾아다니면서 타이틀을 빌려다가, 그 사람들은 PAL 시스템을 갖고 있었는데, 그걸 갖다가 VHS로 변환을 해서 킴스 비디오 아트워크를 씌워서 뒀는데, 일단 인근 대학교 교수들에게 상당히 큰 반응을 얻었어요.
특히 동구권 영화들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물론 있죠. 학교에서 영화 역사에 대해 배울 때 많은 감독들의 이름이 나오죠. 그리고 수업에서 볼 수 있는 게 16mm 필름으로 정도인데, 도저히 비디오로는 구해 볼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의외로 그런 것들이 문화원에 가니까 그냥 썩고 있었어요. 그 판권을 미국에서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도 없었고. 한참 이후에 1995년에서 2000년 넘어가면서 비디오 판권을 배급사들이 하나둘 픽업하기 시작했어요. 저희가 갖고 있던 타이틀들은 판권을 가진 사람이 발매하면 저희는 그걸 내리고 정식으로 구입했죠.
킴스 비디오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저작권 이슈도 큰 비중을 차지했을 것 같아요. 그 문제를 해결하는 비결 같은 게 있었을 법한데.
비결은 없어요. 1년에 평균 40통에서 많을 때는 한 7~80통씩 변호사의 통지서를 받았어요. 그럴 때마다 저는, 감독들은 관객을 만나고 싶어서 영화를 만들었고 그 판권을 너희들한테 배급해달라고 줬는데 너희는 상업적인 이유로 배급을 하지 않는다, 관객들은 분명히 그 작품을 봐야 할 권리가 있고 감독들은 관객을 만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이런 식으로 답장을 했죠. 보통 90년대에 비디오테이프 손익분기점이 5000개입니다. 5000개를 누군가 사줘야 본전이 되는데, 마켓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까 판권만 사놓고 기다리거나 아예 비디오 발매를 안 해요. 비디오뿐만 아니라 극장 개봉도 못하죠, 당연히 초기 비용이 많이 드니까. 제 입장은 달랐거든요. 그래서 상당히 많은 배급사들이나 감독들이 공감을 많이 했어요. 근데 예외적으로 몇몇 배급사들은 저희를 정식으로 고소를 하고, 고소하면 거기에 대해서 저희도 대응을 알맞게 했고. 그런 과정을 참 많이 겪었어요. 기왕 나온 얘기고 비밀도 아니니까, 컬럼비아 스튜디오가 미국 법무부에 저희를 제소했어요. 미국 연방보안관 맨해튼 남부지검 검사 2명 하고 경찰 한 50명이 와서 매장 셔터를 내리고 손님들 다 내보내고, 서버 압수수색하고, 매니저들 10명을 체포하고, 컬럼비아 스튜디오 타이틀은 전부 압수해갔어요. 저는 변호사와 검찰청에 들어가서 재판받기로 약속하고 직원들을 다 데리고 나왔어요. 판사님이 그거 다 내리라고 해서, 돌아와서 컬럼비아가 비디오를 발매한 것만 다 내렸어요. 그리고 제가 컬럼비아에 전화를 했죠. 앞으로 남은 타이틀들 올리면 우리가 정상적으로 다 너희들한테 사다가 배급할 테니 점차적으로 다 발매를 해달라, 아직 발매가 안 된 타이틀은 우리가 계속 유지하겠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더 이상 시비는 안 걸더라고요. 우리 손님들이나 직원들도 전부 다 저를 응원했지, 비난한 사람은 거의 없어요.
당시 특히 기억에 남는 감독님도 있다면.
존 워터스나 짐 자무쉬 같은 감독들은 저를 응원해줬어요. 존 워터스는 <핑크 플라밍고>(1972), <헤어스프레이>(1988) 등 좋은 영화가 많은데도 발매가 안 돼요. 감독 입장에서는 그렇게 좋은 영화를 만들었는데 발매가 안 되면, 배급사 마음대로 하니까 얼마나 속상했겠어요. 그런데 저희 킴스 비디오가 그걸 나서서 해주니 좋아할 수밖에 없죠. 배급사는 불만이겠지만 우리 킴스 입장에서는 당연히 어떤 의무감 같은 게 강했고, 손님들은 도저히 볼 수 없는 영화들을 볼 수 있으니 좋고. 그래서 킴스 비디오 가면 다 있다, 이렇게 명성이 나다보니 자연스럽게… 변호사들 트집 잡는 거 좋아하잖아요. 그 사람들이 툭하면 문서 보내면 저희는 프로듀서나 감독을 직접 연락해서 영화사 변호사한테 이런 게 왔는데 네 타이틀 다 내리라는데, 네 배급사를 밀어붙여서 타이틀을 발매할 때까지만 우리가 할 테니 얘기를 좀 잘 해달라, 그렇게 말하면 거의 다 해결됐어요. 짐 자무쉬는 개인적으로도 친해요. 초기엔 매장에 거의 살다시피 했고, 짐의 사무실 하고 첫 번째 매장 하고 거의 같은 블럭 안에 있었어요. 킴스의 큰 서포터였고, 저희 매장들을 많이 보호해줬죠. 오래전 일이라 다 기억은 안 나는데, 수도 없이 많습니다.
