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저 배우 누구야?! 하게 될 것이다.

이성이든 동성이든 특정한 상대방에게 첫눈에 반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상대방과 내가 이뤄질지, 어떨지는 30초 안에 판가름 난다고. 눈을 비롯한 안면의 여러 요소가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해주기 때문이리라.

물론 현실은 냉혹하지 후후


<화란>(2023)의 두 인물

그래서일지 모르겠다, 치건(송중기)은 중식집에서 연규(홍사빈)를 본 첫눈에, 단박에 어떤 사람인지 알아본다. 아마 이것은 어둠의 세계에 몸담고 있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시민의 고혈을 빨아먹으며 살 수밖에 없는 처지와 닮아 있는 어떤 거울을 발견해서 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그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치건. 그 스스로도 무의식 깊은 곳에선 비슷한 냄새를 풍기는 대상을 만나게 되면 문답무용의 과정을 거쳐 한 번에 알아보고, 그리고 그 존재를 구원해야만 한다는 강박을 가졌을 지도 모를 노릇이다. 그것이 스스로를 구하는 길이라 믿기 때문에.

치건은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왔지만, 실은 그것이 상처라고 인지하지도 못 한 채 살아왔다. 그렇게 저벅저벅 한 길을 걷다가 뒤돌아 봤더니 "이건 해야 해, 해야만 하는 거야"의 세계에 젖어서 개미지옥에 빠진 상황이 되었다. 알코올 중독의 생부는 저수지에 빠져 죽어가는 어린 치건을 돌보지 못했다. 그는 중범(김종수)의 낚싯바늘에 귀가 걸려 살아남았다. 비정한 친아빠 대신 더 비정한 조직의 보스가 곧 아버지가 된 것이다.

그런 치건은 올바름과 그름에 관한 교육을 받아왔을까? 소년미를 아직도 간직한 38세의 배우, 송중기가 뿜어내는 치건의 초목표는 아마도 치건에겐 그런 판단 자체가 사치인 성장 과정을 거쳤을 것이라고 발현한다. 실은 관객도 치건을 처음 보는 순간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기 어렵지는 않다. 연규는 정덕(유성주)에 의해 안면에 큰 흉터를 입고 일하던 중식집에서 해고된다. 거기에 화를 내자 밥을 먹고 있던 덩치들이 사나운 분위기를 만들지만, 귀가 잘린 뒷모습으로 되려 고요함을 종용하는 사내를 보며 문답무용의 인상을 받아간다.

시나리오 단계에서 이런 배우에게 치건을 읽어내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일 것이다.


모티브

신화에서 발견되는 부자(父子)의 요소로 등장하는 대표적인 것으로 오이디푸스와 크로노스가 있다. 아버지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오이디푸스와, 자식을 잡아먹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다고 믿었던 크로노스. 그들을 통해 자식과 아비가 가지는 무의식에서 발현되는 생존과 그 너머의 성장적 요소를 들여다볼 수 있다.

연규의 양아버지는 술만 먹으면 양아들을 팬다. 연규는 자신의 이복동생, 하얀(김형서)과 더럽게 엮인 학우를 돌로 내려쳐 보상금이 필요하지만 그조차 없어 지옥 같은 상황에 빠져든다. 그런 연규를 보고 구원처럼 나타난 것이 첫눈에 그를 알아본 치건이었다. 치건에게 민물이라는 비릿한 모티브는 지겨울 법도 하지만, 그는 도망쳐온 연규에게 민물고기를 손질해 먹인다. 연규는 치건을 따라 말없이 민물고기를 먹는다. 치건처럼 되고 싶다는 비유적 표현을 하는 연규는 뜨거운 생선을 먹다가 입안을 데인다. 치건은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지만, 치건을 위해 술을 마시게 되며 결기를 다진다. 그렇게 아버지가 없는 두 사람에게 암묵적인 유사 부자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영화는 "저도 형처럼 되고 싶어요"라고 하지 않는다. 조용히 행동을 따라한다.

