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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인 현대사의 기록:〈그때 그 사람들〉vs.〈서울의 봄〉

씨네플레이

<그때 그 사람들> (임상수, 2005)

데뷔작 <눈물>과 <바람난 가족>에 이은 임상수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다. 영화는 박정희 암살 사건이 일어난 10월 26일의 밤을 그린다.

헬기에 남은 자리가 없다고 대통령과의 행사에 함께 가지 못한 채 병원을 찾은 중앙정보부 김부장(백윤식)은 주치의로부터 건강이 안 좋으니 잠시 쉬라는 권유를 받는다. 집무실에서 부황을 뜨던 중 대통령의 만찬 소식을 전해 들은 김부장, 잠시 생각에 잠기지만 이내 수행 비서 민대령(김응수)과 함께 궁정동으로 향한다. 만찬은 시작되고, 오늘따라 더 심한 경호실장의 안하무인 태도에 빈정이 상한다.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그는 슬며시 방을 나와 오른팔 주과장 (한석규)과 민대령을 호출하여 대통령 살해 계획을 알린다. 김부장의 명령에 잠시 머뭇거리던 주과장은 별 뾰족한 수도 없는 듯 명령에 따르기 위해 걸음을 옮긴다. 경비실로 들어온 주과장은 부하 네 명에게 작전을 명령하고 무장시킨다. 명령이라면 무조건 복종하는 충직한 부하 영조와 순박한 준형, 비번임에도 불구하고 끌려나온 경비원 원태, 그리고 해병대 출신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지목된 운전수 상욱까지 부하들은 영문도 모른 채 주과장의 명령에 따라 각자 위치에서 대기를 한다. 그리고 얼마 후 김부장의 총성이 울린다.

<그때 그 사람들>은 1979년 박정희 사망 이후로 처음으로 (드라마 제외) 10.26 사건을 재현한 극영화(상업영화)다. 놀라운 것은 이 영화가 이 역사적 사건의 ‘최초의 영화적 기록’이라는 타이틀을 가질 것이 명백함에도 리얼리즘과 사실주의에 기반한 재현 모드가 아닌 과장과 풍자가 난무하는 블랙코미디로 연출되었다는 사실이다. 박정희 암살 사건을 최초로 영화화한다는 엄청난 어젠다에 더해, 앞서 고작 두 편의 영화를 만든 (신예) 감독으로서는 참으로 배짱 좋은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영화는 예상한 바대로 박정희의 유족, 박정희 전대통령의 장남 박지만으로부터 영화 상영 금지 및 손해배상 청구를 받았다. '고인을 희화화시켰다'라는 명목이었다. 제작사인 MK픽처스(현 명필름) 측은 오프닝과 클로징의 다큐멘터리 장면을 삭제하는 방식으로 상영을 강행했고, 임상수 감독은 그렇게 삭제한 분량을 암전 된 검은 화면 그대로 내보내는 것으로 소신을 지켰다. 이 소송은 MK 픽처스가 가처분 이의 신청을 내면서 결국 3년여가 지난 후 양 측의 조정으로 마무리되었다.

 

(예상 가능했던)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때 그 사람들>은 한국영화사상 가장 영리하고 치밀한 정치 풍자극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영화적 성취를 보여주었다. 그중 하나는 영화가 크고 작은 사건을 전달함에 있어 늘 리얼리즘과 블랙 코미디의 농담 혹은 픽션적 설정을 병치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실제 사건들’에 해당되는 재현적 경향이다. 가령, 영화 속 박정희 살해는 빈정이 상한 김부장의 우발적인 결심인 듯, 어쩌다가 일어난 것처럼 코믹하게 묘사가 되지만 그의 살해 동기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차지철과 박정희의 대화는 그들이 꿈꾸는 야만한 이상과 잔혹한 계획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실의 전달인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널리 보면, <그때 그 사람들>은 블랙코미디라기보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 ‘패러디’에 가깝다. 전달하는 주체는 다르지만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사건들 중 하나였던 이 비극의 본질과 배후의 인물들, 그리고 그들의 야욕은 손상되지 않은 채 그대로 전시되기 때문이다. ‘씁쓸한 코미디’라는 뜻을 가진 블랙 코미디가 ‘그때 그 사람들’의 혼령을 다 담아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울의 봄> (김성수, 2023)

매우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활동했던 감독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 김성수 감독의 현재까지 연출 편수는 여덟 편으로 많지 않다. 2003년 <영어 완전 정복>이라는 작품 이후로 <감기>까지 10여 년간의 휴식기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액션과 재난 영화, 로맨틱 코미디까지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연출해 왔음에도, 김성수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한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이제껏 없었다는 사실이다. 다음 주 개봉을 앞두고 있는 <서울의 봄>은 김성수 감독으로서는 첫 ‘현대사극’이자 한국영화로서는 처음으로 12.12 군사반란을 재현한 극영화라는 눈여겨 볼 위치에 서 있다.

 

영화는 1979년 12월 12일, 수도 서울에 군사반란이 일어난 그 배경으로부터 시작된다. 대한민국을 뒤흔든 10월 26일 이후 서울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온 것도 잠시 12월 12일, 보안사령관 전두광(황정민)은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군 내 사조직, 하나회 멤버들을 총동원한다. 그는 참모총장(이성민)을 납치해 반란을 일으키고 최전선의 전방부대까지 서울로 불러들인다. 권력에 눈이 먼 전두광의 반란군과 이에 맞선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정우성)을 비롯한 진압군 사이, 일촉즉발의 9시간 동안 벌어지는 치열한 전쟁이 펼쳐진다.

영화는 9시간 동안 벌어지는 하나의 사건을 시간순으로 구성하는 데 있어 단 1초와 한 커트도 낭비하지 않는다. 예컨대 하나의 결정이 이루어지기 위해 거치는 엄청나게 많은 인물들과 공간을 차근차근, 그러나 구태의연하지 않게 놀라운 속도와 박진감을 잃지 않고 전달하도록 구성하는 것이다. 최근 한국영화의 러닝타임이 큰 명분과 성과 없이 120분을 넘어가는 것이 눈에 띄는 경향 중 하나였다면 이 영화의 140분 러닝타임이 정당화가 되고도 남을 정도의 짜임새와 동력을 보여준다.

 

 

영화적 맥락에서, <서울의 봄>은 2023년 한 해 동안 개봉한 한국영화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동시에 영화는 한국의 현대사를 충실하게 기록한 문화적 텍스트로서 손색이 없을 정도의 ‘정황적 정확성’(circumstantial evidence/accuracy) 혹은 그것을 달성하려는 치열함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서울의 봄>은 정치적 책무가 아닌, (문화 상품으로서 마땅한) 합리적 해석과 기록, 그리고 공유의 임무에 더 공을 들이고 헌신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인 것이다. 2005년 박정희 암살을 기록한 <그때 그 사람들>이 개봉한지 18년 이후에 등장한 <서울의 봄>은 그때만큼은 아닐지라도, 그럼에도 화두가 될 만한 영화적 재현일 것이다. 한국사의 또 다른 비극을, 또 다른 역작으로 탄생하게 해준, 감독 김성수에게 무한한 응원과 박수를 보내고 싶다.

 

김효정 영화평론가