<킴스 비디오>를 보면 직원들이나 손님들이 대표님을 비밀스러운 사람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아요.
직원들도 저에 대해 궁금해했어요. 제가 하는 짓이 좀 엉뚱했어요. 직원들한테도 손님을 영화적인 지식이 있어서 우리가 하는 사인을 보고도 뭔지 바로 이해하는 층과 아닌 분들로 상대하라고 지시했어요. 모르고 와서 우리가 써놓은 메시지를 이해를 못하고 컴플레인 하는 사람들은 잘 가르쳐라. 그런 문화가 킴스에 강하게 특징이 잡혀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손님들이 킴스 가면 왜 이렇게 건방지냐는 말도 참 많이 했어요. <뉴욕 타임즈> 같은 데서도 두 페이지짜리 기사가 나왔어요. 손님들 말을 많이 인용해서 쓰고 나중엔 킴스 비디오니까 그럴 자격이 있어, 라고 끝을 맺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땐 스태프들이 절 봤을 땐 참 이상한 사람이다, 정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좀 꼬여 있고 예상을 뛰어넘는 사람이다, 공통된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 이미지를 지향하셨나요?
제가 평생 살면서 멘토가 셋이 있는데 다 여자예요. 첫 번째 멘토는 우리 할머니였어요. 어렸을 때 할머니 무릎에서 낮잠을 잤는데, 흥미로운 민담(forktale)을 많이 듣고 자랐어요. 누워서 잠이 들면 그 얘기들을 계속 해주셨죠. 미국에 가서도 미국 친구들한테도 그 이야기를 들려주니까 다들 배꼽 잡고 웃어요. 그때 처음, 내가 미국에 빈손으로 온 게 아니라 어마어마한 걸 가져왔구나, 이런 생각이 선뜻 들었어요. 그리고 어머니는 사람은 이렇게 사는 법이야, 이런 걸 많이 가르쳐 주신단 말이에요. 미국 애들한테는 어머니가 경험한 한국적인 사고방식 전부가 신기한 거예요. 이걸 내가 적용하면 얘네들은 전혀 새로운 문화를 저로부터 경험을 하고, 특별하게 생각했어요. 결혼하고부터는 제 집사람한테 많은 충고를 받고. 이게 제가 평생을 살면서 여자들이 제 멘토가 된 과정이었어요. 근데 유익하게 그 여자들이 해준 말이 실제 제 생활에 있어서 적용이 잘 돼요. 한국이 아니고 미국이다 보니까 적용이 더 잘 되는 거 같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저를 새롭다, 뭔가 좀 특이하다, 다르다,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이름을 영어식으로 바꾸지 않은 것에도 강한 고집이 느껴집니다.
광산 김씨 문중이 상당히 크고, 아버지가 그 문중의 장남이세요. 그래서 어려서부터 제사를 많이 지냈어요. 집에 제사가 많다 보니 친척들이 오실 때마다 우리 집은 특별하다는 세뇌 교육 같은 걸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우리 김씨가 아주 대단한 줄로 알았어요. 미국에 갔을 때 할머니한테서 들은 민담이랑 같이 가져갔던 게 우리 문중에 대한 자부심이었어요. 제가 만든 회사가 20여 개 되는데, 전부 ‘김’입니다. 킴스 프로덕션, 킴스 인터네셔널, 킴스 비디오… 그래서 저는 제 이름을 바꾸고 그러면 부정탄다, 그래선 안 될 것 같은 압박이 강했어요. 그래서 제 이름을 손댄다는 건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었죠.
킴스 비디오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하는 제안이 되게 많았을 것 같은데, 데이비드 레드먼/애슐리 사빈의 프로젝트를 허락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마지막 매장을 문 닫아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우리 컬렉션이 5만 5천 개가 있었는데 다른 매장들은 문을 닫으면서 대부분 대학에 기증을 했어요. 그런데 마지막 매장은 워낙 컬렉션이 좋아서 좀 특별한 대학이 가져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제가 3가지 조건을 내밀었어요. 첫째, 3500 스퀘어피트의 공간이 있어야 한다. 둘째, 공공이용이 허락돼야 한다. 킴스 비디오 회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컬렉션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은, 컬렉션이 계속해서 업데이트돼야 하고 숙련된 스탭이 관리를 해야 한다. 이 세 조건을 만족하면 우리 컬렉션을 기증하겠다고 「뉴욕 타임즈」와 「빌리지 보이스」에 광고를 했어요. 대학, 갤러리, 라이브러리 등 한 4~50 군데가 지원을 해왔어요. 일일이 다 다녔어요. 이런저런 조건들이 조금씩은 문제가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대부분 일반 사람들이 자기 기관에 테이프를 빌려가는 걸 상시적으로 해줄 수는 없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주저하고 있었죠. 조건을 좀 바꿔주면 좋겠다고 하는 곳이 꽤 있었는데 그건 안 된다, 우리 컬렉션은 공적인 물건들이고 사람들이 원하면 언제든지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고집했어요. 그러던 와중에 시실리(시칠리아)에서 연락이 온 거예요. 당시엔 살레미 시장이고 지금은 문화부 차관인 비토리오 스가르비로부터 연락이 와서 일이 순조롭게 됐어요. 그 사람 배경도 확인해봤는데 문화적으로 유럽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시실리로 가면 괜찮겠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거기에 주기로 했더니 뉴욕에서 난리가 났어요. 근데 저는 뜻을 굽히지 않고 기증하겠다고 했죠. 그때 「뉴욕 타임즈」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 인터뷰 때 제가 “난 실패자다. 난 그저 잊혀지고 싶다”고 이야기했고, 솔직한 심정이었어요. 킴스 비디오는 이걸로 끝이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그렇게 하고 일주일도 안 돼서 살레미에서 다 가지고 갔어요.