조직에는 큰 형님이라 불리는 중범 또한 광대한 의미에서 아버지적인 모티브를 띈다. 직접적 폭정을 겪는 치건과 연규는 물론이고, 조직 내에서 치건과 형제의 난을 일으키는 승무(정재광)와 조직과 연계된 국회의원 후보자인 의석 (서동갑)에게도 그렇다. 그리고 연규는 이 아버지적인 존재에 의해 형제 같은 의석과 치건에게 칼을 겨누게 된다.

극의 전반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조건까지 고려하면 중국집 사장(정만식)과 다리를 저는 오토바이 배달꾼, 완구(홍서백) 또한 연규에게 아버지적인 요소를 가진다. 연규는 중국집에서 짤리며 화분을 던져 복수를 하고 바이크를 훔친다는 면에서, 그리고 완구의 바이크를 훔치고 돌려주고 다시 훔쳤던 결과로 조직으로부터 쫓기게 된다는 면에서 폭력적인 요건을 상호적으로 주고받는다.

이렇게 이야기는 여러 인물들이 설키며 아버지로서 혹은 형제로서 다가와 관계를 재형성한다. 연규는 양아버지에 의해 상처가 생겨 해고당하고 그래서 조직에 들어간다. 이로 인한 피해는 중국집 사장과 완구에게 돌아간다. 연규와 치건이 결정적 다툼을 하게 되는 데는 중범의 포악한 정치와 완구의 복수가 배경에 있다. 그리고 그 영향은 주체적으로 아버지가 된 유일한 존재, 치건에게 돌아간다. 그 반작용으로 연규는 엄마를 죽인 양아빠를 용서하게 되는 기묘한 고리를 형성한다. 어떤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향을 다른 아버지에게 역작용 시키는 기이한 양식이 반복된다. 여기서 나쁜 아들은 나쁜 아버지에게서 잉태됐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나이 픽쳐스가 제작하는 누아르는 그 문법이 점점 깊어지고 있다.


투영

누구나 유년기 시절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그 상처는 보통 돌아갈 곳이 없다는 어두운 확신에 의해 영원히 아물지 않거나, 더 커지거나, 다른 형태로 전이되곤 한다. 상처가 감금된 그 방의 시간은 흐르지 않으며 다들 그 방의 문을 열려고 하지 않는다. 문고리는커녕 그 방의 방향으로 바라보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상흔의 내음은 문틈이든 어디든 새어나와 본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인격이라는 잘 다듬어진 수면 위의 빙산은 어쩔 수 없이 아래에서 무게중심을 담당하는 거대한 얼음덩이에 끌려갈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시간이 지나 그 상처를 직시할 수 있게 됐다고 해도,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목도는 매우 괴롭지만 아쉽게도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

단지 연규는 자신을 알아볼 사람이 필요했고 치건에게는 구원의 피동적 대상이 필요함을 늘 느껴왔기에 한눈에 알아봤다. 그렇게 만났으나 장르적 법칙이 어두운 멜로를 낳았을 뿐이다.

두 사람과 그 사이의 외적인 벽이라는 면에서 멜로를 보는 것 같다.


엔딩

애시당초 자신은 죽었다고 생각한 치건은 실질적 죽음으로 되려 자유를 얻는다. 그리고 연규 또한 치건의 도움으로 (유사) 부친 살해를 통해 자유를 얻고 어른이 되어 하얀과 함께 떠난다. 이 장면을 희망으로 볼 수 있을까? 의도적으로 맑은 하늘에 반해 낮은 명도의 병치가 돋보이는 이 마지막 장면은 판단을 관객에게 유보한다. 그것이 도망친 곳에 희망은 없다는 절망이 될 것인지, 성장엔 통증이 따를 뿐이라는 등불이 될 것인지는 우리들이 걸어온 길에 따라 달리 보일 것이다.


프리랜서 막노동꾼 이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