그 후 몇 달 사이로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싶다는 제안서가 많이 왔어요. 일체 대답을 안 했죠. 영화 공부를 한 제 딸을 통해서 어느 교수가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고 제안이 오기도 했고. 그래도 한 3년 동안 대답을 안 했어요. 그렇게 시간이 지난 이후에 아는 사람을 통해서 데이비드하고 애슐리가 제안서를 가지고 왔어요. 그것도 무시를 했는데, 그러고 또 3년이 지났는데 누가 계속 뭘 막 찍고 다닌다는 거예요. 제가 no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먼저 찍기 시작한 거예요. 3년 동안 찍어놓은 게 어마어마하게 많더라고요. 잊어버렸던 사람들도 이미 다 만났어요. 스태프들 다 만나고, 시실리 가서 스가르비도 인터뷰하고. 이미 다 해놓은 거예요. 그래서 이 정도 열정이라면 믿어도 되겠다 생각하고, 일체 간섭 안 할 테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라, 해서 6년 만에 끝난 거죠.
킴스 비디오 문 닫으면서 컬렉션 중에 개인적으로 가지고 챙겨온 것도 있으세요?
일절 없어요. 100% 다 줬어요. 저는 저 나름대로 개인 컬렉션이 따로 있어요. 아무튼 제가 매장을 닫을 때마다 거기에서 속해 있던 컬렉션들은 한 번도 팔아본 적이 없어요. 전량을 통째로 다 대학에 주고 그랬죠.
그럼 개인 컬렉션 중에서 가장 아끼는 건 무엇인지 자랑 좀 해주세요. (웃음)
제 친구 닉 제드가 만든 <폴리스 스테이트>(1987)라는 영화예요. 나이는 저보다 두 살 아래인데 2년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홈리스와 경찰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짧은데도 영화는 이래야 돼 라는 걸 보여주는 강렬한 작품이에요. 아마 이런 테이프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거예요.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 테이프를 놓치죠. NYU 학생이 만든, 타이틀이 생각이 안 나는데… 그것도 <킴스 비디오>에도 그 영화 타이틀이 나옵니다. 제가 좋아하는 타이틀은 아마 대부분 모르거나 한 번도 보신 적이 없는 게 대부분일 거예요.
IMDb를 보면 <그 섬에 가고 싶다>와 <초록 물고기>에 출연했다는 기록이 있던데, 대표님 맞나요?
아닙니다. <초록 물고기>에 보니까 캐릭터 중에 용만이가 나와요. 제가 이창동 감독을 박광수 감독의 조감독 시절에 처음 만났거든요. 정확한 개연성은 잘 모르겠어요. 제 고향이 군산인데, 이창동 감독 영화에 군산이 가끔 등장해요. 우연인지 저하고 만난 걸 기억해서 그런지 몰라도… 그런데 별로 좋은 역할로는 등장하진 않아요. (웃음)
박철수 감독의 <삼공일 삼공이>(1995)나 <학생부군신위>(1996)은 프로듀서로 참여한 게 맞는 거죠?
<삼공일 삼공이>는 스크립트 단계부터 제가 참여했어요. 시나리오를 쓴 친구(이서군)가 NYU 학생이었어요. 제가 학생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도 바로 그래서예요. 킴스 비디오에는 학생 영화 섹션이 있고, 제가 제일 아끼는 섹션입니다. 5분짜리, 10분짜리 영화들이 얼마나 신선하고 아이디어가 진한지. <삼공일 삼공이> 1장짜리 트리트먼트 써온 사람이 그때 스무살 그 즈음이었을 텐데요. 그걸 박철수 감독이 장편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초기 단계부터 참여하고 결국 완성돼서, 제가 최대한 아는 라인으로 연결해서 미국 배급까지 이뤄졌어요.
2023년, 용만 킴의 가장 흥미로운 관심사는 무엇인가요?
시실리에서 지금 ‘시네킴’이라는 영화제가 매년 7월에 열려요. 올해 2회차 끝났고 내년 3회차죠. 시골에 젊은이들이 없어지잖아요. 거기도 같은 현상인데, 시네킴이라는 플랫폼을 이용해서 시골의 청년들을 돌아가게 하는… 거기도 메인 콘셉트는 ‘Odyssey’입니다. 자기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다시 귀환하게 하는 콘셉트의 영화제에 지금 제가 상당히 많은 욕심 내지는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